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계 일주를 하고 싶던 가장 큰 이유는
에펠탑에 올라가거나 오페라 하우스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죠.
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온 세상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의 생각과 삶을 배우고 싶었던 거예요
- 내가 가는 길이 꽃길이다 손미나 -
나는 지방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막연히 큰 아이가 6살 때 둘이서 여행사의 도움 없이 두 번의 유럽여행을 다녀와 낳은 경험의 작은 용기가 하나 있을 뿐이다. 아무리 해외에 나가기 쉬워진 세상이라 해도 "여행"과 "살이"는 분명 다를 것이라는 것쯤은 유학 한번 안 가본 나도 잘 알고 있다.
가끔 가던 피부 관리실에서 눈썹 문신을 하려고 누워있는데 언니가 잠시 손을 멈추고 전화를 받는다. 관리실에서는 늘 화기애애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때문에 전화기 너머 얼핏 들리는 내용에 생판 모르는 내가 끼어드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언니, 어머니가 해외에 계세요?"
"네, 피지에 계시는데 잠깐 들어오셨어요. "
"피지? 그게 뭐에요?"
"네 피지라는 나라에 사시면서 홈스테이 하세요."
..
..
"홈스테이요? 저도 애들 데리고 가도 돼요?"
이렇게 나도 해외에 지인이 생긴건가 하는 착각이 들어 매우 기뻤다. 내 안에 깊이 잠자고 있던 무모함은 긴 어둠을 뚫고 슬금슬금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주 가는 샵 주인장의 부모님이 하시는 홈스테이라는 안전한 영역 안에서 나는 이미 무모한 무언가를 진행 시키고자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피지가 어딘지,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넉넉치도, 쪼들리지도 않게 살고 있지만 남편에게 지나치게 부담이 될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드는 나라도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했다. 유학원을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보험을 들지 않은 것 같은 약간의 불안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현지에서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생각해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홈스테이 집이 나와 맞지 않을 경우 남편에게 급하게 도움을 구할 일이 생긴다면 그것이 무리가 되지 않아야 했다. 그것은 아이들과 떨어져 살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 쯤을 결혼 10년차 주부는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었다.
잠깐 한국에 들어오셨다는 어머니와의 만남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급한 성미가 기질을 발휘해 어머니께서 피지로 돌아가기 전에 뵙고 궁금한 것들을 직접 여쭈어 봐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서둘러 약속을 잡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피지는 휴양지라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 너무 좋지 너무 좋지 라며 연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안정된 목소리 톤으로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동안 미국이 아니고 캐나다가 아닌데도 좋을까 라는 의구심은 어머니의 차분한 모습에 희석이 되어 곧 신뢰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내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임할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어느정도 이야기가 무르익어가고 조심스럽게 비용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는지 여쭈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대답에 나는 마음 속으로 환호를 질렀고 동시에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무엇을 할까 라는 고민으로 이미 넘어가고 있었다.
"거기가 어디야?"
"거기가 어디야?"
"인터넷은 돼?"
"인터넷은 되겠지...아프리카도 인터넷은 되는데...."
초등학교도 안들어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본 적 없는 섬나라로 가겠다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내게 남편은 거기가 어디냐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했다.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라는 말로는 거기가 어딘지 와닿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글쎄 나도 잘 몰라서 가보고 이야기 해봐야 할 것 같다는 대답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시집 장가를 가도 늘 자식 걱정이신 부모님께는 한 달간의 이 여행을 비밀로 하기로 종용 및 합의하고 위험하지 않게만 다녀라는 당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냈다. 나의 무모함은 이렇게 세상의 빛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