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진정성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왜요? 일등칸 여자는 맥주도 못 마시는 줄 알았어요?” <영화 타이타닉 중>
담배 연기가 가득한 3등 칸, 한껏 상기된 표정의 로즈는 붉은색 맥주를 건네받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와인 색 드레스에 짙은 화장, 그녀의 외모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 곁에 잭이 없었다면 분명 이방인 취급을 당했을 터였다. 아이리시 댄스를 춘 뒤 거침없이 맥주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은 갈증이 아니라 가식을 털어버리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잭이 들고 있던 맥주가 취객에 밀려 드레스로 쏟아지자 그는 당황했지만 그녀는 활짝 웃었다. 와인 색 드레스가 맥주 색 앰버로 바꾸는 맥주 세례가 마침내 로즈를 계급과 가식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맥주가 건넨 새로운 자아는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삶으로 이끌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맥주는 거짓 페르소나를 벗게 해주는 정화수와 같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은 정확한 고증으로 영화 속 맥주를 표현했다. 3등 칸 사람들이 들고 있던 병에 보이는 빨간색 삼각형은 잭과 로즈가 마신 맥주가 바스(Bass)임을 알려준다. 1912년 당대 최고의 유람선 타이타닉과 함께 수장된 바스 에일은 무려 500 상자, 총 12,000병에 달했다.
19세기 중반 영국 맥주 산업은 변곡점을 지나고 있었다. 150년 이상 시장을 지배하던 런던의 다크 에일, 포터를 위협하는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1837년 작은 도시 버튼 온 트렌트 출신 맥주 바스 페일 에일(Pale ale)이 철도를 타고 런던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앰버 색과 섬세한 홉 향 그리고 깔끔한 마우스 필 앞에 포터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페일(pale)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창백함이지만 맥주에서는 앰버, 즉 밝은 갈색을 의미한다. 맥주가 색을 갖게 된 것은 1635년 영국인 니콜라스 할스의 코크(coke) 맥아 가마 발명 덕이었다. 석탄에서 유해 물질을 제거한 코크는 나무와 달리 열을 조절할 수 있어 맥아의 굽기 정도를 컨트롤할 수 있었다. 인류가 맥주를 만들어 온 이래, 처음으로 색을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페일 에일은 1640년대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럼에도 17, 18세기를 영국을 주름잡던 맥주는 포터였다. 포터에 비해 향과 맛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페일 에일은 세계 최대 시장 런던에서 경쟁력이 부족했다. 의외로 밝은 색 에일이 주목받던 지역은 바다 건너 인도였다.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 인도로 수출하던 맥주들 중 옥토버 에일은 밝은 색과 뚜렷한 홉 향, 높은 쓴맛과 알코올로 인기가 높았다. 후에 인디아 페일 에일(IPA)로 명명된 이 스타일을 선도한 양조장은 호지슨의 보우 브루어리였다. 당시 IPA는 최소 6개월 이상의 숙성이 필요한 맥주였다. 19세기 초 인도를 지배한 보우가 런던에서는 큰 존재감이 없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
런던에서 북서쪽, 차로 세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버튼 온 트렌트는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버튼 에일이라는 전통 맥주를 양조했다. 마호가니 색을 띠는 버튼 에일은 맥아에서 오는 묵직한 단맛 그리고 높은 알코올을 지닌 맥주였다. 버튼 양조장들의 주 거래처는 러시아였다. 날씨가 추운 러시아는 묵직한 버튼 에일을 좋아했다.
위기는 나폴레옹에서 비롯됐다. 대륙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수차례 영국을 노렸으나 해전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마지막 조치는 대륙봉쇄령이었다. 유럽 대륙을 봉쇄해 경제적으로 영국을 고립시켜 말려 죽이려 했던 것이었다.
대륙봉쇄령은 러시아 수출로 먹고 살던 버튼 양조장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단기간 안에 새로운 매출처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근근이 생존을 이어가던 그들에게 뜻하지 않던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인도였다.
