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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드 Mar 05. 2024

도시 노동자에게는 안전거리가 필요해

지옥철 타면서 매일 빠지는 상념,,

언제부턴가 ‘지옥철’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가 됐다. 그만큼 출근길 지하철 안이 지옥이라는 뜻일테다. 나 역시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너무 많이 부딪치는 것이 고역이다. 압사느낌으로 실려가는 이 고통은 십수 년 전 3호선 남부터미널 역에서 인턴으로 근무했을 시절부터 익히 알아왔다. 출입문의 윗부분까지 부여잡으며 욱여넣어지는 풍경이 처음엔 무척 생경했다. 그리고 상당히 충격이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인이 박혔다. 사회에서 강요받는 긍정회로를 돌려보자면 이제는 예상 못할 불쾌함은 아니라 조금은 낫다. 압사당할 정도로 앞, 뒤, 옆사람과 빈 공간도 없이 밀착해 붙어 있기에 새로 침입당할 공간이 없다. 그 와중에 뒤통수에 붙은 머리카락과 백팩, 패딩에 붙은 털모자 같이 주인도 모르게 행해지는 공격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고의가 아니기에 참아진다. 마지막 남은 인류애다.


밀착 지옥철만이 스트레스가 아니다. 사람이 듬성듬성 있는 지하철도 복병이다. 아무도 나를 침범하지 않을 것 같은 자리에 안착했다고 안심한 순간, 급습당한다. 다음칸으로 옮겨 가려는 사람, 새로 탄 사람들이 가만 서있는 나를 툭 치고 지나간다. 그것도 불쑥. 생각지도 못한 공격은 심리적으로 더 큰 타격이었다. 특히 이 급작스런 충돌은 신호대기 중 정점을 찍는다. 앞서간 열차가 다음 역에서 출발하지 못했다며 이번 역에 조금 더 머무른다고 한다. 탈 사람은 이미 다 탔다고 생각해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계속 드문 드문 입장한다. 이제 막 지하철에 발을 담가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나를 툭 툭 치고 간다. 내 어깨는 왼쪽, 오른쪽 고르게 튕겨진다. 예측할 수 없는 침범이다. 그래서 불쾌함은 배가 된다. 상상 못 한 사람들이 계속 들어올수록 스트레스는 최고조가 된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가해자겠다.


이런 부딪침은 지하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으로도 즐비하게 일어난다. 누군가에게 내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은 무례한 언행이나 행동으로 공격받았을 때다. 물론 나는 의외로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직접적으로 불편함을 표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상대방은 악의가 없었는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나도 모르게 가해자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흘려 넘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치한다고 해도 내가 불쾌함을 느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도 가끔씩 이런 불쾌한 감정이 올라오는데 친하지도 않고 애정도 느끼기 힘든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과 자꾸 부딪칠 일이 생기는 회사에서는 더하다.(인원수에 비해 친분과 애정을 쌓을 기회가 적다..) 그리고 그 공격은 역시 예기치 못하다는 점에서 극강의 스트레스가 된다. 지옥철 내부에서 이미 인내심은 많이 소진된 상태이기에 이해심을 발휘할 에너지도 바닥이다. 회사가 고통스러운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딪침이 일어나는 이유를 애꿎은 사람에게 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들도 나도 피해자다. 나의 분노는 사람 대신 도시로 향한다. 내가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 사는 탓이다. 사람들 간의 부딪침이 지금처럼 매일같이 하루에도 여러 번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것 같다. 밴댕이 속알만해진 내 인내심도 조금은 살을 찌울 것이다. 얼마 전 접했던 이효리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이 싫어서 제주로 내려갔는데 제주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사람이 반갑다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사람을 마주치는 절대량이 줄어든 탓이다. 이런 생각을 지하철 탈 때마다 이따금씩 하던 중 중앙일보 칼럼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글을 발견했다.


여행하고 돌아온 이들은 "리스본 사람들은 친절해", "교토 사람들은 불친절해"와 같은 말을 곧잘 한다. 친절은 상대가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베푸는 이의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로스트 재팬>의 저자 알렉스 커는 도쿠시마현과 고치현 경계에 위치한 이야 계곡을 여행하면서 왜 이 지역 사람들은 유독 친절할까를 거듭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구밀도가 낮고 복잡하지 않은 "산악 지역이 평야 지대보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들어낼 개연성이 있다." 그들은 집단 경작을 하지 않아 경쟁을 덜 하고 사냥하거나 나무하며 먹고살기 때문에 독립성이 강하고 여유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교토 사람들은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끈을 부여잡고 살기에 매사 긴장 상태이고 친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칼럼_마음 읽기]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각(2023.12.12), 이은혜 / 글항아리 편집장


칼럼의 이 부분을 읽고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어렴풋했던 짐작은 생각으로 바뀌어 더욱 분명해졌다. 세계에서 최상위급으로 인구밀도가 높고 복잡한 도시인 서울, 특히 ‘노동자’의 삶은 경쟁적이고,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어 독립적이고, 불친절해지기 쉽다. 이런 인구밀도에서 욱하는 사람들, 나아가 묻지 마 살인까지 있다는 게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쌓여있던 스트레스는 아주 사소한 일이 트리거가 되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도시 사람들은 내 안에 독처럼 담긴 스트레스, 그것이 분노로 바뀌어 뒤섞인 감정을 잘 다루어야 한다. 이는 언젠가부터 숙명이 된 듯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과 강제로 부대끼며 사는 도시 살이에 신물을 느끼지만, 밥벌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도시의 편리함에 너무 길들여져 이 편리함을 다 버리고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절망했다. 정부에 기댈 수도 없다. 지하철 좌석 없애기, 지하철 신설과 연장, GTX는 모두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닌 것 같다. 결국 대도시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방법을 강구해 적응해야만 한다. 지친 나를 스스로 돌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안전거리 확보를 택했다. 거창하지만 허세를 빼면 그냥 집콕이다. 작년 여름휴가에는 2주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지 않았다. 나만의 안전거리를 침범당하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다. 2주 동안이나 외부로부터 공격당하지 않으니 한결 나아졌다. 게다가 마지막 날에는 밖에 나가고 싶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어졌다. 그동안 스트레스가 많긴 많았나 보다. 이후 마음이 지쳤을 때에는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싶어 서글프기도 했지만 집안을 청소하고, 인테리어 소품도 사고, 밥도 해 먹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나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로 받아 들였다. 이렇게 나를 보호하는 법을 터득해 간다. 도시 노동자에게는 나를 지켜낼 안전거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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