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를 대치동에 있는 영어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레벨테스트도 완료하고 커리큘럼도 만족스럽다.. 역시 대치동 답게 전국 각지에서 많은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왔다. 적응하기 어려울까 걱정하는 아이에게 물어보니 흔쾌히 잘 다닐 수 있다고 했다.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 집은 경기 남부. 대치동까지 어떻게 보낸담. 인기 있는 곳이라더니 역시 우리 동네에서도 아이들이 꽤 다니나 보다. 셔틀버스 노선을 확인하니 집 앞은 아니지만 근처까지 온단다. 매일 셔틀정거장까지 라이딩을 해야겠다. 힘들겠지만 1년인데.. 그리고 아이를 위한 건데 엄마로서 이쯤 노력은 해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다니던 일반 유치원에 이제 그만 다닌다고 연락도 해야 하고, 다니던 태권도도 시간이 맞지 않아 잠시 쉬어야겠다고 전화를 해야겠다. 둘째도 있는데 어떡하지. 아.. 정말 둘을 키우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구나. 누나를 위해 둘째의 희생도 조금 필요할 것 같다. 학교 가기까지 1년인데.. 우리 모두 노력해 보자.
라며 극성 부모가 된 듯 걱정을 한참 하는 도중 잠이 깼다.
아 맞다. 우리 딸은 초등학생이지. 그것도 5학년.
지금 아이는 6개월째 영어 학원을 쉬고 있다.. 얼마 전 남편과 이대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대화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나 보다. 분명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애들은 흙 퍼먹고 놀면서 큰 거야.’라고 했던 남편인데 막상 본인도 학부모가 되고 보니 마음이 좀 달라지나 보다.
아이의 영어실력 걱정이 내 무의식을 얼마나 지배했던 건지 얼마 전에는 아이가 영어학원 레벨테스트에서 48점을 맞고, 그 학원에서 가장 낮은 레벨에 들어가는 아주 지극히 현실적인 꿈도 꾸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그건 엄마의 꿈일 뿐이라며 걱정할 것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말 그대로 말일뿐. 그렇게 큰소리를 쳤던 아이는 더 이상의 노력도, 실천도, 심지어 영어책 한 장 펼쳐보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이럴 때는 또 내 속이 타들어간다.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우리 딸은 역시 이번에도 무슨 배짱인지. 48점의 그 꿈은 설마 예지몽이었을까.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경제적 이유도 컸지만, 졸업 후에도 꾸준히 엄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봤던 터라 영어유치원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가 영어공부에 크게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 영어 유치원을 다니지 않아서라는 아쉬움이 나도 모르게 있었던 걸까. 갑자기 12살인 아이가 유치원생이 되는 허무맹랑한 꿈까지 꾸다니 참 신기하고 웃기기도 하다.
주말마다 즐기는 친구들과의 아이스티 한잔과, 노래방 노래 한곡 덕분에 요즘 너무 신나는 날들이다. 하지만 아이가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엄마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다른 친구들은 저만치 앞에 뛰어가고 있는데 내 아이만 제자리에서 주저앉아 있는 것 같다. 주저앉아있기만 하면 다행인데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아 더 조급해졌다. 지금 저리 행복하게 두는 게 과연 아이의 미래를 위해 옳은 일일까.
아이와 나의 행복지수가 정비례였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겠지만, 공부를 달가워하지 않는 아이에겐 그럴 일이 없겠지. 아이가 힘든 표정으로 공부하고 철근보다 무거운 책장을 넘기고 있을 때 내 마음이 편해지고, 아이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있을수록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 아이러니. 엄마와 자녀의 행복지수는 반비례여야만 했을까.
과연 부모가 아닌 학부모와 아이가 함께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이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 그 행복한 시간을 알고는 있지만, 난 영어 학원을 알아봐야겠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혹은 나의 심신안정을 위해.
인생에서 뭐 하나 쉬운 일이 있겠냐마는 역시 부모의 길은 어렵다. 그리고 학부모의 길은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