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위한 원정대는 필요치 않다.
빛도 들지 않는 3등석. 하지만 이 곳은 아일랜드 파이프와 바이올린이 만든 흥겨운 멜로디로 가득하다.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춘 로즈는 손에 든 맥주를 단숨에 들이킨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잭에게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한마디 한다.
“왜요? 1등석 여자는 술도 못 마신다고 생각했나요?”
1등석 승객인 부르주아 출신의 로즈가 계급이라는 굴레를 벗는 이 씬은 영화 타이타닉 중 두 번째로 재미있는 장면이다. (첫 번째 재미있는 장면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이 장면이 특별했던 이유는 로즈의 손에 들려있던 맥주 때문이다.
흑맥주도 황금색의 라거도 아닌 이 맥주는 잉글리시 페일 에일(English pale ale)이라는 스타일이다. 잉글리시 페일 에일은 18세기 영국 런던에서 만들어진 맥주로 앰버(amber) 색을 띠고 있다. 흑맥주 포터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앰버는 맥주에서 볼 수 없었던 색이었다. 사람들은 곧 이 아름다운 앰버 색 맥주에 빠져들었고 서서히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빨간색 삼각형. 아주 잠시 스치지만 3등석 사람들이 들고 있는 맥주병 라벨에 빨간색 삼각형이 보인다. 이 삼각형은 183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바스(Bass)라는 맥주회사의 로고다. 영국 ‘버튼 온 트렌트’가 고향인 이 브루어리는 섬세한 과일의 에스테르와 꽃향 그리고 부드러운 쓴맛이 나는 바스 페일 에일을 만들어 런던과 세계 시장을 점령했다.
1912년 영국 사우스햄턴에서 뉴욕으로 출항한 타이타닉은 명성에 맞는 맥주가 필요했고 가장 명성 높았던 바스 페일이 선택 받았다. 실제 약 1만 2000병의 바스 페일 에일이 타이타닉에 실렸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은 이 작은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3등 칸 맥주에 복선과 주술적 의미를 부여했다.
잭의 초대로 3등석에 내려온 로즈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며 어울리려 했지만 그 간극은 그녀의 버건디 색 드레스와 3등석 사람들의 무채색 옷만큼 컸다. 넘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벽을 무너뜨린 건 다름 아닌 맥주였다.
댄스 타임이 끝난 후, 로즈에게 맥주를 건넨 잭은 실수로 그녀의 드레스에 맥주를 쏟는다. 걱정하는 잭 앞에서 호탕한 웃음을 짓는 로즈, 와인색 드레스를 맥주색 앰버로 바꾸는 이 맥주세례는 그녀를 계급과 가식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리고 맥주가 건넨 이 새로운 자아는 타이타닉 사고 이후 그녀의 삶을 이끈다. 맥주가 일종의 정화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맥주는 감독의 의도를 보여주기도 하고 보는 사람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맥주 환자인 나에게 영화 속 맥주는 당연히 첫 번째 관심사다. 그 의미를 읽든, 아니면 의미를 붙이든 맥주 환자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면 새로운 감동이나 호기심 그리고 상상력이 생긴다. 1992년 개봉해 많은 한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맥주가 희망인 것처럼.
감옥 옥상에서 동료들과 작업 중인 앤디는 우연히 간수 하들리의 세금 문제를 엿듣는다. 전직 회계사였던 그는 자신이 세금 문제를 처리해 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수 천 달러를 절세한 대가로 요구한 것은 인당 3병의 차가운 맥주. 앤디는 하들리에게 맥주가 야외 노동을 하는 남자들의 사기를 올려준다고 둘러대지만 진짜 이유는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레드’의 독백에 나온다.
