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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배 Jun 26. 2021

사라지고 싶었다

나의 행복은 26세 6월에 멈췄다. 큰 수술을 견디고 외모지상주의 취업시장에서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인생의 성공을 장담했지만, 한순간 삶이 악몽으로 변했다. 내 존재가 무의미해졌고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불사조라고 믿었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할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지 2주 만에 엄마도 사라졌다. 13년 무사고 베테랑 운전자가 늘 다니던 길에서 그런 사고를 당하니 어이가 없었다. 참담하고 원망스럽고 화가 났다.


성인이 돼서도 엄마와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하며 자잘한 의사결정까지 나누던 나는 마마걸의 전형이었다. 천년만년 엄마와 함께 하는 삶을 당연시 여겼다. 그런 내게서 엄마를 빼앗아간 현실이 비통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으로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그런 나를 걱정하는 아빠를 봐서라도 정신 차리고 씩씩하게 살아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생활을 정리했다.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며 셋째 이모가 있는 대구로 내려갔다. 이미 나는 열심히 살 의지가 없었다.


셋째 이모는 엄마 형제 중 엄마를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 함께 산 적도 있어서 내겐 친구 같은 이모다. 이모 가까이 가면 엄마 얘기를 많이 할 수 있고, 엄마를 잊으라는 말도 안 되는 조언을 듣지 않아도 됐기에 낯선 대구로 몸을 옮긴 것이다.


이모는 내가 독하게 공부하기 위해 그곳으로 온 것으로 알고 자식들과 똑같이 서포트해줬다. 이모한테 미안했지만 공무원이 되고 싶은 맘이 없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벌어놓은 돈으로 학원과 독서실을 끊고 공부하는 척을 했다. 생활비가 떨어져갈 때쯤부턴 영어학원에서 문법을 가르쳤다. 누가 봐도 적당히 열심히 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몸과 마음을 혹사하고 함부로 대하면 머지않아 엄마 곁으로 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함만 지닌 채. 삶이 너무 버거워 죽고 싶었다기보다 그냥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와 얘기를 하다가 이모의 한마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다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내게 이모는 “죽으면 엄마 볼 수 있을 것 같아?”라며 한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결말, 정말로 엄마와의 인연은 이미 끝났을 수도 있겠단 생각에 아찔해졌다.


그제서야 엄마가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인 나,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딸이 이렇게 망가진 채 존재하면 안된다 싶었다. 당장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날 순 없지만 최소한 부끄럽진 말자고 다짐했다. 그날 나는 모처럼 아빠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여쭸다. 절에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아빠는 엄마를 잃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주말이면 몇 시간 동안 운전을 해서 강원도 산속 절에 다니시곤 했다. 자식들이 같이 가주는 게 소원인 사람처럼, 무뚝뚝한 분이 나와 동생의 눈치를 보며 종종 권하셨지만 우린 대부분 거절했다. 내가 먼저 절에 간다는 말을 꺼내니 반가워하는 아빠의 미소가 전화기를 뚫고 보이는 것 같았다. 비록 종교를 가진 건 아니지만 절에 가는 동안 아빠와 대화도 많이 하고 아빠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했으면 싶어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그리는 미래가 없는 건 여전했으나 현재의 시간을 하찮게 쓰진 않기로 했다. 일상을 놓아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일부러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을 찾진 못해도 하루하루 생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버텨졌다. 욕심 많고 긍정적인 성격이 내려놓음과 냉소가 천성인 듯 바뀌었다. 애쓰지 않는 삶을 위해 애씀, 그것이 엄마라는 버팀목 없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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