19세기 초 인도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보우 브루어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오랫동안 파트너였던 해운 회사와 계약을 깨고 자체적으로 운송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인도 현지의 도매가격을 최저로 설정해 독점적 지위를 악용하려 했다. 동인도 회사는 이런 보우의 움직임을 두고만 보지 않았다. 동인도 회사 이사였던 캠벨은 독과점이 몰고 올 폐해를 걱정하며 새로운 경쟁사를 물색했다. 이때 그의 레이더망에 걸린 곳이 버튼 온 트렌트의 양조장이었다.
1822년 캠벨은 판로를 찾지 못하던 버튼 양조장에게 보우 IPA 샘플을 건네며 비슷한 맥주를 생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돌파구를 찾던 버튼의 올솝과 바스는 색이 밝고 홉이 많이 들어간 맥주를 테스트했고 자신들의 맥주가 충분한 경쟁력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인도 회사의 암묵적 도움 하에 인도로 진출한 이들 맥주는 놀랍게도 불과 10년 만에 보우를 시장에서 지워버렸다.
곧 인도의 열풍은 영국 본토까지 번졌다. 사실 런던에도 인도식 에일로 불리는 맥주들이 이미 팔리고 있었지만 트렌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버튼 온 트렌트 IPA는 런던 출신 인도식 에일과 확연한 차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앰버 색과 허브 같은 섬세한 영국 홉 캐릭터는 런던 페일 에일과 포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1839년 런던과 버튼 온 트렌트를 연결한 기찻길은 이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마차로 보름에서 한 달 정도 걸리던 유통기한을 7일 이내로 단축시켜 런던 사람들은 신선한 컨디션의 버튼 IPA를 맛볼 수 있었다. 버튼 온 트렌트 양조장들은 시장의 수요에 맞춰 IPA보다 쓴맛과 알코올을 낮춘 버튼 페일 에일도 양산했다. 버튼 페일 에일은 런던 페일 에일을 몰아내고 짧은 기간 대세로 자리 잡았다. 나폴레옹도 못 뚫던 런던이 버튼 페일 에일에 의해 침공된 것이다.
주 소비자는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자본가와 귀족층이었다. 이들은 노동 계급이 즐겨 마셨던 포터보다 페일 에일을 선호했다. 런던 양조장들은 버튼 페일 에일을 따라잡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19세기말에야 밝혀졌다. 바로 물이었다.
버튼 온 트렌트와 런던의 물은 모두 칼슘과 마그네슘이 많은 경수였지만 그 조성이 조금 달랐다. 버튼의 물은 칼슘, 마그네슘도 있었지만 이 이온들과 결합할 수 있는 중탄산염과 황산염도 다량으로 들어있었다. 칼슘과 마그네슘은 중탄산염과 결합해 물의 pH를 떨어트렸다. pH 하락은 앰버 색 맥아만 사용해도 당화와 발효가 용이한 환경을 만들었다. 게다가 황산염은 홉의 성질을 깔끔하게 맥주에 스며들게 했다. 버튼 온 트렌트의 수질은 밝은 색 맥주에 적합했고 홉 향을 더 날카롭게 이끌어냈다.
반면 런던의 물은 중탄산염이 부족해 밝은 맥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부족한 황산염은 홉 향을 충분히 뽑아내지 못했다. 런던의 물은 까만색 포터에는 적합했지만 앰버 색 페일 에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화학자들이 이 비밀을 밝혀내자 런던 양조장들은 버튼 온 트렌트에 새로운 양조장을 설립했다. 나중에는 물의 성질을 버튼처럼 바꿔 양조에 사용했는데, 이를 버트니제이션(Burtonization)이라고 한다. 맥주가 물의 화학적 조성과 성질을 밝혀내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런던의 거대 양조장들과의 경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버튼 양조장은 1777년 윌리엄 바스가 설립한 바스였다. 바스는 1830년대 인도에서는 보우와 올솝을 제쳤고 1840년을 지나며 런던을 장악했다. 1877년에는 무려 100만 배럴을 생산하는 회사로 성장했고 미국은 물론 일본까지 진출했다.
