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에서 나고 자랐지만 면천이란 지역은 이름만 들어봤지 직접 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면천읍성이라는 단어의 조합도 생소하기만 했다. 머릿속으론 해미읍성을 떠올리며 언니들과 면천읍성에 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성곽이 보였는데 곳곳이 뚫려 있었다. 정비사업을 이제 막 시작한 건가? 좀 실망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성곽길에 올랐다. 시야는 탁 트여 거칠 것이 없고, 바람에 쉴 새 없이 펄럭이는 깃발을 보니 실망스러웠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래, 이 정도만 돼도 괜찮다.
성곽을 걷다 보니 한옥이 눈에 들어왔고 한옥을 둘러보다 마을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지도를 보니 향교도 있고 3.10 학생독립운동기념관, 미술관, 향교에 독립서점도 있었다. 이게 다 여기에 있다고?
얼핏 보기에 성 안의 도시는 그냥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처럼 보였다. 그런데 막상 걷다 보면 골정저수지가 나오고, 시골 논 길을 지나다 보면 조선시대 창건된 면천향교도 나온다. 언덕을 넘어가면 <그 미술관>과 <3.10 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이 마주 보고 있다. 언덕을 내려오면 저 멀리 대숲바람길이 여기도 좋다고 속삭인다. 호기심에 그곳으로 걷다 보면 군자정이 모습을 드러내고 고개를 들면 아담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공원이 보인다.
'이게 다 뭐야' 신이 났다. 조종관으로 넘어가는 언덕엔 예쁘장하고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돌계단이 보였다. 돌덩이들은 얼룩덜룩하기도 하고 울퉁불퉁했지만 오랜 시간과 어우러져 오히려 단정해 보였다. 숨은 보물 캐 듯 자꾸만 새로운 게 나타났다.
우리는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큰 기대 없이 방문한 곳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기대 이상의 기쁨이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곳은 특색 없는 콘텐츠로 낯선 방문자의 주머니나 터는 그런 관광지와는 조금 달랐다. 한꺼번에 다 보여주지 않는 대신 직접 걸어서 방문한 자에게는 그만큼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다. 구석구석 걷다 보면 1,100년 된 은행나무도 만나고, 개화기의 단출한 2층 건물에 레트로 감성을 살려 단장한 미술관과 독립서점, 카페들도 발견하게 된다. 다른 관광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이곳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전혀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발견이었다는 점과 다른 지역보다 조금 더 생활 공간 같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날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칼국수 집의 열무김치였다. 늦은 점심시간, 식당엔 우리 일행 밖에 없었다. 들깨 칼국수를 주문하고 나서 잠시 뒤, 초록색 바탕에 흰색 무늬가 어지러운 그 흔한 플라스틱 접시에 열무김치가 넉넉하게 담겨 나왔다. 볼 때부터 침이 넘어갈 듯 맛있어 보였다. 적당히 연해서 열무의 식감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았다. 고춧가루 양념으로 열무를 질식시켜 버리지도 않았고, 본래 열무가 품고 있는 물기도 살아 있었다.
우리 세 자매는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허겁지겁 열무김치를 먹어댔다. 그것은 엄마 김치와 꼭 같진 않지만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맛이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깜짝 선물처럼 나타난 열무김치를 정신없이 먹는 동안, 마음 한 켠에 따스한 온기가 천천히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한겨울 새벽녘까지 남아있는 온돌방 아랫목의 온기처럼, 이날의 기억은 한동안 세 딸들을 은근하게 지켜줄 것이다.
든든하게 몸과 마음을 채우고 '오래된 미래'로 다시 돌아갔다. 이런 곳에 있는 독립서점이 어떤지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겉에선 초라해 보이기도 했는데 실내는 다정함이 몽글몽글 솟는 듯 아기자기했다. 생각보다 공간이 넓었고 책도 은근히 많았다. 곳곳에 오래전 책과 지금의 책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 점이 무척 특이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는 게 이런 걸까.
책방 입구 한쪽에는 빛바랜 책들만 따로 꽂혀 있었다. 둘째 언니는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이 학창 시절에 읽었던 책들이라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40년 만에 다시 만난 책들과 인사하고, 떠오르는 옛 추억 한 자락에 행복해하는 언니를 바라보니 나도 좋았다.
입구 통로에는 은유 작가의 책도 있었다. <글쓰기의 최전선>. 책 중간중간에는 이런저런 질문이 적혀있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사장님이 읽고 남긴 메모인지 물어봤다. 작년에 은유 작가가 참석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질문하려고 읽으면서 메모해 둔 거라고 했다.
아! 나도 언젠가는 이런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 오래전부터 이런 서점을 운영하는 걸 상상만 해왔었다. 나만의 특색을 어떻게 담아 운영할 것인지 구체적인 답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그 특별함을 담아서 책과 글과 사람이 함께 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책과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별 것 아니지만 진지하게 토론도 하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앞에선 언제든지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는 그런 공간. 이것을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 싶다.
별 것 아닌 줄 알았던 면천읍성을 돌아다니다 숨은 보물도 캐고 추억도 선물하고 잊었던 꿈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