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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Nov 27. 2018

어학원 창문 하나는 내가 만들었지.

그놈의 스펙이 뭐라고

22살, 3학년쯤 됐을 때였다. 몇 명의 동기는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으로 학교를 떠났고, 또 몇은 각자의 사정으로 휴학을 시작했다. 학교엔 후배들이 많아졌고, 전공과목 수업 팀플의 조장은 당연히 나였다. 휴학 후 유럽여행을 떠난 친구가 부러우면서도, 왜인지 아무 계획 없이 휴학하면 큰일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1년을 더 다녔다.


3학년 2학기까지 마치고 나니, 덜컥 4학년이 됐다. 그쯤 되니 점점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불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일단 뭐라도 해보자”



학생과 기업을 연계해주는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인턴’이라는 자격을 갖게 됐다. 그리고 그 자격이 휴학의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사실 우리 부모님은 ‘휴학’이라는 단어를 무섭게 느끼는 분들이셨다. 앞서 이야기한 3학년 때,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휴학을 하자 나도 휴학하고 뭐라도 다른 것을 해볼까 싶어 엄마에게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대학 4년을 착실히 이수하고 바로 임용고시에 합격한 언니 덕분에, 우리 부모님은 휴학은 ‘가정이나 건강상의 문제로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할 수 없을 때, 불가피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부모님께서 “그래서 휴학하고 뭐 할 건데?”라고 하면 딱히 그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외비 모아서 여행 가려고!”하고 당당하게 말이라도 해볼 걸 그랬다.


아무튼 23살의 여름, 드디어 ‘휴학’이라는 것을 쟁취했다. 그렇다고 늦잠을 늘어지게 자거나 한 일주일쯤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뒹굴거리거나 그랬던 건 아니다. 한참 여름방학을 누려야 했던 7월부터, 아침엔 학교가 아닌 회사라는 곳으로 향했고, 수업을 듣는 대신 문서 작성이나 회의 준비, 자막 검수 등의 잡다한 일을 맡아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세 달이 지났고, 첫 인턴생활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무언가 집어삼키듯 배우기 시작했다. 퇴근 후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남들이 갖고 있는 컴퓨터 자격증을 준비했다. 이력서라는 문서의 한칸한칸을 채우며 뭔지 모를 안도감 같은 걸 느꼈다. 그 이력서가 남들이 다 아는 회사에 지원할 만큼의 내용을 갖췄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자꾸 뭐라도 한 것 같다.


어쩌면 학교보다 더 학교처럼 다녔던 어학원


그래서 지금도 친구들한테 농담처럼 종로에 있는 어학원의 이름을 대며, 그 학원 창문 하나는 내가 만들어 줬을 거라고 얘기하곤 한다. 당시에 난, 유명한 강사의 수업을 앞자리에서 듣겠다며 매일 새벽같이 일어났고, 줄기차게 토익 시험을 봤다. 그리고 토익 성적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자 다른 강사의 수업을 끊고, 토익스피킹 시험을 봤다. 그렇게 두 시험의 점수를 만들어 놓고 복학했더니, 요새는 제2외국어 하나쯤은 해야 취직이 된다길래, 한 달치 알바비를 탈탈 털어서 공강 시간에 다닐 수 있는 HSK초급반에 등록하기도 했다.


언젠가 찍어뒀던, 언젠지도 모를 시험의 수험번호


고3 때 이후로 ‘경쟁’이라는 것에 몰두해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기간이었다. 토익 학원 쉬는 시간엔 학원 내 컴퓨터실에서 포토샵 자격증 준비를 했고, 중국어는 1도 몰랐던 문외한이 세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만에 HSK5급을 취득하기도 했다. 일단 이런 것들을 다 하면, 취업이라는 관문을 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관문을 넘고 난 후의 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일단 대학에 가야만 해’ 했던 고3 때처럼, ‘일단 취업을 해야만 해’ 였던 것 같다.


그렇게 복학했다. 졸업까진 3학점이 남아있었고, 4학년 2학기를 전공 수업 하나만 수강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보단 중국어 학원을 자주 갔고, 중간고사보단 HSK 모의고사가 조금 더 걱정되기도 했다.



사실 그때 무언가를 배운 것은 다 잘한 일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 기간이 있었음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의 열정이 그 순간에 집중되지 못하고, 무언가를 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떤 것을 배울 것인가. 얼마의 기간 동안 배울 것인가. 이 고민들에 대한 답이 그 순간의 ‘나’에 근거하였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같은 거다.

아무튼 근거야 어찌 됐건, 그때의 열정과 시간 같은 것들이 모여서 나는 결국 ‘취업’이라는 것을 해내긴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 지에 대해 깊게 고민할 시간과 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해볼 시간은 사치였고,  이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만들어 놓은 그럴싸한 스펙들을 활용해 얻어낸, 남들이 보기에 '그래 저게 하고 싶은가 보다', '그래 결국 취직을 했나 보네' 할 정도의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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