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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ghtme Jan 29. 2022

늦은 2021년 회고

 원래 나는 가을이면 센치해져서 이른 회고를 남기곤 했는데, 작년 가을에는 별로 감성적인 기분이 들지 않아서 이제야 늦은 회고를 적어본다. 돌이켜보니 2021년 역시 크고 작은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직장 이야기를 하고 싶다. 3월에 이직한 직장은 기대보다도 훨씬 좋다. 사람들이 친절하고, 내가 분석한 결과가 바로 서비스에 적용되는 점도 정말 재밌다. 매일 재택근무를 하는 점도 마음에 든다. 체력이 약해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녹초가 되곤 했는데, 이런 힘든 경험을 안 해도 돼서 좋다.

 하지만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직을 하고 싶다. 새로 온 매니저는 보여주기식 업무에 비중을 많이 두어서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고, 지금 회사는 내 커리어에 큰 장점인 머신러닝, 데이터 엔지니어링 역량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도태되는 것 같아 두려움을 느낀다.


 또 인맥에도 변화가 있었다. 현재 직장 분들과 가끔 모임을 가져서 친해졌는데, 다들 나처럼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에서 흥이 넘치는 분들이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즐겁다. 새로운 친목 모임이 생기기도 했다. 원래 대학 때 가장 친했던 친구는 두 명이었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점 모임이 커졌다. 졸업 후엔 다 같이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렵기도 하고 모두와 그 두 명만큼 끈끈하지는 않아서 일 년에 한 번 정도 보는 사이었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인원 제한 때문에 제일 친했던 친구 두 명과 따로 만나게 됐고, 우리끼리는 보내는 시간이 너무 재밌어서 분기에 한 번씩 만나서 1박 2일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처음으로 캠핑도 가보고, 호캉스도 가고, 내가 이사가기 전날 우리 집에서 굿바이 파티도 하고, 곧 집들이도 하러 온다. 30대에도 대학 친구들과 이렇게 자주 열정적으로 놀 수 있어서 행복하다.


 가족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내가 친언니네 집 근처로 이사 오게 되면서, 서울에서 혼자 살 때보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언니는 육아가 힘들어서 이삼일에 한 번은 나를 찾고, 부모님은 조카를 보기 위해 언니네 들를 때마다 나도 함께 만나기를 원한다. 나는 가족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고 싶은데, 집이 가까우니 이런 부탁을 항상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번 만나자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조금 힘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읽은 오은영 박사님의 화해라는 책에서 가족들과 거리를 두는데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인데 그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겠냐고 하는 구절을 보고 나도 이제 더 선을 그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하나에 빠지면 그거에만 몰두하는 내 특성이 잘 드러난 일도 있었다.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라온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라는 책을 우연히 읽은 후, 정세랑 작가에 빠져서 작가가 지금까지 출판한 모든 책을 사서 한 달 만에 전부 읽었다. 소설에는 흥미가 없고 무언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인문학책을 주로 읽어왔는데, 올해는 한국 소설에 관심이 가서 김초엽, 손원평, 최은영, 정유정, 천선란 작가의 책도 읽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한국 소설을 찾을 것 같다. 세어보니 작년에는 총 45권의 책을 읽었다. 2020년보다 더 많이 읽어서 뿌듯하다. 


 에세이 쓰기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한 달 동안 매일 에세이를 쓰면 내가 쓴 글을 책으로 만들어주는 프로젝트였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글의 구조가 너무 단순하다는 게 와닿았다. 나도 언젠간 어떤 종류던지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삶의 목표를 갖고 있고, 그 책의 종류가 에세이가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책을 낼 정도로 글 실력이 늘기 위해서는 에세이를 많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권의 에세이집을 찾아 읽었고, 사실 조금 회의적으로 됐다. 누군가의 인생 자체에 정말 큰 관심이 가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인생, 가치관 얘기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본인의 가치관에 관해 쓴 몇 개의 글에서는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고, 도움이 되는 에세이를 쓰는 게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낸다는 멀고 큰 목표와는 별개로, 브런치에 글을 더 많이 쓰려고 했는데 몇 편 쓰지 못했다. 내년에는 꼭 한 달에 한 개씩은 글을 써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우선 본의 아니게 이 글로 1월 목표는 이루게 됐다.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바뀐 건 정서적인 부분이다. 난 내가 정말 예민하고 생각이 많고 완벽주의가 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우울증 치료를 받으며 둔해지고 걱정도 없어지고, 강박적인 것도 많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상처를 받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사람은 나한테 왜 그랬을까,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지만, 지금은 상처를 받은 딱 그만큼만 아파하고 털어낼 수 있게 됐다. 강박 증세도 많이 나아졌다. 주말에 공부하겠다고 결심해놓고 종일 놀았어도, 돈을 아끼기로 했으면서 명품 가방을 사서 다짐을 못 지켰어도 다음부터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괴감에 깊이 빠지지 않는다.

 나는 가벼운 증상이었는데도 병원에 다닌 후로 정말 좋아졌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병원에 다니는 걸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면 나는 다니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한국 사회에서 주변 사람의 시선이나 고정 관념 때문에 망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이 힘든 원인은 도파민 분비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고,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는 병원에 가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정신과 약에 의존하게 된다고, 약을 먹지 않으면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신과 약을 장기적으로 먹으면 뇌의 신경 회로 자체를 정상적으로 바꿔줘서 완치 후에 약을 끊어도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여기서 전제는 의사에게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 약을 임의로 끊지 않는 것이다.


 회고를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서도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사진첩을 둘러보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위에 쓴 것 이외에도 인간관계가 부질없다고 생각한 내가 정말 큰 도움을 받으며 따듯함을 느끼기도 했고, 한적한 바닷가로 이사 와서 점심시간이면 밥을 먹고 바닷가 산책을 할 수 있게 됐다. 한강에서 패들보드를 탄 순간에 느꼈던 황홀함도 기억에 남는다. 적금밖에 모르던 내가 아파트를 사기도 했고, 투자에 관심이 커졌다. 내년에는 또 무슨 일이 있을까?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뀔까? 알 수 없는 미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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