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lla Jun 05. 2022

단절

노산, 초산 임신과 출산이야기


 브런치에 걸린 나의 소개에도 당당히(?) 적었듯이 나는 자발적 경력 단절자이다. 어언 10년 전, 호주로 놀러왔다가 영영 엉덩이를 붙여 버린 나는 이곳에서 요리사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내가 내 입으로 스스로를 셰프라 소개하는 날이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 첫번째 꿈은 천문학자였다. 커다란 우주에 비하면 작디작은 지구의, 더 작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광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심을 품곤 했었다. 별은 저마다의 이름이 있었고, 나는 늠름하기 그지없는 황소자리를 타고났었다. 별과 별 사이를 이으면 더 큰 별 모양이 나타나기도 했다. 천문학자가 되려거든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두뇌와 성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이 꿈은 그저 꿈인 것으로 끝내버렸지만, 나는 지금도 새벽별 속 지구에서 가장 빛나 보인다는 시리우스를 찾으며 가슴 뛰는 밤을 맞곤 한다. 

 두번째 꿈은 곤충학도였는데, 아마도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파브르 곤충기를 읽은 직후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전처럼 메뚜기니 사마귀니 하는 것들을 맨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건 이뤄졌더라도 유지하지 못했을 성싶다. --맨정신으로 어떻게 튀긴 메뚜기를 먹었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




 머리가 어느정도 자라고 현실 감각에 눈을 뜬 이후 가장 오랫동안 꿈꿨었던 일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련된 일이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며 짐승들의 생태를 기록하기도 하고, 어떤 형태의 인간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썩어빠진 세상에 자극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어를 먹지 못하게 하는 직업.--많은 분들이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뒤, 문어는 못 먹겠다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 또한 이 다큐를 매우 감명 깊게 봤고 서너 번 반복해서 보았지만 저는 아직 못 끊겠습니다. 문어요리.-- 잘 못 나가는 연예인들을 부러워했던 이유로, '그들은 툭하면 오지에 불려 나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게 어렵다면 작가나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신문방송학과로 진학했다. 가정사 핑계를 대며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서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교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학업에 큰 뜻이 있는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교양으로 들었던 미술사 수업과 다양한 축제등을 다루는 전공수업에는 조금 관심이 있었지만, 깊숙이 파헤치진 못했다. 다만 이시절의 나는 극강의 E였기 때문에, --요상하게도 지금은 MBTI검사를 하면 극강의 I가 나옵니다. 육아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수업을 제외한 학교생활만은 열심이었다. 학생회에 동아리에 온갖 모임 전부에 오지랖을 떨고 다니다 보니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는데, 거기다 주말 알바에 술 약속까지. 일정표도 없이 그 많은 약속을 어떻게 완수했더랬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덕분에 나는 제시간에 집에 가는 법이 없었다. 매일 열두시를 넘기고, 날을 넘기고, 뜨는 해를 보고, 엄마와 싸우고, 숙취에 정신을 못 차렸다. 내 방에서는 무슨 홀아비 냄새가 났다.

 이 맘 때쯤 나는 내 인생을 바꾼 영도형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졸업반이 될 때까지도 진로를 명확히 하지 못하자 학과 교수님께서 실습 조교직을 제안하셨다. 계약직인데다 박봉이라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1년 후배가 한 라이브클럽을 소개해주었다. 영도형은 97년부터 이른바 1세대 밴드들의 성장을 모두 지켜본 살아있는 화석이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자우림이 '미운오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부터 멤버들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니 더이상 말해 무엇. 처음 만났을 때 이미 40대인가 그랬지만 겉으로는 스물예닐곱 정도로 밖에 안 보일만큼 마음이 맑고 정신이 젊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 작고 오래된, 이따금씩 화장실 물이 넘치는 지하의 클럽에서 내 20대를 보냈다. 

 주말 낮에는 새로운 밴드들 오디션을 보았다. 밤에는 공연을 했다. 리허설도 하고 공연진행도 하고, 입장료를 받고, 맥주도 팔았다. 많은 인연을 이곳에서 만들었다. 엔지니어 노릇을 하며 가까워진 사람들과 팀을 꾸려 공연을 다니기도 했고, 지금은 몇 남지 않은 고국의 친구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연을 맺은 녀석들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주방'을 만나게 되었다. 