“1949년 오전 10시 공장 옥상에서 얼음과 같이 차가운 보헤미안 스타일 맥주를 마셨다. 어깨 위로 쏟아지는 햇빛과 함께 맥주를 마시니 마치 자유인이 된 것 같았다. 꼭 우리 집 옥상을 고치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앤디는 그늘에 앉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마시는 우리를 지켜볼 뿐이었다…간수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친구를 만들기 원했던 걸까? 아마 그는 잠시나마 평범했던 날들을 다시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 앤디뿐만 아니라 옥상에서 있는 모든 죄수들은 잠깐이지만 맥주를 통해 평범했던 일상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의 반대말을 평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반대말은 일상이다. 자유인으로서 일상은 마치 공기와 같다. 너무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을 뿐.
아마 죄수들은 일상에서 맥주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동네 펍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던 순간, 좋아하는 스포츠팀을 맥주와 함께 응원하던 순간 그리고 소파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며 멍 때리던 순간까지, 맥주는 평화로운 일상을 상징한다. 그 일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옥 같은 감옥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희망이 생기지 않았을까?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맥주는 사라진 인간성과 희망을 되살리는 멋진 존재다.
그렇다면 쇼생크 감옥에서 그들이 마신 맥주는 무엇일까? 레드는 이 맥주를 ’얼음과 같이 차가운 보헤미안 스타일 맥주’라고 회상한다. 아마 맥주 라벨에 있는 ‘Stroh’s Bohemian Beer’를 기억해 낸 것이리라. ‘차가운 보헤미안 스타일’, 이 키워드는 우리에게 쇼생크 탈출 속 맥주에 대한 힌트를 건네준다.
얼음과 같이 차갑게 마시는 맥주, 이 맥주는 라거다. 낮은 온도에서 만들어지는 라거는 일반적으로 매우 차갑게 해서 마시기 때문이다. ‘보헤미안 스타일’의 보헤미안은 체코를 의미한다. 체코는 황금색 라거의 탄생지다. 1842년 체코의 작은 도시 필젠에서 최초의 황금색 라거가 탄생한다. ‘필스너 우르켈’이라고 불리는 이 맥주는 이후 ‘필스너’라는 스타일이 되었다. 이들이 마시는 맥주는 바로 황금색 라거인 필스너였다. 하들리가 죄수들에게 준 맥주는 밍밍한 아메리칸 라거가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은 독일 이민자 덕분에 라거 맥주에 익숙했지만 유럽과 달리 옥수수를 넣었다. 옥수수는 미국에서 가장 흔하고 가격이 싼 곡물이었기 때문이다. 금주령 이후 미국 브루어들은 본격적으로 옥수수 같은 부가물을 넣은 저렴한 라거를 만들었는데, 이를 아메리칸 어드정트 라거, 흔히 아메리칸 라거라고 한다. 세계 대전 이후 슐리츠, 옌링, 버드와이져 같은 미국 회사들은 이 아메리칸 라거를 전 세계로 퍼트리며 맥주 시장을 정복했다.
1949년 오전 10시 쇼생크 감옥에서 죄수들이 마신 보헤미안 필스너는 100% 보리 맥아와 유럽의 노블홉으로 만들기 때문에 아메리칸 라거보다 더 비싸다. 맥주는 가끔 악마도 천사로 변하게 한다.비록 사악했던 하들리지만 죄수들에게 적어도 맥주만큼은 값싼 아메리칸 라거가 아닌 보헤미안 필스너를 준 것이다. 지옥과 같은 쇼생크 감옥을 잠시나마 천국으로 만들어 준 Stroch’s beer는 디트로이트 맥주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타이타닉이나 쇼생크 탈출처럼 근현대가 배경인 영화 속 맥주를 보는 것도 즐겁지만 개인적으로 중세 영화에서 맥주를 찾는 것을 좋아한다. 반지의 제왕이나 미녀와 야수 같은 판타지물도 좋지만 ‘바바리안’과 ‘더 라스트 킹덤’처럼 역사적 사실을 다룬 드라마 속 맥주는 언제나 상상력을 자극한다. 두 드라마는 국가적 배경이 다르고 약 900여 년 정도의 시차가 있지만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갈등하는 영웅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바리안은 서기 9년 게르만족이 로마를 상대로 최초로 승리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다.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는 바바리안(야만족)이 살고 있는 북쪽의 땅,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려고 한다. 총독인 바루스는 이 전쟁에 자신의 양아들인 아르미니우스를 선봉에 내세운다. 그는 게르만족이지만 로마에서 자라 기사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와 게르만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만 결국 자신의 피를 선택하고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로마군을 괴멸시킨다. 실제 로마는 이 전투 이후 북쪽 진출을 포기했다.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이름은 헤르만. 헤르만은 로마를 이기고 게르만의 독립과 자존을 지킨 첫 번째 영웅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세기 독일 민족 의식 형성에 바탕이 됐다. 헤르만은 독일 역사를 상징하는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독일 제국을 이룩한 빌헬름 1세는 거대한 헤르만의 동상을 토이토부르크 숲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건립했다. 뮌헨 레지던츠 앞 광장에도 날개 달린 모자를 쓴 헤르만이 게르마니아 여신을 옆에두고 승리의 깃발을 치켜든 조각을 볼 수 있다.
