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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Oct 29. 2022

네덜란드의 초록 피, 하이네켄

마케팅 천재, 하이네켄


No, thanks. I’m still driving


검은색 정장에 헌팅캡을 쓴 노신사가 맥주를 들고 있는 웨이터를 잠시 응시한다. 흰색 재규어가 보이자 그는 ‘괜찮습니다. 난 여전히 운전을 하거든요’라는 말을 남긴 채 문 밖으로 나선다. 아름다운 엔진음과 사라지는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노신사의 이름은 재키 스튜어드, 세 차례 포뮬러원(F1) 그랑프리에 오른 그가 사양한 맥주는 하이네켄이었다. 


하이네켄 광고 속 주인공은 맥주가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나 사회적 편견 또는 음주 운전과 같은 메시지가 주제인 경우가 많다. 하이네켄 맥주는 이 주제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전략은 이 맥주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프리미엄 맥주 중 하나로 만들었다.


경상도보다 조금 더 큰 면적에 겨우 천만 명 남짓의 인구를 가진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이런 세계적인 맥주가 가능했던 것일까? 이 수수께끼의 열쇠를 찾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와 하이네켄의 역사를 들춰봐야 한다. 

하이네켄 @윤한샘


네덜란드의 힘, 관용


네덜란드는 15세기까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의 영토였다. 홀란드라고 불렸던 이 지역에는 무역 연합인 한자 동맹 도시들이 많이 존재했다. 다른 국가와의 상업 활동은 이곳에 다양한 문화를 흐르게 했고 세금이 필요한 제후들은 상인들에게 자유를 보장했다. 


네덜란드는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의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영리 추구를 신의 소명으로 해석한 칼뱅교는 상인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개신교를 인정한 카를 5세는 종교 문제가 신성로마제국을 분열시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달랐다. 벨기에 출신인 아버지와 달리 스페인 태생인 그는 가톨릭을 앞세워 개신교를 믿는 제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는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다.


무자비한 펠리페 2세와 스페인 군대는 마녀 사냥을 자행했고 이에 저항하는 자들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무거운 세금마저 부과되자 1567년 네덜란드 제후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쟁을 선포한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시작이었다.  


기나긴 독립 전쟁은 1648년 30년 전쟁의 마침표인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끝난다. 이 조약에서 독립을 인정받은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과 예술의 중심 국가로 성장한다. 이런 배경에는 신성로마제국 펠리페 2세와 프랑스 왕 루이 14세에게 종교적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과 위그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관용의 정신이 숨어있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상업과 수공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과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자 곧 발전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특히 양모 산업, 조선업 그리고 해운업이  빠르게 성장했고 해양 무역이 중심이었던 네덜란드는 이를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한다. 다른 문화에 대한 수용과 관용이 네덜란드를 17세기 최강국으로 만든 것이다.  



네덜란드 라거의 탄생


네덜란드 맥주 역사는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112년에는 이미 맥주에 세금을 부과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특히 당시 새로운 재료였던 홉을 1320년부터 과감히 사용했고 1450년에는 일상적인 재료로 취급했다는 자료도 있다.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델프트 같은 도시에는 양조장들이 즐비했으며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층까지 맥주를 흔하게 즐기곤 했다. 네덜란드의 역사와 맥주에 대한 흔적들로 미뤄볼 때, 이 저지대 국가에는 오래전부터 진보적인 양조 기술과 자유로운 맥주 문화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은 세계 최강국이 된다. 한 때 영국보다 앞서있던 네덜란드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패권을 내주며 기울었다. 맥주 산업에서도 영국은 약 200여 년 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전 세계를 장악했다. 네덜란드 맥주도 힘을 잃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등장한 한 젊은이가 네덜란드를 다시 유럽 맥주 산업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그의 이름은 제랄드 아드리안 하이네켄이었다. 

제랄드 아드리안 하이네켄

1864년 제랄드 아드리안 하이네켄은 암스테르담의 오래된 맥주 회사를 인수한다. 겨우 22살에 불과한 그의 뒤에는 무역상이었던 아버지의 지원이 있었다. 당시 독일을 비롯한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에서는 라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분명 젊은 제랄드 아드리안 하이네켄의 눈에도 필스너 우르켈, 칼스버그, 슈파텐 같은 라거 선구자들의 움직임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였을 것이다. 


