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독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의 비교적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저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국가 정도로 인식될 것이고 어느 정도 나이대가 있으신 분들은 ‘한강의 기적’의 기반을 다진 파독 광부, 간호사들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인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보통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긴 하지만 아무래도 독일인을 접할 기회가 매우 드물고 독일과 큰 접점이 없는 우리로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독일인, 정확히는 도이치 민족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사전에서는 도이치 민족을 독일어를 사용하는 서게르만계의 민족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몇몇 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살펴보자면,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라는 나라의 사회적, 정신적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 영국의 경우 영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되는데 한 국가의 국민을 정의할 때 언어라는 개념으로 묶이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어쩌다 도이치 민족을 정의할 때 독일어라는 언어의 개념으로 묶이게 되었을까?
도이치 민족이 사회, 문화적 배경이 아닌 언어권역으로 정의된 역사는 서로마의 멸망 즈음부터 시작된다.
서로마 멸망 이후, 로마라는 거대한 지배자 아래에서 평화를 유지하던 유럽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분열 이후 중세가 찾아왔을 때 대부분의 유럽은 게르만족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도나우강 남쪽 지역도 예외는 아니였다. 그 당시, 도나우강 남쪽 지역은 로마인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게르만인들은 소수 지배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에 로마인들은 소통을 위해 룬 문자 기반의 게르만어를 라틴어로 음차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독일어의 시초가 되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도이치 민족의 시초는 ‘라틴어로 음차한 게르만어를 말하는 로마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룬 문자에 기반한 복잡성 때문에 널리 쓰이지 못했던 게르만어는 라틴어로 음차된 형태로 퍼지게 되어도나우강 지역 뿐 아니라 라인강 지역의 게르만족 지배를 받는 로마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도나우강 지역부터 라인강 서쪽까지의 사람들은 ‘라틴어로 음차한 게르만어’라는 언어적 유사성으로 느슨하게 묶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묶인 언어적 유사성을 조금 더 강화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마르틴 루터의 성경 번역이다. 독일어가 널리 퍼진 뒤로 독일어는 표준화된 음운 체계와 문법 체계 없이 제멋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루터가 성경 번역을 시작할 무렵, 독일어는 20여개의 지역어(크게 고지 독일어와 저지 독일어, 즉 2차 음운추이를 거친 지역과 거치지 않은 지역)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성경을 번역하겠다는 루터의 철학에 맞게 성경 번역 과정에서 루터는 제멋대로 사용되던 20여개 독일어의 공통된 부분만을 모아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후, 루터의 성경이 퍼지게 되며 루터 성경을 기준으로 표준 독일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었다.
루터 성경의 보급을 기준으로 ‘표준 독일어로 소통할 수 있는가’가 도이치 민족(당시에는 민족이 아닌 종족 개념)의 기준이 되어 느슨하게 묶여있던 언어적 유사성의 끈을 조이며 다시 한 번 언어적 유사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들을 정의하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느슨했던 언어적 유사성이 조금 더 조여졌다고는 하나 이것만으로 ‘도이치 민족’을 정의하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30년 전쟁 등의 이유가 있긴 하였지만 전쟁 이후에도 도이치 민족, 아직은 단지 같은 독일어를 쓸 뿐인 민족들은 대부분 여전히 수십 개의 작은 제후국들로 분열되어있었다. 하나의 민족이라고 인식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문화적 동질감이 공유되어야 했는데프리드리히 대제의 등장 이후 힘을 키운 프로이센과 마리아 테레지아 등장 이후 힘을 키운 오스트리아의 첨예한 대립은 이러한 동질감이 형성되기 어려운 상황이였다.
19세기 무렵 이러한 동질감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발생하는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신성로마제국 대부분의 제후국들은 나폴레옹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특히 프로이센은 영토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굴욕을 겪는다.
이러한 국가적 굴욕 이후, 제후국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이 일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필두로 해방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해방전쟁을 겪는 동안 단지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던 도이치가 변화하였다. 해방전쟁 기간 동안 나폴레옹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동질감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도이치 민족은 독일어를 쓴다는 언어적 유사성을 넘어서서 독일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의 침략 자체는 도이치 민족에게 좋은 일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한 해방전쟁 과정에서 도이치 민족에게 독일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불어넣고 동질감을 형성시켰다는 점에서 나폴레옹이 도이치 민족 통합에 끼친 영향은 작지 않고 오히려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빈 회의를 거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도이치 민족의 통합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국력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진 상태였기에 어느 쪽이 통일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크게 두가지 의견이 존재하였는데 도이치 민족의 시초인 독일어를 쓰는 모든지역, 즉 오스트리아를 포함하여 통합하자는 대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통합하자는 소독일주의로 나뉘게 되었다.
