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 우울증 극복기 첫 번째] 이게 바로 코로나 블루인가?
지난 주말, 다른 이유로 들른 정신의학과에서 경증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요즘 내가 왜 이러지? 라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우울증 때문이었다니, 이제야 실마리가 풀렸다. 또 한편으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께 다른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안 느끼냐고 되물었다.
병원에 방문한 이유는 알콜 의존증이 의심되고, 과음하고 나면 몰려오는 심한 우울감 때문이었다. 몇 년 동안 술주정을 할 만큼 술을 마신 적이 없었는데, 최근 한 두 달은 술자리를 가질때 마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단순하게 기억이 안 나는 수준이 아니라, 이성을 잃은 정도였다. 또, 다시는 이렇게 과음하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자제가 안 됐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음날이면 자괴감이 미치도록 밀려와서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밥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자책하고,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저 시간이 빠르게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술을 마신 사람들은 큰 실수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며 나를 걱정하고 위로했다.
병원에 방문하기 전날 나는 또 과음했고, 다음 날 뇌가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울함이 밀려와서 정신의학과를 찾았다. 의사는 20분 동안 내 얘기를 듣더니, 오히려 알콜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가벼운 우울 증세가 있어 보이고, 일상에 즐거움이 없어서 술을 찾는 것 같다고 했다.
갑자기 우울 증세라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의사가 얘기한 우울증 단계 중 초기 단계가 요즘 내 상태였다. 무기력하고 의지가 없고, 쉽게 피곤해지고, 그 이후에는 자책, 후회를 많이 하고 심해지면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무기력, 의지 없음, 피곤함 딱 나였다. 나는 좋은 감정도, 싫은 감정도 거의 느끼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원래 혼자 보내는 주말에도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밥 먹으면서 맥주도 한 잔 마시고, 자전거 타고 한강도 가고, 만화방도 갈 정도로 활동적이었는데, 최근에는 이런 경험이 전혀 없었다. 하루에 5,000보는 기본으로 걷던 내가, 단 12보만 걸은 날도 있을 정도였다. 일상이 지루하고 쳇바퀴 돌리는 것 같다고 느낀 게 불과 2주 전이었는데, 이게 우울 증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바보같이 그때는 삶이 너무 안정적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되돌아보면 이런 일상은 수도권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많아지면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가던 미술학원도, 좋아하던 카페와 식당도 이때부터 안가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기를 바라며 집을 꾸미고, 커피 머신도 사고 집에만 있었다.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니 점점 지친 건 아닐지 추측해본다.
또 웃기게도, 그때쯤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시작해서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몇 가지 음식만 돌려가며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것도 한몫했을 가능성이 있다. 병원에 다녀온 후 저탄수 고지방 식이를 끝내기로 했고, 내일 먹을 음식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언니는 탄수화물을 안 먹어서 기분이 저하된 것 같다고 하는데, 이건 잘 모르겠다.
우울 증세를 완화해주는 약과 알콜 의존증을 치료하는 약을 소량씩 처방받았다. 의사는 알콜 의존증약을 처방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과음 후 약간의 우울감은 예전에도 있던 증상이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고 싶어서 처방받고 싶다고 했다. 물론 지금처럼 우울감이 심하지는 않았다.
약을 먹으니 확실히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예전에는 내 평소 기분이 이랬었지! 그동안 우울 증세가 있었다는 게 확실히 실감 났다. 신기하게도 약을 먹으니 예전처럼 짜증도 늘었다.
사실 병원에 다녀오고 오히려 더 우울하기도 했다. 내 감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인데, 내가 우울하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우연히 초기에 진단을 받아서 다행이고, 빨리 회복하고 싶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내 인생 감정 곡선의 최하점은 지금일지라도, 어서 박차고 올라가고 싶고, 의지가 불타올랐다.
이번 주는 최대한 활동적으로 보내려고 했다. 평일에는 늦게까지 일을 해서 여가 시간이 거의 없지만, 회사 점심시간에는 밥 먹고 꼭 산책을 했고, 목요일에는 극장가서 심야 영화도 보고, 금요일에는 집에서 영화 보고 SNS에 감상평도 남겼다. 오늘은 혼자서 꽃시장 구경도 가고, 꽃도 사고, 남대문에서 호떡도 사고, 정말 가고 싶었던 맛집에서 음식도 포장해왔다. 집에 와서는 꽃 컨디셔닝을 끝내고 청소도 했다. 내일은 본가에 가서 꽃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꽃도 나눠주고, 우리 동네 디저트 맛집에서 케이크도 사가고, 새우도 먹을 예정이다.
이런 활기찬 일상이 얼마 만인가 싶다. 또 코로나가 심해져서 식당, 카페도 못 가고, 미술 학원도 못 가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예정이다. 참고로 오늘도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오고, 증상은 지속되고 있음에도 이 글의 부제는 경증 우울증 '극복기'로 정했다. 왜냐면 나는 꼭 극복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