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의 가을은 사진보다 더 느리게 물든다.
시에나 근교의 언덕길을 따라 걷다 보면 포도밭의 단내와 흙냄새, 오래된 석조 건물의 먼지 냄새가 뒤섞여 코끝에 맴돈다. 조향사에게 그 냄새들은 향료보다 더 깊고, 더 진한 현실이다.
그는 원래 향수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다루고 싶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향을 조합하는 일보다,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머릿속이 복잡하던 어느 날, 그는 충동적으로 이탈리아 토스카나로 향했다. 와인과 햇살, 그리고 고요함이 필요했다.
그렇게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들어선 곳이 있었다.
몬테풀치아노 외곽의 오래된 수도원. 돌담 위로 담쟁이가 늘어지고, 종탑 위 갈매기가 잠든 듯 고요한 오후였다.
그곳은 와이너리를 함께 운영하는 수도원이었다 — 포도주를 ‘기도의 결과물’로 여긴다는, 특이한 전통을 가진 곳.
조향사는 잠시 성당 문턱에 서서 바람을 들이켰다.
숙성 중인 와인의 향, 마른풀의 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향긋한 먼지의 냄새.
포도밭 한가운데에 자리한 그곳에서 그는 뜻밖의 장면을 마주했다.
조용히 성당 문이 열리고, 검은 수도복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의 얼굴은 이방인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무해한 눈빛이었지만 눈매는 매서웠다. 차라리 신부님보다 이탈리아의 까라비니에리-군사경찰이 더 잘 어울릴 법했다. 나를 유심히 보던 그의 첫마디는 이탈리아어가 아닌 한국어였다.
“혹시 한국인이십니까,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땅 속 깊은 곳, 흙의 향을 지닌듯한 저음의 목소리. 그리고는 온화하게 미소 짓는 그의 앞에서 조향사는 숨을 멈췄다.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성당에서 한국어라니.
순간 그는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그 수도사는 자신을 루카라고 소개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밤의 세계’라 불리는 곳에서 살았다. 강남에서 내로라하는 클럽들을 관리하며 큰돈을 벌었으나 고급 향수 냄새와 술, 담배, 인공적인 조명 아래- 사람들의 욕망이 섞이는 그곳에서 그는 오랫동안 방황했다.
“그때는 세상이 다 냄새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사라지지 않더군요.”
그 말을 들은 조향사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향에 집착해 온 자신이, 정작 ‘삶의 냄새’는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카는 그 후 모든 걸 버리고 유럽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낯선 프랑스행을 택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이 오버랩되었다.
처음엔 피렌체 인근의 수도원에서 포도밭을 돌봤고, 이후 이 조용한 마을로 옮겨왔다.
“포도를 기르다 보면 인간의 욕망이 보입니다. 더 달게 만들려는 욕심, 더 예쁘게 포장하려는 마음. 하지만 결국 좋은 와인은 시간과 절제가 만듭니다. 향수도 그렇지 않나요?”
조향사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마치 낯선 향을 처음 맡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루카의 손에 묻은 와인 빛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붉지만, 피가 아닌 구원의 색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수도원의 작은 방에서 묵으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토스카나의 해 질 녘은 붉고 따뜻했다. 포도밭은 바람에 흔들리고, 멀리 서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는 향을 다시 생각했다.
향은 아름다움을 꾸미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걸어온 길의 기록이라는 것.
상처, 회복,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마음의 냄새.
파리로 돌아온 조향사는 루카에게 향수 한 병을 소포로 보냈다.
‘Notte e Luce — 밤과 빛.’
탑노트는 Jasmine Sambac — 달빛처럼 은은하고 관능적인 향을 밤의 정수를 나타내는 꽃으로 만들었고, 미들노트는 Incense, 유향으로 수도원, 고요한 기도, 영혼의 깊이를 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Patchouli (파출리)를 택했는데, 흙냄새와 감정의 무게, 과거의 그림자와 현재의 평온이 만나는 지점을 만들었다.
곧 밤을 지나온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향이었다.
그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지만, 향을 다루는 마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는 향을 만든다는 표현 대신, 향을 “듣는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그 안에서, 루카의 고요한 목소리와 토스카나의 바람이 은은히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