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소녀는 아파트 옥상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악스러운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체육복 잠바만 걸치고 나온 것이 내내 후회가 되었다. 옥상에는 어제 내린 눈이 군데군데 쌓여있고, 그 위로 검은 안개 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멀리 듬성듬성 보이는 빨간 십자가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방 속에서 핸드폰이 윙 울렸지만 소녀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 올라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고통스럽던 시간도 영원이라는 날개에 묻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소녀는 늘 하던 대로 난간에 다가가 앞 동에 불이 켜진 창문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무성영화처럼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15층은 오늘도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아름답게 점멸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남매가 거실에서 블록 놀이를 하는 것이 보였다. 소녀는 난간에 손을 올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잘 있어.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
곧 아이들의 엄마가 케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낮에 소녀가 아르바이트하는 제과점에서 사 간 거였다. 크리스마스에 이어 오늘도 수많은 케이크가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그 안에 새해의 소망이 담긴 것처럼 소중하게 케이크 상자를 받아 들었다. 아이들의 아빠까지 둘러앉자 온 가족이 촛불 앞에서 손뼉 치며 노래를 불렀다. 소녀는 그 낯선 행복에 동참하고 싶어서 아이들의 웃음을 따라 해 보았다.
13층 할머니는 오늘도 안마의자에 앉아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혹시 내일이면 할머니는 구십 살이 되는 게 아닐까. 1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 나이가 되면 슬픔이나 괴로움도 성경책을 보듯 술술 읽히게 될까. 아쉽게도 소녀는 그 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가방 안에서 다시 진동이 느껴졌지만 소녀는 확인하지 않았다.
소녀는 고개를 내밀어 15층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밤이라서 얼마나 높은 곳에 서 있는지 실감 나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차고 딱딱한 바닥에 머리가 닿기 전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소녀를 가장 먼저 발견할 사람에게는 미안했다. 부디 어린아이가 아니기를. 소녀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비참하지 않기를. 소녀는 고개를 젖히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말해보았다.
“괜찮다. 무섭지 않다.”
아쉬울 것도, 미련이 남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소녀는 저기 있는 사람들과 달랐다. 새해가 되어도 지금과 다를 것 없는 시간이 소녀 곁에 악취를 풍기며 고여있을 게 뻔했다. 엄마가 없으면 남자가 방에 들어와 소녀를 짓밟는 시간. 엄마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소녀를 때렸고 남자의 눈치만 보았다. 엄마가 그토록 원하던 행복이 겨우 이런 거였을까. 소녀는 보여주고 싶었다. 소녀에겐 행복을 위한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소녀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마지막으로 자기의 죽음을 애도하는 향을 피워 올리고 싶었다. 그런데 가방을 뒤적여도 라이터가 잡히지 않았다. 낮에 제과점 건물 뒤에서 라이터가 켜지지 않아 버렸던 것이 생각났다.
“후!”
마지막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누가 버리고 간 게 없나 둘러보던 소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뭔가를 꺼내 들었다. 성냥이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 상자에 붙여주는 것을 어느 틈엔가 넣어둔 것이었다. 좁고 기다란 봉투에 성냥개비가 두 개 담겨있었다. 한순간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성냥개비가 소녀의 짧은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성냥을 꺼내 봉투에 붙은 마찰 면에 그었다. 치지직. 성냥이 타오르며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울렸다. 불꽃을 감싸자 은은하게 빛을 발하더니 그 속에서 뜻밖의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소녀는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 할머니.”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아홉 살까지가 소녀의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시간이었다. 소녀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할머니처럼 씩씩하게 웃어 보이고 싶었다. 할머니가 길에서 열심히 줍던 신문지처럼 얇고 버석거리는 손등이 너무나 그리웠다. 심술궂은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여 불꽃을 꺼트렸다. 소녀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머니가 소녀를 마중 나온 걸까. 별 하나가 긴 발자국을 남기며 떨어졌다. 무수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소녀가 저 별빛처럼 쓸쓸히 이 우주에서 떨어져 나갔을까. 소녀는 남은 성냥에 불을 붙였다. 얼어서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바닥 안에서 불꽃이 환하게 피어오르더니 이번엔 여동생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자 소녀의 눈썹이 비틀리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생의 메시지를 계속 확인하지 않은 건 마음이 약해질까 봐서였다. 해맑게 웃고 있지만 동생은 아무나 부러뜨릴 수 있는 성냥개비 같았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소녀와 단둘이 살고 싶어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니 날카로운 걸로 긋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불꽃이 꺼지자 동생의 얼굴도 사라졌다. 소녀는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소녀가 없으면 남자는 동생의 방에도 들어갈지 몰랐다.
'그때도 엄마는 모른 척하겠지.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를 토하는 것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녀는 크게 소리 내 울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바람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세상은 원래 그랬다. 소녀를 달래주기는커녕 모질게 뺨을 후려쳤다. 애초에 위로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건 악에 받친 것처럼 눈물을 쏟아내는 것뿐이었다.
옥상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소녀는 눈물이 얼어 뻑뻑해진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어!"
어느새 주홍빛이 된 하늘에서 먼지처럼 작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할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 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할머니의 눈물이 얼어붙어 이 세상에 내리는 걸까. 소녀는 왠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얼굴에 떨어지는 눈을 가만히 느껴보았다. 할머니가 소녀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부러지지 말라고. 소녀의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냥개비 같은 삶이라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누군가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쉽게 부러지지만 금세 타오르는 성냥이 되라고. 처음엔 작고 보잘것없지만, 옮겨 붙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불꽃이 되라고. 그러자 가슴속에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소녀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았다. 가방에서 핸드폰이 다시 울리자 꺼내보았다. 동생의 전화였다.
"언니, 언제 와?”
소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고르며 지금 가고 있다고 했다. 전화기를 가방에 넣고 보니 바닥에 성냥이 타고 남은 재가 떨어져 있었다. 소녀는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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