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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 Aug 29. 2021

'팬레터', 흔한 문법도 특별해지는 성별 반전의 마법

2019 뮤지컬 '팬레터' 공연 리뷰

뮤지컬 '팬레터'가 마치 영화처럼 특별한 소재의 사랑이야기로 마음을 두드린다. 성별이 반전된 관념 캐릭터의 쓰임과 직관적 연출이 만나 쉽게 이해되면서도 깊은 감성의 이야기가 완성됐다.


뮤지컬 '팬레터'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 중이다. 초·재연의 흥행에 이어 이번 삼연에는 천재 소설가 김해진 역에 김재범, 김종구, 김경수, 이규형, 그를 동경하는 소설가 지망생 정세훈 역으로 이용규, 백형훈, 문성일, 윤소호가 출연한다. 비밀에 싸인 천재 여류작가 히카루는 소정화, 김히어라, 김수연이 맡았다. 실존 인물인 이상과 김유정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와, 순수문학단체 구인회를 모델로 역사적 사실과 상상을 더해 만든 모던 팩션(Faction) 뮤지컬 '팬레터'. 다른 무엇보다 성별이 반전된 관념 캐릭터의 등장이 흥미롭다.            

[사진=라이브㈜]

◆ 김경수·윤소호·김히어라가 빚어낸, 그 시절 문인들의 매력 속으로


천재 작가 김해진(김경수)을 동경하는 소설가 지망생 정세훈(윤소호)은 일본 동경 유학생 시절 그에게 히카루(김히어라)라는 필명으로 팬레터를 보낸다. 해진은 글 속에 담긴 자신의 슬픔을 알아봐 주는 히카루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고, 세훈은 조선으로 돌아와 해진이 속한 칠인회의 급사로 일하게 된다. 해진은 끊임없이 히카루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세훈은 희망으로 가득 찬 해진에게 히카루의 정체를 털어놓지 못한다.


극이 시작되자마자, 세훈의 또 다른 자아인 히카루가 등장한다. 히카루는 세훈이 글을 쓰면서 내보이는 완전히 다른 내면의 캐릭터다. 세훈은 꿈에 그리던 롤모델 해진과 함께 지내면서, 해진이 히카루를 그리워하자 계속 편지와 글을 주고받는다. 1930년대 모든 것이 검열받고, 금지되던 시절 자유로운 상상력과 발칙한 표현을 지닌 여성작가 히카루의 등장은 모두의 관심을 받는다.            

[사진=라이브㈜]

김경수는 깊은 감수성과 뛰어난 필력, 나약함을 함께 지닌 김해진을 아주 다정하고 따뜻한 신사로 그려냈다. 결핵으로 계속 건강이 나빠지지만 히카루를 향한 집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낸 병적인 면도 실감 나게 표현했다. 윤소호는 세훈을 연기하며 순수하면서도 소심한 소년으로 돌아왔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해진을 위해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절절매지만, 그는 히카루의 광기에 휘둘릴 때조차 해진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또 문인들인 해진과 세훈의 편지에는 아름다운 문학의 언어와 표현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담긴 두 사람의 진심이 모두를 눈물짓게 한다. 


◆ 이미 흔한 '관념 캐릭터'의 등장…성별만 바꿔도 특별해지는 마법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히카루의 활약은 놀랍다. 처음에는 세훈의 일부였지만 그의 문학적 소양과 해진을 향한 감정이 커지면서 함께 자란다. 히카루는 단지 편지와 소설만으로 해진의 모든 정신을 지배하고 결국 세훈까지도 잠식한다. 봄에 태어난 소녀에서 당돌하고 치명적인 여자로 변하는 과정을 연기한 김히어라도 인상적이다.         

[사진=라이브㈜]

특히 그간 흔하게 연극, 뮤지컬의 문법으로 자리 잡은 관념 캐릭터의 쓰임이 단지 성별 반전만으로 더없이 특별해졌다. 히카루가 본격적으로 해진과 글을 주고받고, 원고가 발표되고, 그 어느 때보다 자의식이 뚜렷한 캐릭터로 존재하는 순간 그의 생명력이 관객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마치 탄탄한 스토리의 영화를 한 편 눈앞에 펼쳐낸 듯하다.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친절한 연출은 때때로 보기 민망할 정도지만 그 덕에 모든 내용이 아주 쉽게 이해된다.


'팬레터'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간혹 불거지는 경성시대 미화 논란에서 비껴갈 도리가 없다는 것 정도다. 일제강점기 문인들의 활약을 담은 작품이지만 저항의 메시지나 일화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독특한 설정과 배우들의 열연이 주는 시너지는 왜 이 작품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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