 때는 계약직 조교 생활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영도형과 긴 시간을 보낸 분이 여의도에서 수제버거 샵을 운영하는데 한번 같이 일 해 볼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반복적인 듯 한 생활이 염증이 될 즈음이라 나는 냅다 승낙했다.

 뜨거운 기름, 불판, 토스터, 끝을 모르는 밑 작업에 더 이상 게시할 자리도 없는 주문서. 따로 학습을 한 일도 아니었는데 내 몸이 알아서 잘 움직였다. 나는 이게 어쩌면 내 천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호주에 오는 일을 더 쉽게 받아들였던 것도 이 영향이 컸다. 대부분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는 한국인 친구들은 체력이 좋은 경우 청소나 미장을 배워 수입을 만들고 그게 자신 없다면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회전초밥집에서 일을 하는 일이 흔하다. 복잡한 일은 아니고 그저 김밥이나 좀 말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힘든 김밥 마는 일을 하다보니 보직이 생기고, 그러다가 초밥 잡는 법을 배우게 되고, 생선 손질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한 번은 내가 일하던 가게의 단골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그 가게는 맨리라는, 서핑으로 유명한 시드니의 관광지에 위치해 있었고, 그 근처는 부동산 시세가 서울 못지않아 재벌 2,3세들의 별장 천지였다. 산책을 가면 왼편에는 에메랄드 바다가, 오른편에는 입이 쩍 벌어지는 대저택들이 늘어선 그림 같던 곳. 아무튼 그 손님은 셰프로, 이 수많은 부잣집들 중 한 집에서 개인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그 역시 외국인이었다. 남미인가 어디서 온 지 십 년 가까이 되었다던 그는 호주가 요리사들 살기 참 좋은 나라라고 이야기했다.


 그즈음이었을까. 자주 가던 레스토랑 매니저였던 남편에게 호기심을 갖고 접근한 나는, 서른 즈음의 용기였는지 취기였는지 모르나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카운터에 두고 도망쳤다. 그와 정식으로 만난 지 몇 달 지났을 때 나는 호주를,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연인으로 발전하리라고는 꿈에도 꾸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었는데,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다니 사람 일 정말 알 수 없습니다. --

 단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면 요리사 자격증이 되었든, 요리 학교가 되었든 내 진로를 결정한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호주에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는 남편과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었지만 당장 헤어질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체류를 연장하기로 했다. 시험을 보고 학교를 가고, 일주일에 이틀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을 했다. 학자금 대출도 남아있었고, 학비도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쉴 수는 없었다. 졸업을 했고, 앞으로 좀 더 나아가 볼 마음에 소개를 받아 큰 레스토랑에서도 일을 했다. 경력을 위해 시키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야채도 다듬었고, 스태프 식사도 만들었고, 드럼통으로 두통을 만들어도 주말 한 번을 넘기기 어려운 소스도 만들었다. 필요하면 디저트도 만들었다. 하루에 열두시간 이상씩, 어떤 주에는 6~70시간도 일을 했다. 피곤했지만 나는 그 일을 즐겼다. 밀려들어오는 주문서를 보며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재료가 바닥 나 버릴 것만 같은 스릴을 느꼈다. 퇴근이 무척이나 달았다. 쳇바퀴 굴러가듯 매일 같은 일상인 것 같으면서도 매일이 다르고 사실은 즐거웠다. 


 한 번은 새벽일을 다닐 때였다. 집에서 자전거로는 10분정도 거리에 있는 일터였는데, 아침과 점심 식사만 제공하는 곳이며, 일식이 바탕이었던 그간의 식당들과 다른, 양식 위주의 까페였기 때문에 김밥 마는 워킹 비자 출신 딱지를 떼려고 삼고초려해서 들어간 곳이었다. 새벽별을 보며 출근하는 곳이었지만 나름의 뜻깊음이 있었다. 여섯시면 시내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마련하려 온다. 나는 그들보다 무려 한시간이나 먼저 준비해야 했다. 누군가 힘찬 아침을 바쁘게 준비하는 일을 가까이서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엄숙해진다.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하루는 비가 엄청왔다. 호주는 한국과 계절이 반대여서 아마도 7월쯤이었지 싶다. 다리를 건너는데 폭풍우가 쏟아졌다. 우뢰가 치고 전국민이 다들었을 싶은 천둥번개가 눈 앞에 내리 꽂혔다. 집에 돌아가기엔 너무 다리 한가운데였다. 출근을 서두르고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새 옷가지를 가져다주었다. 바쁜 것들이 지나가고 난 뒤, 두려움에 떨었던 나는 잠시이고 폭풍을 뚫고 출근한 나 자신이 이 직업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 책임감 만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내 발걸음을 떼게 한, 고마운 '일'.