전설과 사실 경계에 있는 이 드라마에서 게르만 족들은 로마인들과 달리 맥주를 마신다. 그들이 마시는 맥주가 무슨 맥주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손잡이 없는 커다란 나무 잔에 담겨있는 이 액체는 동맹을 맺거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그리고 축배를 들 때 등 수시로 등장한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맥주를 냄새나는 보리죽이라고 비하했다. 그리고 토이토부르크 사람들을 보리로 만든 이상한 액체를 마신다며 향기로운 포도주를 마시는 자신들과 비교하고 멸시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맥주를 타고 오는 걸까. 로마는 서기 476년 보리죽을 마시는 이들에게 멸망당한다. 게르만족들과 그들의 천한 맥주가 유럽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게르만 족이 로마군에게 최초의 승리를 거둔 지 약 900여 년이 흐른 잉글랜드. 이 곳은 섹슨족과 데인족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이킹 족인 데인인들은 793년 린디스판 수도원을 약탈한 이후 끊임없이 잉글랜드를 침략했다. 870년 웨섹스 왕국의 알프레드 왕은 이들의 침입에 맞서 머시아, 노섬브리아 등의 섹슨족 왕국을 규합하고 이에 대항하려 하지만 수많은 위기를 겪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라스트 킹덤’은 알프레드 왕과 섹슨족이지만 데인족에서 자란 우트레드를 중심으로 초기 잉글랜드의 격변기를 흥미롭게 다룬 드라마다.
“내일부터 더 이상의 에일은 없다”(No more ale tomorrow)
지금의 에일은 상온에서 만들어지는 맥주를 통칭하는 단어지만 사실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홉이 들어가지 않은 보리 맥아 발효주를 의미했다. 18세기까지 영국에서는 홉이 들어가지 않으면 에일(ale), 홉이 들어가면 맥주(beer)로 구분해서 불렀다. ‘더 라스트 킹덤’은 이런 중세 영국 속 맥주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곳 사람들은 맥주를 비어(beer)라고 하지 않고 에일(Ale)이라고 부르며 저잣거리뿐만 아니라 만찬을 열거나 야영을 할 때, 식사를 할 때 마시곤 한다.
당시 사람들이 마시던 에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색은 어두운 갈색이고 탄산은 없었을 것이다. 거품도 풍부하지 않고 효모와 같은 찌꺼기도 보였을 것이다. 쓴 맛을 내는 홉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단맛이 더 났을 것이고 밍밍한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발효 기술도 발달하지 않았기에 신맛과 쿰쿰한 향도 가지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물보다 더 안전했고 향기로웠을 것이다. 게다가 알코올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우리가 김치나 된장을 맨밥에 먹듯이 이들도 빵을 먹을 때 맛없는 물 대신 에일을 마셨을 게 분명하다. 에일은 굳이 술로 구분되지 않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1800년대 중반까지 영국에서는 온 가족이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았다. 맥주는 오랫동안 술이 아닌 음료에 가까웠다.
