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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리따 Feb 20. 2023

나는 잘 잊어버려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 동의하시는가요? 저는 동의합니다. 모든 걸 다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에게 가장 의미 있고, 강한 인상을 준 것 위주로 기억을 하고 있겠죠. 실제로 저는 망각하고 다시 또 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어요. 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크게 반박하지 않고 동의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삼 일 전이었습니다. 머리를 감는데 갑자기 머리숱이 많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요. 원래 숱이 많아서 웬만한 집게로는 다 집을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다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공간이 남았어요. 


출산 후에 머리가 많이 빠진다고 하죠. 저는 빠져도 원래 상태와 비슷했어요. 계속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이 빠지고 난 다음에는 다시 원래처럼 풍성해졌어요. 개인저서 초고 쓸 때와 퇴고할 때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적당히 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때도 빠졌다기보다는 빠진 만큼 또 났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었어요. 이랬던 제가 확 줄어들었다는 걸 알고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첫 번째로, 요즘 좀 피곤해서 그런가? 눈 위에 살도 파르르르 떨리고, 잠도 계속 많이 자고 싶어 하는데 결국 피곤해서 머리도 많이 빠졌나? 

두 번째는 출간까지의 과정이 힘들었나? 8월 말부터 거의 쉬지 않고 달리면서, 계속 일하고 하루에 몰아 쉬기를 반복하다 보니 내 몸이 좀 힘들었나? 

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세 번째, 이번이 좀 허탈합니다. '아 맞다! 얼마 전에 머리 정리했었지! 내가 머리숱 정리 좀 해달라고 했었구나!' 하며 그 원인을 찾아내게 됩니다. 


이렇게도 잘 까먹는다니,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에 다시 한번 '망각의 동물'이 떠오릅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후회나 힘든 일에 대해 많이 쓰이는 거 같아요.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게요. 

첫째는 술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다짐합니다. '술은 적당히 마신다'라고요. 하루 종일 숙취 해소가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날에는 더더욱 그러하죠. 하지만 그날 밤이 되면 안주가 있어서 해장술을 하는 저를 보게 됩니다. 또는 얼마 안 있어 또 술을 많이 마시죠. 오늘, 며칠 전의 다짐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둘째는 출산입니다. 애 낳는 고통, 키우면서 힘든 일은 다 잊고 둘째를 가집니다. 계획적이었든 계획하지 않았든 상관없어요. 적어도 피임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임신 초기 화장실 자주 갔던 일, 입덧 때문에 밥 못 먹었던 일, 좋아하는 음식을 못 먹은 일에 대한 그때의 감정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후기 들어서는 잠도 제대로 못 잔 일,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쉬어야 했던 일은 기억을 떠올려봐야 생각이 나요. 출산하면서는 또 어떤가요. 진통하며 온몸에서 땀이 났던 일, 머리 방향 돌린다고 허리 튼 일, 병실에서 진통제 달아도 아파서 끙끙 앓던 일은 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어요. 집에 데리고 와서는 잠 못 자고, 울면 왜 우는지 몰라서 답답했고, 내 몸 씻는 일도 후다다닥, 밥도 말아서 후루룩 먹은 일도 기억은 납니다. 하지만 다 잊어버리고 결국 둘째를 가졌어요. 


셋째는 글쓰기입니다. 공저 쓰며 퇴고 과정이 힘들었어요. 무엇보다도 같이 쓰다 보니 글 차이가 나는 데에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개인 저서 역시 퇴고는 힘들더군요.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습니다. 퇴고하며 '다시는 안 쓰고 싶다'라는 마음이 있었는데요, 전자책을 쓸 준비를 하고 있어요. 두 번째 개인 저서 주제를 고민 중이고요. 


글로 적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고통은 다 지나가는구나 싶어요. 다 잊어버리고 본인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잘 잊어버려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다면, 감정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면 다시 할 마음이 생길까요? 


좋아서 다시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글쓰기가 저에겐 그러하니까요. 그런데 글을 쓸 때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독자를 위해 어떤 글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 그걸 또 글로 표현하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그래서 퇴고할 때도 많은 고민을 하고 요리조리 바꿔보는 거 같아요. 그런 힘겨운 시간을 겪고 나서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잊어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한 편의 글을 씁니다. 망각의 동물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힘든 일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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