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피곤하다. 이쯤 하면 짐 정리는 다 된 건가? 대충 옷가지는 정리해 뒀고, 세면도구도 이만하면 됐다. 필요한 거 있으면 나가서 사면되지. 이제 오후 일정 정리 해볼까?’
이게 얼마만의 여행인지. 그동안 출간과 강연에 에세이 연재까지 참 많이 바빴다. 일정을 겨우 조정해서 잡은, 정말 소중한 여행이다. 아이들도 남편도 잘 지내고 있겠다며 엄마의 여행을 반겼다. 엄마의 부재가 신나는 건지, 여행 후 받을 기념품이 탐나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셋이 잘 지내보겠다며 등을 떠밀었다. 살림은 이모님이 알아서 해주실 테니 걱정 없지만 그래도 챙길게 많다. 딸아이는 알아서 잘하겠지만 아직 초등학생인 둘째가 걱정이다. 누나 말 잘 듣고 있어야 할 텐데. 여행기간만큼은 모두 잊고 즐겨야지.
짐 정리 후 친구들이 나가자고 하는데 침대에 던져진 몸이 쉽게 일어나지 질 않는다. 마음은 파리의 거리를 거닐고 있으나 피곤한 몸은 바스락거리는 하얀 이불에 돌돌 감겨 일어날 줄을 모른다. 내일모레 쉰이라니. 그동안 운동을 좀 열심히 해 둘 걸. 체력이 부족해서인지 역시 14시간의 비행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편하게 누워서 왔건만 힘들긴 하다. 정말 이코노미였으면 못 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다음 여행에는 미리미리 체력 준비를 하겠다고 반성해 본다.
친구들의 성화에 겨우 몸을 일으켜 에펠탑이 보이는 카페를 찾아 나선다. 내 오랜 로망이자 버킷 리스트를 이루는 순간이다. 여행 다경험자 친구의 리드에 나머지 멤버들은 오리 새끼들처럼 졸졸 따른다. 드디어 멀리 보이는 높디높은 에펠탑.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은 에펠탑이 보기 싫어 그 바로 아래서 식사를 했다고 하던데 이것 한번 보기를 그렇게 염원했던 나로서는 참 배가 불렀다 싶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한 실컷 봐주마. 낮에도 보고, 밤에도 보고 100번도 넘게 봐주마! 쓸데없는 다짐을 내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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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왔으니 마카롱에 에스프레소를 한 잔은 빼놓을 수 없지. 날씨는 흐리지만 다들 마음만큼은 봄빛이고 핑크빛이다. 낭만의 도시 파리 아니던가.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아줌마들이지만 남편과 왔다면 남편과도 다시 사랑에 빠질 것 같다며 쓸데없는 말을 날리며 낄낄거린다. 이 날을 다들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찰칵찰칵
휴대폰 카메라가 바삐 돌아간다. 이럴 줄 알고 휴대폰 용량을 넉넉히 비워뒀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남겨야 하는데. 손과 마음이 바쁘다. 너무 급했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니 죄다 흔들렸다. 에잇.
포즈를 취해본다. 작디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엄지와 검지로 살포시 든다. 입꼬리와 함께 새끼손가락이 절로 올라갔다. “이쪽으로? 조금 더 옆으로?” 촌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 배경은 꼭 에펠탑이 나오도록! 나는 지금 파리지엔느다. 대화 내용은 현실이지만 그 마저도 즐겁다. 파리라는데… 그것도 친구들과. 지루할 틈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히죽히죽 웃음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에이.. 대표님, 다 아시면서 왜 그러실까. 흐흐. “
한창 사는 이야기와, 파리의 사랑스러움과 더러움에 관해 논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과거에 동기였던 라라앤글 출판사 대표님의 전화다. 함께 글을 쓰다 출판사까지 열어버리셨다. 대단하신 분. 동기들의 에세이가 차례로 출간되고 내 에세이와 교육서 두 권도 함께 하게 되었다. 어차피 다음 책 출간도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아직 계약서를 쓰지 않은 탓인가. 분명 휴가 다녀와서 얘기하자고 말해 두었는데 자꾸 다음책을 재촉한다. 대화가 한창 이어지고 있던 중 흐름이 끊겼다. 아직 어떤 책을 쓸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다음 책이라니. 일단 이 통화를 빨리 끊으려면 대표님을 안심시켜야 한다. 하… 다음에 또 뭘 쓰나 벌써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조심스레 무슨 통화냐고 묻는다. 출판사와의 다음 계약건이라고 답해주니 나 때문에 일정도 어렵게 잡았는데 여기서도 업무 통화냐고 한다. 동시에 부러움의 눈빛이다. 커피값은 내가 내야겠다.
