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쓴 글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비문과의 (아무 의미 없는) 전쟁

by 이진리

나는 어쩌다 보니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어쩌다 보니 현대문학 석사를 수료했고 어쩌다 보니 짧게 재직한 회사에서 유튜브 작가로 일했고 어쩌다 보니 웹소설 작가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로 이루어진 삶의 이력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면 대체로 "와. 그러면 글을 정말 잘 쓰시겠네요"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시선을 45도 내리 깔고 수줍은 척 웃는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 행동 덕에 나는 순식간에 겸손의 아이콘이 된다.


잘 쓴 글은 도대체 어떤 글이길래 나를 자꾸 겸손한 척하게 만드는지 문득 궁금해진 순간, 끝내 답을 찾지 못할걸 알면서도 나는 '잘 쓴 글'에 대해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골몰했다. 조회수가 잘 나오는 혹은 판매 부수가 훌륭한 글이 잘 쓴 글일까? 그렇게 되면 1쇄에 그친 수많은 시인, 소설가들은 모두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다. 그 사람을 시인, 소설가로 만들어준 문단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안목이 모두 저질이라는 소리인데... 선생님들께 돌팔매를 맞고 싶지 않으므로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역시 진정성 있는 글이 짱인가? 하지만 진정성을 논하다 보면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다. 진정성이라는 녀석은 주관적이라서 도무지 평가의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길 수십 번. 결국 치트키를 써보기로 했다.


나 : 교수님. 잘 쓴 글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교수님 : 내가 그걸 알았다면 학교가 아니라 노벨문학상 시상식 강단에 서 있지 않겠니?

나 : 아하!

(논픽션)


교수님의 명쾌함 덕분에 나는 한동안 '잘 쓴 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어져 온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문제였다. 내가 노트북 두들기는 시간은 주로 새벽인데 새벽은 고민을 더 깊은 고민으로 만들어주는 잔인한 시간대다. 몇 년 간의 헤맴 끝에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뭐가 잘 쓴 글인지 지금의 나는 잘 모름. 근데 옳은 문장은 있는 것 같음.




옳은 문장 또한 '잘 쓴 글'처럼 여러 경우의 수가 있지만 한 가지만큼은 명확하다. 바로 비문이 없는 문장이다.


나에겐 비문과 관련된 흑역사가 있다. 대학 재학 동안 나는 시를 쓰는 학생이었는데 시 창작 교수님들께 종종 내가 쓴 시를 파일로 엮어 보여드리곤 했다. 3학년 때였나. 새로 발령받은 교수님께 내 시를 보여 드렸다. 그리고 온 답변.


'XX아. 이 부분 비문인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네. 쓰지 말자^^*'


정말이지 헉 소리가 났다. 나는 비문을 쓰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교수님은 내 실수를 알고 계실 테지만 멘털이 너덜너덜해질까 돌려 깐 게 분명한 그 피드백은 내 대뇌피질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졌다. 그날부터 나는 비문과의 (아무 의미 없는) 전쟁을 선포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냐고? 100전 99패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최초의 1승은 지금은 도저히 펼쳐볼 용기가 나지 않는 웹소설 첫 출간작 미팅을 위해 편집자님을 만났을 때 거뒀다. 나에겐 후천적 재능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객관적 자아 성찰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다. 고로 나는 내 웹소설이 무지하게 구리다는 걸 인지한 채 편집자님을 만났다. 프로모션이 어떻고, 정산 비율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지나 내 앞에 가지런히 놓인 타코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나는 비로소 궁금한 걸 물을 수 있었다.


나 : 제 글에 무슨 장점이 있길래 계약할 생각을 하신 건가요?

편집자 :... 작가님 글에는 비문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어떻게든 칭찬을 짜내려 일었던 편집자님의 1초는 깡그리 무시할 수 있었다. 혼자만의 전쟁에서 혼자만의 판정승을 내리리는 동안 책상 앞에서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있던 시간들이 떠올랐고 나는 오랜 무명 시절을 딛고 신인상을 받은 배우인 듯 감격했다. 한국인이라면 으레 쓰는 한국어인데 올바르게 쓰는 건 어찌나 어려운지. 실제로 한국어는 배우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인데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체감하기 어렵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 눈높이 선생님이 왔다 갔다 한 기억이 어렴풋이 기억나기는 하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비문을 안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느낀 건, 종이로 묶여 나온 출간작들은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작가와 편집자의 손을 거쳐 탄생한 문장들은 벨벳처럼 스무스해서 오류를 발견하는 안목을 키워주지 못했다. 울퉁불퉁한 땅을 밟으며 걸어야 불편하다는 걸 알듯 틀린 문장을 골라내는 안목은 어딘가 불편한 문장에서부터 길러졌다. 그러려면 사례 수집이 가장 중요한데 별로 어렵지 않다. 틀린 문장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나 지금 버스인데

-옆 사람이 자꾸 짜증 나게 함 ㅜㅜ

-극혐

-법으로 혼내줘야 되는데


분노의 출근길을 겪던 친구가 보낸 이 띄엄띄엄한 카톡을 문장으로 엮었다. '버스를 탔는데 옆 사람이 혐오스럽다.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정도로. 그리고 고쳤다. 최대한 정확하게. '버스를 탔는데 옆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혐오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로 말이다. 메시지를 보낼 때 우리는 대부분 신중하지 않기에 틀린 문장들은 초 단위로 태어난다. 사례 수집에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친구들이 보낸 카톡으로 내가 이런 짓을 한다는 걸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다.


글이 막바지 이른 지금, 조심스럽게 고백해 보자면 나는 지금 엄청나게 긴장 상태다. 아직까지 비문과의 전쟁을 끝내지 못했는데 이런 글을 써도 될까? 신경 쓴다고 쓴 이 글에 몇 개의 비문이 있을까? 패배 전적 하나 더 늘리는 거 아닌가 몰라. 그래서 발행을 눌러? 말아? 그래도 여기까지 쓴 노력이 있으니까...라고 정신 승리를 하며 조용히 발행을 눌러본다.




*비문이 무조건 금기시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시, 소설에서도 비문이 사용되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다만 비문이 허용되는 경우는 일부러 뒤튼 문장에서 미학적인 요소가 발생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