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참 좋겠다, 먹고 싶은 게 많아서.

"너는 참 좋겠다, 먹고 싶은 게 많아서."

나 어렸을 때, 아빠는 나를 보고 이 말을 자주 했었다. 요즘 왜인지 이 말이 자꾸 떠오른다. 아빠의 특유의 억양까지 얹어서.


물론, 당연히, 나는 요즘도 먹고 싶은 게 많다.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는 시기가 오면, 그럴리가 없다는 의아함을 동반하여 아주 곰곰히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무엇이 먹고싶은가. 모르겠으면 반려인에게 "내가 뭐가 먹고 싶을지 맞춰봐" 물어보거나(기가 막히게 또 이 사람은 맞힌다, 놀랍다), 윗층 언니에게 요즘 우리들의 인스타에 뜨는 먹거리들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그럼 또 적절한 무언가를 찾는다.


오늘 아침은, 그릭 요거트에 맛밤을 으깨어 넣고 알룰로스와 시나몬 가루를 톡톡 뿌려 적절히 섞어준 다음 바삭하게 구운 통밀 무화가 빵 위에 얹어 먹었다. 이야, 오늘은 바로 이 맛이었다. 기가 막힌 맛이다. 바삭한 빵이 씹힌 이후에 달큰한 시나몬 향이 가득 퍼지고, 덩어리 진 맛밤이 으깨지는 순서로 맛이 팡팡 터져난다.


내가 만들어 먹는 음식에는 시중에 파는 음식에는 꿈꿀 수 없는 굉장한 '듬뿍'이 담겨있다. 원재료를 때려넣는 것으로부터 얻는 짜릿함을 음미할 수 있다. 이렇게 충분히 마음에 드는 맛을 만나면, 다음에 또 만들어 먹겠다는 기대를 품게 되고, 그런 기대를 품을 수 있는 맛을 오늘 만난 것만으로도 또 기분이 들뜬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누구한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 먹을 때, 나는 스스로가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걸 막연하게 느낀다. 내가 원하는 맛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자긍심과 든든함.


다른 맥락으로 내가 예전보다는 나이가 들어간다는(긍정적인 의미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건 나의 욕구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는 걸 어렴풋 느끼게 될 때이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좋은 일이 생기길 바란다고 소망하던 모드에서, 더 얹지 않아도 되니 뭐 하나 빼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더 간절함) 소망하는 모드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다 손아귀에 넣고 싶어서 우걱우걱 씹어먹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멈칫하고 주춤한다. 더 주지 않아도 되니 가져가지는 말아.


돈이 많으면 좋은 것들을 더 얹기 수월하겠지. 그런데 아무리 많은 돈이라 할지라도 나의 변화한 소망과 모드를 채워주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이 말을 들은 가까운 지인은 '그것 역시 네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라고 했지만(역시 수긍이 가는 말이다), 내가 요즘 원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과 '그 시간을 품은 발효'의 힘이 담겨있다. 좋은 원재료를 때려박아 시간이 알아서 그 깊은 맛을 우려내주기를 바라는 세월과 인내와 지혜의 힘을 바라는 것 같다.


예전에 석사 랩미팅 때, "삶의 의미"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나누던 시간이 있었다. 교수님은 삶의 긍정적인 요인과 상관관계가 높은 '삶의 의미' 변수를 'painkiller'라고 설명했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에서는 삶의 의미 지수가 낮고, 못 먹고 쉽게 죽는 나라일수록 삶의 의미 지수가 높다. 이건 삶의 의미가 실제로 삶의 고통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삶의 의미를 간절히 찾지 않아도 되도록 삶의 현실을 바꿔야 되는 함의를 지니기도 하다. 결국에는 과연 삶의 의미가 모든 상황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를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후에는 삶의 의미를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괜찮다고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은 아닐까, 정말로 긍정할 수 있기만 한 요인일까. 그런데 내가 바라던 발효의 힘이 잘 발휘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삶의 의미라는 효모가 필요했다. 맞아. 메리 파이퍼 언니는 행복과 삶의 의미를 구별하며, 행복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상태이지만, 삶의 의미는 초월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고통과 자기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빠의 말대로 먹고 싶은 게 많아서 부러운 인간임인 동시에! 고통도 뭉근하게 품어가면서 잘 발효되기를 희망하는 인간으로 커가고 있다! 발효의 힘 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