대독일주의는 영토적인 문제와 더불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비해 아직은 우위에 있었기에 오스트리아가 중심이 되는 통일 방안이였고 소독일주의는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는 통일 방안이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스트리아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는데 오스트리아는 왕정 국가였기에 독일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내세운 도이치 민족 통합에 어울리지 않았고 오스트리아가 다민족 국가였기에 도이치 민족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통합을 하기에는 독일계 국민 자체도 그닥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국력 자체는 도이치 민족이 통합되었을 때 큰 힘이 될 것임에 분명했지만 이러한 이유들은 다른 도이치 민족들에게 오스트리아의 주도 하에 하는 통합이 성에 차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도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희생을 하면서까지 통일하고 싶지는 않은 애매한 상황을 낳게 되었다.
군사, 정치적 준비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첨예한 대립으로 정체된 상황이였으므로 프로이센은 경제적 수단인 관세 동맹을 통해 통합을 시도한다. 빈 회의를 통해 새로 편입된 지역과 무관세 동맹을 체결 후 이웃 국가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관세 동맹을 확장했고 이후 18개 제후국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독일어라는 언어적 유사성만을 가지고 있던 도이치 민족들에게 추상적인 개념인 독일 민족주의에 더하여 이들을 관세 동맹이라는 경제 공동체로 명시적으로도 확실하게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었다.
같은 도이치 민족 국가로 인식되던 오스트리아는 관세동맹이 맺어지던 시기부터 도이치 민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타기 시작했다. 이는 관세 동맹의 수장 격인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의 관세 동맹 가입을 반대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은 오스트리아가 농업 국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하나의 도이치라는 틀 안에서 합쳐지기에는 두 국가의 국력이 너무나도 비등하였다. 물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이를 잘 알았기에 프리드리히 대제와 마리아 테레지아 때부터 도이치 민족이라는 집단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다퉈왔었다. 두 국가가 서로를 축출할 기회를 노리던 중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제거에 성공한 것이다.
동맹 이후 산업 혁명, 철도 건설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통까지 연결하며 도이치 민족은 통일 준비에 한 발 더 다가갔고 이후 통합을 방해하는 외부 세력들과 통일 전쟁을 겪으며 프로이센 주도 하에 독일 제국이 설립된다. 독일 제국 성립 이전에도 이미 독일 민족주의라는 개념으로 통일에 대한 내부적 지지가 충분하였으나 독일 제국 성립으로 도이치 민족의 국가와 국민들이라는 인식마저 심어주었고 이로써 도이치 민족을 완전히 하나로 묶었다.
이대로 마무리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이후 도이치 민족이라는 개념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하나 더 발생한다. 2차 세계대전 무렵, 히틀러의 등장으로 독일 국민들에게 뒤틀린 민족주의 성향(정확히는 독일 순혈주의)를 지나치게 강요하며 언어적 개념에서의 도이치 민족이라는 개념을 혈통의 개념으로 변질시켜 남겨진 변질된 도이치 민족 개념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이어져 오고 있다.
히틀러라는 전쟁범죄자의 등장과 그가 바꾸어놓은 도이치 민족 개념은 언어적 공동체로나마 같은 도이치 민족으로 묶일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 스위스, 체코 슬로바키아 등 독일어권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도이치 민족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조금이나마 언어권역의 개념으로 남아있던 도이치 민족이 분리되고 다소 폐쇄적인(정확히 말하자면 순혈주의적으로) 단어로 변하게 되었다.
즉, 도이치 민족이란 태초에는 언어적 유사성으로 느슨하게 묶인 개념이였지만 나폴레옹 전쟁과 2차 세계대전 나치의 집권을 겪으며 민족주의 성향이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이치 민족에 대하여 알아보니 사전적 정의가 꽤나 정확하게 도이치 민족을 정의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도이치라는 개념이 언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언어로부터 사회, 문화적 정서가 공유되었기 떄문에 이들을 언어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언어적 개념만으로 도이치 민족을 정의하다가는 돌을 던질 유럽인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주의하도록 하자.
현대의 도이치 민족이란 언어적 유사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독일 민족주의라는 작은 틀로 다시 한 번 묶여져있다고 할 수 있다. 도이치 민족의 시초는 언어권역(linguistic-area)이였지만 나폴레옹 전쟁과 나치즘을 겪은 후, 현대에 와서는 다른 국가들보다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번 글을 통해 익숙하지 않았던 도이치 민족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다음 주제는 이번 주제의 연장선으로 독일 통합과 EU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이번 글에서 도이치 민족의 관점에서 설명을 하기 위해 독일 통일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는데 다음 글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