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 3>
성인이 될 때까지 이사는 유치원 입학 전 딱 한 번 했다. 우리 집은 자주성가의 아이콘. 엄마와 아빠가 결혼하면서는 월세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7-8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우리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처음 그 집을 보러 가서 주인 부부가 우리 가족을 보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그 장면 만큼은 사진처럼 남아있다. 집 앞에 지시대명사를 붙인 이유는, 지금 그 집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는 (최소) 70년 이상 된 오래된 한옥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그 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다. 이 집을 짓게 된 것도 최근에 알게된 사연이 있다.
아무튼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다는 건, 그 집에 오래 오래 자리잡고 살겠다는 의지였다. 그 후로는 옮기지 않고 계속 살았다. 한결같은 고향집과 달리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희라 인생은 그야말로 이주사(史)로 줄줄이 나열해야만 설명할 수 있었다. 손으로 꼽아봐도 이사만 10번은 넘게 한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단연 첫 이주다. 사는 곳부터 먹는 것까지 달라지지 않은게 없었다. 게다가 매일 집 안과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작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때문에 집에 자주 있을 수 없었다. 거실에 앉아있다 갔으면 했지만, 뿌옇게 차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사소하게는 난생 처음 먹어보는 젓갈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허여멀건한 김치도 몇 입 못먹고 내려놓고, 작은 할머니가 삶아주신 사카린을 넣은 감자도 낯설었다. (지금은 윗지방 김치도 시원한 맛으로 잘 먹는다.)
외식도 자주 하지 않아서 더 그랬다. 집에서 먹던 음식과 학교에서 먹던 급식 아니고선 먹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라면을 먹거나 조미료가 듬뿍 들어가 자극적인 학교 근처 밥집을 찾았다. 그래도 아침 한끼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먹으며 입맛에 맞는지 걱정되어 묻는 말에도 괜찮다고 푹푹 밥을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젊어서부터 너무 오랜 시간 고된 노동으로 몸이 많이 상했다. 관절도 성한 곳이 없고, 거실 한켠에는 줄줄이 매 끼니 먹어야 하는 약상자가 따로 있었다. 내가 들어가 살면서 할아버지가 더 자주 아프기 시작했는데, 장에 용종도 여러 개 발견되고 계속 시름시름 앓았다.
할머니는 불안했던지 점집을 찾아갔다. 그 무당은 집에 가구를 잘못 들여서 할아버지가 아프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 집에 새로 가구를 들인 계기는 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여름 방학이 시작된 7월 어느 날 오후, 방문을 열고 쭈뼛거리며 나에게 이 집을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게 그렇게 미안할 일인가, 물론 엄마와 아빠에게 잘 돌보겠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민망했을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들었을 때도 간절한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져서 괜찮았다. 딸 하나 있는데 멀리 떨어져 사는데다 이제 둘 뿐이니까.
그 집에서 오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친척 집에 가서도 잠깐 지내는게 불편하고 눈치를 심하게 봤던 경험이 있어서 차라리 이렇게 나오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엄마와 아빠에게 집을 나가야 한다는 말을 전하니 객지 살이도 서러운데 갑자기 있던 곳에서 나오게 된 것에 더 짠해했다.
인천에 흘러오게 된 게 학교를 선택하면서 생긴 부산물 같은 결과였고, 작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살면서 몇 개월이 흐른 후 나는 또 다시 타의에 의해 떠밀려 나오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나온데다 기숙사를 모집하려면 한 달이나 남았으니 잠깐 서울에 있는 친척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거긴 따로 쓸 방도 없었고, 통금 시간이 저녁 9시였다. 게다가 학교를 다니는데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나면 편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다닐만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만약 그 곳에서 지내는 일이 유일한 선택지였다면, 어떻게든 다녔어야 했다.
그럼에도 두 명의 친척 동생까지 돌보는 게 내 일이 되었으니 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숙제를 도와주거나 무언가를 가르쳐주며 도움을 줘야 했고 밥을 먹을 때나 물을 마실 때, 씻을 때조차 눈치가 보였다. 누굴 만나러 가느냐는 질문도 나를 챙기는 질문인지 간섭을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으니 그럴만 했지만, 객지 살이에 얹혀 살기까지 하면서 학교를 다니기는 어려웠다.
계속 친척 집에서 지냈으면 하는 마음 반, 그래도 얹혀사는게 눈치 보일 수 있겠다는 마음 반으로 엄마 아빠는 내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정해진 답만 말할 수 있었겠지만, 여러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며 따로 집을 얻어서 나가는게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