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의 온도

by 시크한 달빛


금요일 점심, 약속이 없었던 터라 혼자서 사무실을 나왔다. 도보로 10분쯤 걸으면 닿는 식당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10월 들어 유난히 비 오고 흐린 날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맑고 투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과하지 않게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있어 세상이 더 맑고 깨끗해 보였다.


그렇게 가을의 공기를 느끼며 걷다 보니 저 앞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서니 회사 직속 상사였다.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하기로 결심하고 상사의 눈을 보며 걸어갔다. 그러나 상사는 마치 나를 모른다는 듯이 끝내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 그럼 뭐 나도 굳이 인사 안 해도 되지' 생각하며 지나갔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처음부터 인사할 생각을 하지 말걸' 후회되었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짧은 순간 느꼈던 무안함과 민망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란 무지개 일곱 빛깔이 실상은 무한대로 구분되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누군가에겐 인사가 예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불편한 개입일 수도 있다. 그와 나의 관계는, 내가 보기엔 ‘인사할 수 있는 사이’였지만, 그에게는 ‘모르는 체하는 게 더 편한 사이’였던 모양이다. 그 씁쓸한 어긋남 속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인간관계란 그렇게 조금씩 비껴 나며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어쩌면 그가 인사를 피한 건 단순히 관계의 거리감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혼자 점심을 먹고 혼자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 그에게는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본다고 해서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만, 또 유쾌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그는 고위직이고, 나는 그렇지 않다. 혼자라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지는 순간에,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누구에게나 조금은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오히려 자유롭다. 혼자 다녀도, 누가 신경 쓰지 않으니까.

요즘 직장문화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고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 각자 식사하고 일하고 퇴근하는 쪽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 혼자 밥을 먹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때로는 조금 씁쓸하다. 편한 건 맞지만, 편하다고 해서 꼭 행복한 건 아니다. 나 역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낮추며 이 변화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다. 모두 다 이렇게 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어쩌면 이런 변화는 우리 사회 특유의 집단 문화에 대한 피로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려는 본능 같은 것. 그러나 이렇게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면, 언젠가 우리는 어떤 세상에 도달하는 걸까. 관심받지 않아도 괜찮고,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곳에서는 과연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은 결국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존재다. 나를 위해 사는 삶이 필요하지만, 그 안에 ‘너’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건 어떤 삶일까. 무지갯빛 관계의 온도를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가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하루하루 나에게도 남에게도 특별히 나쁠 일은 만들지 않으며 보내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다음번에 또다시 그 직원을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어제의 민망함을 떠올리며 그냥 지나쳐야 할까, 미친 척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