바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색 삼각형은 영국 특허청에 등록된 1호 디자인 상표였다. 1876년 1월 1일 빨간색 삼각형을 누구보다 빨리 등록하기 위해 전날 밤 특허청 사무실로 직원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바스는 디자인이 마케팅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미 19세기에 통찰하고 있었다. 이후 사람들은 맥주병 라벨에 있는 빨간색 삼각형만으로 바스라는 것을 인지했고 이 로고는 품질과 진정성의 상징이 되었다.
에두아르 마네가 유작 ‘폴리베르제르 바’의 바텐더 앞에 있는 맥주와 1871년 강화도 관리 김진성 씨를 찍은 사진 속에 있는 맥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건, 빨간색 삼각형 덕분이다. 심지어 피카소 작품 속에 있는 이상한 모양의 맥주가 바스인 것도 이 삼각형이 있기에 알 수 있다.
20세기 라거 맥주의 확산으로 포터와 IPA, 페일 에일이 쇠락했지만 바스는 굳건히 자리를 유지했다. 크고 작은 양조장을 인수합병하며 덩치를 키웠고 철도를 소유하며 유통 경쟁력도 높였다. 바스가 타이타닉에 실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2차 세계대전은 영국 에일의 품질을 떨어트리고 향미를 밍밍하게 했지만 바스는 펍 체인을 구축하며 생산과 유통의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1952년에는 캐나다 라거 칼링과 합작회사를 설립하며 라거 시장으로 진출했고 1988년에는 호텔 사업까지 손을 댔다. 바스는 영국을 대표하는 6개 양조회사 중 하나로 우뚝 섰다.
1989년 12월 마가렛 대처 수상은 6개 맥주 회사의 독점이 시장 경쟁력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하고 이를 해체하는 법령을 공표한다. 이 법에 따르면 대형 맥주 회사가 소유할 수 있는 펍은 2000개 이하여야 하며 반드시 게스트 맥주를 판매해야 했다. 불행히도 바스는 이 법에 직격탄을 맞았다. 7000개 이상이었던 펍은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시장 지배력은 희석됐다. 이 법으로 소규모 맥주 회사가 성장하고 유통 시장이 활발해지기도 했지만 기존 회사들은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했다. 마침내 바스는 맥주 사업에 염증을 느끼고 호텔 쪽에 집중하는 안타까운 결정을 내린다.
이런 기조 아래 2000년 바스는 양조 사업부문을 인터브루(현재 AB InBev)에 매각했다. 영국 정부는 맥주 다국적 기업인 인터브루의 독과점을 또다시 우려했다. 그리고 바스 소유의 브랜드 분리매각 및 버튼 온 트렌트 양조시설 처분을 명령했다. 인터브루는 바스 페일 에일에 대한 권리를 제외하고 바스 양조장 부지와 라거 브랜드 칼링을 몰슨 쿠어스에 넘겼다. 200여 년 동안 영국 페일 에일을 대표하고 버튼 온 트렌트 맥주의 전통을 이어온 바스가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영국 AB InBev 산하 샘리스버리에서 양조되던 4.4% 알코올의 바스 페일 에일은 2010년 중반 한국 마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붉은 기가 도는 투명한 앰버 색은 전형적인 영국 페일 에일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응당 탄산은 적고 영국 효모에서 나오는 건자두 같은 프루티 에스테르 향은 생각보다 진하다. 단맛과 쓴맛이 낮아 마시기 편하지만 깔끔하고 드라이한 질감은 밍밍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평양냉면 같은 담백함이 바스 페일 에일의 매력 중 하나다. 안타깝게도 2019년 5.1% 알코올을 가진 프리미엄 에일로 리포지셔닝 한 이후, 한국에서는 더 이상 찾기 힘든 맥주가 됐다.
1990년 후반, 타이타닉 조사 및 복원 작업 중 9병의 바스 맥주가 발견됐다. 기세등등했던 라거를 제치고 타이타닉 맥주로 선정되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20세기 바스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맥주 세계에서 타이타닉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로즈가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 속으로 버린 보석은 다름 아닌 바스 페일 에일이었을 테다. 지금은 사라진 바스 페일 에일의 진정성이 타이타닉 같은 처지여서 안타까울 뿐이다. 전통과 진정성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껍데기만 남은 바스가 보내는 유일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