현지인들만 가는 밤베르크 브루어리 5곳
여행은 낯섦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낯섦은 여행이 주는 작은 도전이다. 여행이라는 낯선 시공간 속에서 맥주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작은 용기와 설렘을 동시에 건네는 친구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과 맥주의 계절인 7월을 항상 고대한다.
안타깝게도 2020년 7월은 우리에게 낯섦과 설렘을 잠시 미뤄두라 한다. 여행과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힘들겠지만 사회공동체의 안녕과 건강을 위해 인내가 필요한 시기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다행스럽게 인터넷과 TV와 같은 랜선(LAN線)투어를 통해 여행의 낯섬과 설렘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랜선투어에는 영상이 가장 선명하다. 하지만 오늘은 글과 사진을 통해 잠시 다른 시공간으로 가보려 한다. 우리의 상상력과 감성을 조금 더 자극해보자. 그럼 어디가 좋을까? 이왕이면 맥주와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보면 좋을 것 같다.
밤베르크, 이번 여행을 위해 이 도시만큼 완벽한 곳은 없을 것이다.
밤베르크는 독일 바이에른 주 북부인 프랑켄 지역에 있는 작은 도시다. 11세기부터 카톨릭 주교령이 있는 중심도시이며, 세계대전의 폭격을 기적처럼 빗겨간 유일한 곳이다. 중세시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시가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독일인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지만 밤베르크는 관광만을 위한 곳은 아니다. 세계문화유산과 더불어 이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 있다. 바로 맥주다. 밤베르크가 있는 프랑켄은 독일에서 가장 많은 브루어리를 가지고 있는 지역으로 작고 다양한 맥주들이 넘치는 곳이다. 프랑켄 사람들에게 맥주는 단순한 마실 거리를 넘어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다. 이들은 맥주도시로 유명한 뮌헨조차 우습게 생각한다.
밤베르크 맥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라우흐비어(rauchbier)다. 라우흐비어는 훈제향이 나는 맥주로 훈연몰트로 만드는 전통 밤베르크 맥주를 의미한다. 라우흐비어는 17세기 이전 나무를 태워 몰트를 만들던 아주 오래된 방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라우흐비어로 가장 유명한 브랜드는 슈렝케를라(Schlenkerla)다. 너도밤나무로 훈연한 몰트를 사용해 부드러운 훈제향과 함께 건블루베리, 블랙베리와 같은 검은 과일에서 느낄 수 있는 농밀함을 가지고 있는 맥주다. 슈렝케를라와 함께 슈페지알(spezial), 페슬라(Fässla) 또한 라우흐비어를 대표하며 현지인들과 많은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밤베르크에는 라우흐비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밤베르크 구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프랑켄 사람들의 자부심과 역사가 담긴 작지만 재미있는 맥주를 맛볼 수 있다. 특별한 랜선맥주투어에 너무 뻔한, 남들 다가는 곳을 가는 것은 재미없다. 일반 관광객들을 볼 수 없는 곳, 현지인들만 간다는 ‘지역 맥줏집’이어야만 낯섦과 설렘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곳으로 간다. 밤베르크 현지인들이 가는 찐 맥주집으로.
마흐스 브로이 Mahrs Brau
Wunderburg 10, 96050 Bamberg
밤베르크 구도심에서 동쪽으로 차로 10분 정도 가면 한적한 마을 속 마흐스 브로이를 만날 수 있다.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입구에 들어서면 널따란 비어가든이 우리를 맞이한다. 마치 이 곳을 어떻게 알고 왔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지역주민들의 어정쩡한 눈빛과 인사가 낯설게 느껴진다. 당당하자. 우리는 맥주, 특히 밤베르크 맥주를 사랑하기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건물로 들어서면 꾸미지 않고 투박하지만, 오랜 것이 주는 기운이 느껴진다. 구리로 도금된, 연식을 알 수 없는 커다란 수도꼭지와 방금 전까지 콸콸 쏟아지는 맥주를 담았던 것 같은 나무통이 이 곳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알게 한다. 그렇다. 무려 1670년부터 맥주를 만들고 있는 곳이다.
맥주 주문을 위해 들어가니 어김없이 지역주민들이 맥주 한잔과 함께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다.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 옆에 있는 맥주는 별다방의 커피보다 아름답다. 여러 맥주 중, 밤베르크 라거를 선택한다. 짙은 황금색의 라거는 옅은 캬라멜 향과 함께 꿀떡꿀떡 목으로 넘어간다. 전통적인 스타일의 맥주만 마실 수 있을 것 같지만 비교적 현대적인 라벨과 이름을 가진 맥주들도 볼 수 있다.
다 맛보고 싶지만 벌써부터 취하기엔 여행이 길다. 병맥주로 구입하고 다음 양조장으로 출발하자.
키스만 브로이 Keesmann Brau
Wunderburg 5, 96050 Bamberg
멀지 않다. 바로 길 건너에 있다. 육중한 문과 함께 단단해 보이는 건물이다. 호기롭게 걸어가 문을 살짝 밀어본다. 여관처럼 생긴 이 곳은 멋진 필스를 맛볼 수 있는 양조장이다. 다소 어두운 입구로 들어서면 나무 베럴로 만든 아기자기한 테이블이 반갑게 인사한다. 이 곳은 1867년에 시작된 키스만 브로이다. 여기에 온 목적은 하나, 아름다운 헤렌 필스(Herren pils)를 마시기 위해서다.