문득 생각해 보니 5년 동안 나도, 가족들도 참 많이 변했다. 매일 내가 애들인지, 나인지 혼란스러운 생활 속에 림프종 판정까지. 뭐라도 해 보고 싶어 시작한 게 이은경선생님의 브런치프로젝트수업이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 무조건 쓰기라도 했어야 했다. 덕분에 브런치 작가도 되었다. 경험과 일상을 남겼을 뿐인데 그것들이 이렇게 터질 줄이야. 의지박약이었던 내가 혼자서는 못했을 일들이었을 테지만 동기들이 있어 가능했다.. 단톡방이 수시로 울려댔다. 살림만으로도 바쁠 엄마들인데 어떻게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지 신기할 만큼 다들 계속 글을 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심지어 매일 같이 글을 쓰는 동기님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도 안 쓸 수가 없었다. 덕분에 동기님 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에세이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그즈음 아이와 함께했던 엄마표영어교재도 베스트셀러에 나란히 올랐다. 책 두 권이 베스트셀러라니. 이후 강연에, 이어지는 인터뷰에 쉴 새 없이 바빠졌다. 책을 출간하자는 제안도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엄마표 영어책에 큰 도움을 준 큰 아이는 이제 엄마표 영어에서 자기주도 학습으로 이어져 내가 옆에 있지 않아도 잘해주고 있다. 모두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 같아 더없이 행복할 뿐이다. 일이 바쁘지만 내가 항상 활기차지니 다른 가족들도 활기차졌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남편이 더 신나 한다. 이제는 회사일도 힘들지 않다고 한다. 허허… 글쓰기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바뀐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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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사장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잠시 회상에 잠겨 있던 찰나 단톡방이 울린다. 여전히 소소한 재미를 주고 있는 브런치 2기 단톡방이다. 이제는 더 이상 전국구가 아니다. 동기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어 이제는 24시간 톡방이 울린다. 소소하게 재미있는 일상은 물론 이제는 화려해진 근황까지. 유럽, 하와이,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만의 기량을 한껏 발휘하고 있다. 이번 여행동안 고소하고 달콤한 빵 사진을 잔뜩 찍어야지.. 세계적인 상을 수상하고, 대표님도 되고, 유명 작가가 되어 모임보다 TV속 화면에서 더 자주 보게 된 그들이지만 빵사랑은 여전하지 않을까. 빵 사진이야말로 동기들에게 할 수 있는 진정한 자랑이 될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면 또 바쁜 일상이 시작되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 바쁜 생활이 싫지만은 않다. 엄마와 아내로 살았던 삶에서 드디어 내 이름을 되찾았다. 더 이상 뒤늦은 사춘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내가 원했던 삶이니. 비록 글쓰기는 쉽지 않은 길이었고, 힘들고 험난한 길이었다. 하지만 글을 통해 나를 다시 찾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었다. 글 몇 페이지의 힘이 위대하다는 걸 점점 더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분명 다시 일상이 시작되면 쓰기 힘들다고 화도 나고 괴롭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괴로움 끝에 행복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멈출 수는 없다. 더 잘 쓰기 위해서 이번 여행에서 가득 행복을 충전해 가야겠다. 그리고 또다시 열심히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