 갖은 이유로 우리 부부는 몇 번 사는 곳을 이동했지만, 나는 일에 대한 걱정을 한 적은 없었다. 어느 지역이건 셰프는 항상 필요한 인력이었다. 경력이 적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더욱 어딜가나 반겨졌다. 내가 스스로 이 사랑해 마지않던 직업에 환멸을 느끼기 전까지는. 




 집에서 일터까지 약 3.4킬로미터. 면허가 없는 나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도중에 못된 녀석들로부터 자전거를 도둑맞았기 때문일까? 오며 가는 택시비가 아까웠던 걸까? 아니면 출퇴근 차를 잡아타는게 지겨웠을까. 지금도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10킬로그램짜리 양파망을 앞에 두고 썰고 있었던 거였는데. 갑자기 양파가 아닌 칼이 눈에 들어왔다. 

 칼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싶었다. 두 눈 딱 감고 양파 말고 내 왼 손모가지를 잘라내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저 웃어넘기려 했는데 소름이 끼쳤다. 저기 오금부터 뒷목의 얇은 털까지 쭈뼛섰다.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도마 위에 칼을 내려놨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왔다. 눈물이 쏟아졌다. 양파 때문은 아니었다. 윗사람에게 보고했다. 나 지금 손을 자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일이 아니라 삶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그 길로 일을 그만두었다.


 무책임한 행동이었음을 인정하고 오랫동안 후회했다. 성숙하지 못한 나 자신을 멸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우선은 나를 지켰어야 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후 두 달 정도 마음을 다독였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며 사색을 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싶어 했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지.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마음이 먹어졌다. 한때는 내가 사랑했던 일로 돌아가기로.


 그리고 전혀 뜻하지 않던 아기가 찾아왔다. 



 출혈 등, 여러번의 이벤트 때문에 결국 나는 어떤 직장으로도 복귀하지 못하고 임시 주부로 집순이가 되었다.  임신 기간 동안 어떤 일을 해야할까 고민했다. 육아를 소홀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억은 못하지만 뇌리에는 남을 내 아이의 아주 어린 시절을 돌보아주고 싶다는 욕구는 임신이 경과할수록, 아이가 클수록 더해진다. 그렇지만 나는 동시에 세상에서 내쳐지고 싶지 않았다. 배설하고 싶었다. 엄마이면서 인간인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노라고 뱉어내고 싶었다. 






 출산 직전, 브런치를 시작했다. 비록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다른 큰 이점이 있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지만 나에게 한사람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라는 이름만큼 나라는 존재에게도 어떤 의미를 주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지난 십여년간 내가 달고 있던 셰프라는 이름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과 나를 연결한 끈을 끊어버리는 과정인것만 같아 엄마로서의 인생이 가끔은 서글프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포기하지 않을게다. 나 때문에 엄마는 자기 삶을 잃어버렸구나 하고 내 딸이 생각하지 않도록. 모든 단절로부터 나를 지킬게다. 그 시작은 브런치다. 그럼 오늘도 시.작.






 




 어라, 위에 글이 무색하게 다음 주 글이 없다는 걸 좀 적어야 겠..... 부끄럽네요. 

 오늘로 91일째가 된 제 딸은 다음 주 100일을 맞습니다. 따라라란!! 즐거워요. 옛날 옛적처럼 100일까지만 살면 이제 살았다라는 건 아니겠지만, 어떻든 100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거 맞잖아요. 그쵸?

 뭐 스튜디오 같은데를 예약한 건 아니고, 주변 지인 분들께 머핀이라도 돌리고,--여기 떡이 없어...-- 집에서 조촐하게 아기 사진도 찍어주려고 합니다. 해서 다음주는 특별히 글이 없고, 나중에 특별판으로 뭐했는지 소소하게 적어 올려 볼게요. 그럼 축하인사 미리 고맙습니다. 뿅.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