뒤에 있는 비어가든에는 어김없이 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이 나무는 한 여름 더위로부터 맥주를 구하는 수호신과 같다. 밝은 황금색의 헤렌 필스는 다소 지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달래준다. 옅은 풀향과 청량한 탄산감에서 정통 독일 필스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낯선 곳에서의 힐링. 흔한 관광객들이 북적되지 않은 곳에서 느끼는 이 낯섦은 힐링이다. 필스 한잔을 느긋하게 즐긴 후, 천천히 길을 나서자. 이제 급할 필요 없다.
브로이하우스 암 크로이츠베르크 브로이 Brauhaus am Kreuzberg
Kreuzberg 1, 91352 Hallerndorf
이제 밤베르크 구도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멀리 가보자. 차로 약 40분 정도가면 예쁜 성당과 그림과 같은 브루어리를 만날 수 있다. 크로이츠베르크 브로이하우스다. 크로이츠베르크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을 뜻한다. 이 신성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크로이츠베르크 브로이하우스를 가야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속단하지 말자. 아주 전통적인 맥주만을 만들고 있을 것 같지만, 이 곳에서는 독일에서 가장 독특하고 급진적이며 도전적인 맥주를 만날 수 있다. 위스키 베럴에 숙성한 9.5% 알코올 도수를 가진 위스키 복(whiskey bock), 8% 알코올의 쉐리 복(sherry bock), 10% 알코올의 아이스복(eisbock) 그리고 무려 11.5%의 알코올을 가진 꼬냑 복(Cognac bock)까지 최고 수준의 크래프트 맥주를 만드는 곳이다.
크로이츠베르크 브로이하우스는 증류주를 만드는 디스틸러리(distillery)를 보유하고 있다. 이 곳에서 만드는 위스키와 꼬냑은 맥주와의 아름다운 이종교배를 만들었다. 독일 전통 스타일의 맥주는 물론이고, 베럴 숙성 맥주와 같은 담대한 도전까지, 골고다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가진 작은 언덕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소동은 살짝 감격적이다.
조금 힘들 수 있지만 11.5% 알코올을 가진 꼬냑복과 전통 켈러비어를 마셔본다. 크래프트와 전통을 한번에 경험할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다. 잠시 감상에 젖을 즈음, 인상 좋은 한 남성이 다가와 먼 곳에서 온 우리를 위해 양조장을 보여주신단다. 이 곳이야 말로 맥주천국 아닐까? 이런 경험을 가능하게 한 주인장과 사진 한 장 정도는 괜찮을 듯.
살짝 취기가 오르지만 밤베르크의 긍정적인 기운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골고다 언덕의 좋은 기운를 받았으니 이제 오랜 장인정신을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가본다. 수 십년 동안 맥주 한길을 걸어온 멋진 여성을 만나러.
Michael Büttner
Untergreuth 8, 96158 Frensdorf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20여분 정도 가다보면 운터그로이트라는 작은 도시를 만날 수 있다. 이 곳에 있는 뷔트너 브로이는 화려하지도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독일식 건물에 있는 작은 양조장이다.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뷔트너 맥주는 묵직하다. 수 십년 간 한 길을 걸어 온 여성 브루어의 맥주이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맥주를 따라 툭 내주는 주인장은 여전히 맥주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평범할 것만 같은 황금색 라거 한잔에서 굳고 단단한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지금 맥주를 마시고 있는 저 사람들은 분명 주인장의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겠지. 한낱 맥주가 누구에게는 추억과 그리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무뚝뚝해 보이는 주인장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게 된다.
다시보니 장인이 건넨 건 맥주가 아니라 묵직한 울림과 작은 떨림이었다.
Muller brauerei
Würzburger Str. 1, 96135 Stegaurach
뷔트너에서 차로 5분을 가면 방앗간 주인을 뜻하는 뮬러 브로이를 만날 수 있다. 평범한 레스토랑처럼 보이지만 이 곳은 최고의 둔켈(dunkel)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둔켈은 어두운 색을 띄는 라거를 의미한다. 캬라멜 힌트와 약간의 단맛, 조금 묵직한 바디감을 가진 뮬러의 둔켈은 가장 태초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바이에른에서 둔켈은 가장 흔하게 마실 수 있는 맥주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과거에 비해 쉽게 접할 수 없는 맥주가 되었다. 튀지 않고 담담하지만 섬세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둔켈을 뮬러 브로이에서 만난 건,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작은 선물과 같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 나가는 순간 젊은 커플과 노부부의 모습이 보인다. 세대가 다르지만 같은 세월을 공유하는 모습이 부럽다. 다이나믹한 시공간의 변화가 일상이 된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모습. 지금 불고 있는 레트로의 열풍도 시공간을 잠시 멈추고 현재를 즐기고 싶은 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오늘 랜선 맥주투어의 종착지인 뮬러 브로이는 일상이 주는 평안, 세대가 공유하는 공간의 가치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맥주가 주는 가치임을 느끼게 한다.
여행은 우리를 스스로 낯설게 하기다. 이런 낯섦은 일상이 있어야지만 가능하다. 여행이란 평범한 일상에서 살짝 위태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은 일상이 주는 소중함과 같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은 다른 문화로부터의 낯섦을 잠시 멎게 했다. 하지만 이 실망감을 또다른 설렘으로 살짝 치환을 해보면 어떨까? 분명 맥주는 그 두근거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다. 첫 밤베르크 여행에서 마시는 멋진 맥주를 상상하는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