수 천년 동안 맥주와 함께 한 서양과 달리 아시아에는 맥주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아시아 영화에서 맥주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 ‘방랑의 미식가’는 아시아의 맥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점심 오후 식당 한 구석, 이제 막 은퇴한 가스미 타케시 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벽에 붙어있는 맥주 광고를 본 그는 맥주를 주문을 할지 말 지 고민하고 있던 것이다. 대낮에 맥주를 마시는 건 38년 간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금기와 같은 일이었다. 은퇴 후 남아있던 직장인의 잔상이 그를 망설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잠시 뒤 그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자신감 있게 외친다.
“주인장, 여기 맥주!!”
고독한 길을 가는 무사의 환영을 본 후, “주위에서 뭐라고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고, 휩쓸리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신 앞에 놓인 갈색병 맥주를 잔에 따르며 그는 말한다.
“평일 낮에 혼자서 맥주, 이게 해보고 싶었다”
황금색, 터질 듯한 탄산 그리고 하얀 거품. 가스미 부장은 시원한 맥주를 단숨에 비우며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한다. 방랑의 미식가의 첫 화 제목은 “한낮의 맥주”다. 평생 성실하고 소심하게 살던, 막 정년 퇴임한 이 남자에게 새로운 도전정신을 심어준 건 바로 맥주였다. 그가 맥주 한잔에 자유를 부르짖는 순간, 우리 또한 그의 모습에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아시아 문화에서 낮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불경한 일이다. 열심히 일해야 할 근무시간에 맥주라니. 자고로 술은 낮이 아닌 밤에 마시는 게 아니던가. ‘혼맥’도 불손한 모습이다.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고 어떻게 맥주를 혼자 마실 수 있는가. 술은 업무를 마친 후, 다 함께 모여서 부어라 마셔라 해야 자연스러운 것이다. 흐린 동태눈을 하고 알코올이 만든 흥분 속에서 하나를 외치며 마셔야 그게 술이다. 제길.
가스미 부장이 대낮에 맥주를 마시며 자유를 느끼는 모습에 우리가 공감을 느끼는 건, 그의 낮맥이 우리 문화가 가지고 있는 금기를 소심하게나마 깼기 때문이다. 낮이든 밤이든 맥주를 마시는 건 자신의 자유의지가 결정할 문제다. 금기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더 중요한 건 술을 올바로 즐기는 개개인이 만들어 내는 문화다.
물론 맥주를 시도 때도 없이 허용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강요되는 술 문화, 몰개성적으로 알코올만 탐닉하는 술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집단적 취향이 아닌, 개인의 취향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술 문화는 우리 공동체를 이롭게 할 수 있다. 만약 여전히 ‘낮맥’과 ‘혼맥’이 특별하게 보인다면 당신은 20세기 산업사회의 술 문화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식당을 나오며 당당한 표정으로 해냈다를 외치는 가스미 부장에게 소소한 응원을 보낸다. 맥주 한 잔도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못했던 그 가련한 인생에 연민의 마음도 함께 보낸다. 내가 작가라면 2화부터는 가스미 부장이 낮맥 동아리를 만든 후, 열심히 활동하며 다양한 맥주 문화를 만들어 가는 에피소드이겠건만. ‘방랑의 맥주 덕후’라는 시리즈를 기대하는 건 아직 비현실적인 바램이려나?
영화는 개인과 사회의 경험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석된다. 타자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이런 개별성은 영화를 문화로 만든다. 그 속에는 자유와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처럼 맥주 또한 자신만의 스토리로 간직된다. 맥주와 영화가 문화로 만나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맥주를 문화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어차피 맥주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우리 곁에 남아있을 절대 반지다. 적절한 규제 속에서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문화로 만들어야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는다. 영화가 우리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 듯이, 맥주도 그래야 한다. 맥주를 파괴하기 위한 원정대는 필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