1873년 드디어 ‘하이네켄스(Heineken’s)’라는 이름으로 첫 라거 맥주가 출시된다. 특히 1886년은 하이네켄 맥주에 가장 중요한 해였다. 파스퇴르 제자이자 하이네켄 연구소장 하트톡 엘리온이 하이네켄의 핵심 효모인 에이 이스트(A-yeast) 순수 분리에 성공한 것이다. 이 과정에는 1883년 라거 효모의 순수 분리 배양을 최초로 성공한 칼스버그 연구소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칼스버그에 따르면 당시 하이네켄이 자사의 라거 효모를 가져갔으며 이에 대해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에이 이스트는 여전히 하이네켄 맥주의 주인공이다. 이 작은 녀석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깔끔하고 단순하다. 라거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맥주 중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낮은 쓴맛과 날카로운 탄산은 갈증 해소에 탁월하며 언제 마셔도 부담이 없다. 하지만 효모와 향미로만 하이네켄의 성공을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향미와 품질 면에서 하이네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라거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네켄 DNA는 무엇이 달랐을까?



마케팅 천재, 하이네켄


하이네켄은 1875년 국제 해양 전시회와 1889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대상을 획득하며 품질을 인정받는다. 지금도 라벨에 이 두 메달의 이미지를 넣은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하이네켄은 다른 맥주들에 비해 도드라지는 브랜드는 아니었다. 본격적인 하이네켄의 성장은 제랄드 아드리안 하이네켄의 뒤를 이은 아들 헨리 피에르 하이네켄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가 구축한 탄탄한 품질을 바탕으로 과감한 도전을 시도했다. 


개혁의 출발은 디자인이었다. 갈색 병 일색이었던 맥주 시장에 최초로 초록색 병을 도입하고 라벨 속에 있는 별에도 빨간색을 입혔다. 1930년대에는 보기 드문 디자인 마케팅을 전개한 것이다. 초록색 병과 빨간색 별을 입은 하이네켄은 시각적으로 다른 맥주와 확연히 구별됐고 고객들은 점차 하이네켄을 프리미엄 맥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뉴욕항의 하이네켄

시장에 대한 헨리 하이네켄의 탁월한 안목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금주령 이후 미국 시장에 주목했다. 1919년부터 있었던 미국의 금주령이 풀리면 프리미엄 유럽 맥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 예상했다. 1933년 12월 5일 마침내 금주령이 사라졌고 그의 예측대로 맥주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바로 다음 날 뉴욕 선착장에 맥주가 도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것이다. 부두에서는 즉석 맥주 파티가 열렸고 그 주인공은 초록색 하이네켄이었다. 이후 하이네켄은 유럽산 프리미엄 맥주로 시장에 안착했고 지금도 가장 많이 팔리는 수입 맥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다음 경영권을 맡은 알프레드 하이네켄은 하이네켄 맥주의 정체성을 완성한 인물이다. 먼저  이름을 ‘하이네켄스’에서 ‘하이네켄’으로 바꿔 발음과 표기를 단순화했다. 평범한 폰트에 위트를 더 하기도 했다. 이름에 있는 ‘e’의 기울기를 살짝 틀어 마치 웃고 있는 듯 보이게 한 것이다. 단순함과 친숙함, 그는 마케팅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은 시절에 벌써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다.

smiling e

핵심 가치의 방향도 수정했다. 알프레드 하이네켄은 ‘우리는 맥주를 팔지 않습니다. 즐거움을 팝니다.’라는 한마디로 하이네켄 핵심 가치를 설명했다. 품질과 디자인에만 쏠리던 시선을 ‘즐거움’이라는 가치로 바꾼 것이다. 하이네켄은 광고를 통해 이 핵심가치를 재미있고 신박한 방법으로 전달하며 소비자들과 가까워졌다.  


다른 맥주에서는 보기 드문 사회적 이슈도 광고 속에 녹여냈다. 차별과 선입견, 음주 운전 문제, 코로나 백신 접종과 팬데믹 속 인간관계 같은 주제를 광고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유와 관용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경험은 하이네켄을 마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150년 넘도록 이 맥주가 프리미엄 라거 포지셔닝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다. 



도전 + 관용 =  하이네켄


하이네켄 DNA에는 네덜란드 상인의 피가 흐른다.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시장을 찾아 떠났던 선조들처럼 하이네켄도 과감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하이네켄의 성공 비밀을 풀 수 없다. 관용이라는 또 다른 열쇠를 발견해야 한다. 맥주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하는 모습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철학과 문화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하이네켄은 비록 상품에 불과한 맥주지만 우리 사회의 매개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이를 지지하는 소비자를 팬으로 만들었다.  


도전과 관용으로 소비자를 팬으로 만드는 힘, 보이는가? 다른 브랜드가 따라 하지 못하는 하이네켄의 성공 공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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