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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Sep 11. 2023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현재: 쇠퇴와 유지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많이 늦었습니다. 당분간 주 1회 내지 2회로 찾아뵙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근 1년 반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더 많은 공백을 남겨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가짐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학업에 매진하게 되어 부득불 영화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주요 이슈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와 함께 (여건이 된다면) 영화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제시하자면,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한동안 지속 가능할 것이고, 미국에 있어 자유주의의 쇠퇴로 볼 수 있기에 미국은 당분간 끊임없는 내외부의 모순 속에서 그 해소법과 (모든 국가들에 해당하는)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기 위해 고심할 것이다. 크로노스와 달리 제우스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존속해 올 수 있는 이유는 여러 신들에게 특정 분야에 대한 권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프로메테우스를 결박했기 때문이다. 논의의 연장선에서 미국 또한 ‘자유주의’의 이념 아래에 각 국가가 특화할 수 있는 요소를 일임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줬고 NATO, UN 산하 기관, WTO와 같이 그 질서를 관리하거나 창설해 왔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외부의 적을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상해 왔고, 언더독(underdog) 정신과 탐험정신을 매우 높이 사면서 다양성을 포용했다.

이러한 세계관의 결정체로서 <탑건>의 Maverick이 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적으로 예측한 국가들의 예상보다 더딘 성장과 부상, 그리고 블롭(blob)과 중산층의 소멸과 같은 내부의 모순성으로 인해 자가당착에 빠진 상태에 가깝다. 왈트는 그의 저서(The Hell of Good Intentions)를 통해 미어샤이머(The Great Delusion)와 아이켄베리(Liberal Leviathan)의 저서의 주장 한계성을 ‘역외균형’(offshore balance)을 통한 지역패권국을 미연에 차단함과 동시에 득실관계만을 계산한 세력균형을 제시하며 정반합을 이뤄낸다. 세 저서를 비교해 보게 되면 왈트는 상반되는 전제에서 시작된 결론을 제시하는 두 학자의 논의를 순전히 스펙트럼의 범위로 제한시키며 중간자적 위치에서 유유히 조망한다.

정반합을 달성한 3명의 학자는 종국적으로 미국 정책의 가동범위를 제시해주게된다.

나아가 아이켄베리는 가장 최근의 논문인 "The End of Liberal International Order?"(2018)에서 60년대의 순수했던 JFK시절의 미국으로 회귀해야 한다며, 또 다른 희생양(가령 또 다른 페리클레스)을 찾아내 집단의 결속과 존속의 의미를 재성찰하기를 촉구한다. 한편, 그 무엇도 위기의 근원적인 해결책이기보다는 미봉책에 가깝지 않을까? 변화의 시작은 개인에서부터 일어나지만, 만개는 집단과 사회에서 표현돼야만 완수할 수 있는 법이지 않을까? 물론 왈트가 책의 말미에 주장했듯, 블롭의 자체적인 반성과 성찰을 통한 세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월드컵은 경험을 쌓는 곳이 아닌 증명을 하는 곳입니다”라는 모 축구 행정가의 말처럼 경험과 증명의 공간분할이 모호한 외교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블롭은 아가멤논과 같이 죽을 수 있는 카산드라를 자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앞으로의 내부적 모순 해소를 위해서 어떠한 새로운 적을 만들어 낼까? 이 와중에 한국은 어떠한 전략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에 호응해야 할까? 새로운 시대가 태동해야 비로소 새로운 인재와 영웅들이 탄생하는 법. 인간사(史) 신이 아닌 이상, 이러한 격동과 태동만이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 새로운 질서의 도래가 마무리되고 갈무리된다면. 해석과 정치와 이해로 점철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르네 지라르 - <희생양>의 일독을 모두에게 권장한다.

영웅은 일반적인 인물로 끌어내리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은 희생양으로서  처음에는 공동체로부터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경계를 흐리게 했다고 비난받지만, 뒤에 가서는 그 차이를 영원히 정착시킨 공로가 되돌아가게 된다. 희생양에 의해 없어지든지 위태롭게 된 질서는 바로 그것을 위태롭게 한 장본인을 통해서 재건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비로소 박해자는 우리의 과오로 점철된 과거를 참회하고 반성함으로써, 우리는(대중은 혹은 박해자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정화됐고, 이제 새로운 곳으로 도약할 준비할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보게 된다면, 작년 말 오펜하이머에 대한 그릇된 처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미국의 행동은 의미심장할 것이다. 2차대전의 끝과 냉전의 신화서사 속 시작과 끝을 함께한 존재, 오펜하이머. 어쩌면 그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냉전의 신화서사의 종지부를 찍었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새로이 정화해 줄 수 있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찾겠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오펜하이머가 가지고 있던 핵에 대한 가치관에 관련된 이슈가 새로이 국제정세의 주요 이슈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켄베리를 비롯한 왈트마저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만 같은 내부적 모순 속에서 희생양을 찾아라는 제언은. 다가올 미래를 위해 미국이 새로운 '희생양'을 찾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 될 것이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미리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Fine.



페르시아의 점령으로 유일하게 땅을 빼앗겼던 적이 있는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거친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르기 직전의 50년 동안 황금기에 진입한다. 아이오니아 지방에 문화적 정치적 불모지에 가까운 아테네였지만, 응축된 내적 역학은 분출구를 제공받아 그들 나름의 민주주의와 문화에 정의를 내려 ‘그리스의 학교’로 입지를 다지게 된다. 황금기간 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3대 비극과 파르테논을 설치하는 문화적 유산을 배태했을 뿐만 아니라, 솔론의 개혁과 민주화의 과정으로 정치 시스템 체질개선 또한 달성한다. 특히, 살라미스 해전에서 결정적으로 기여한 도시 빈민층이 유권자로 부상하여 페리클레스가 구상한 민주주의로 만개한다.

신화의 반열이 오른 Founding Fathers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의 얼개를 정의하고, 외부의 변인(탐보라 화산폭발로 인한 아일랜드 대기근, 빈 체제의 붕괴 그리고 양차대전까지)에 언제나 수동적으로 반응해 문제를 해결해 온 미국은 점차 자신들에게 예외성(exceptionalism)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특히 아이켄베리의 논문"The Rise of China and the Future of the West: Can the liberal system survive?"(2008)에서 언급한 전후(戰後) 글로벌 질서를 구성한 국가이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중국이 들어올 수 있도록 결정적 조치를 했던 국가는 다름 아닌 미국과 FDR 덕택이라 언급한 부분은 미국이 평소 어떠한 생각을 속에서 외교를 펼치는지 반증해 준다.

2차대전의 종지부를 찍고 자유의 서사를 만개시킨 FDR

그리스적 민주주의와 로마적 공화주의를 적절히 조화시킨 국가는 그들이 독보적이며, 시작부터 다문화 다인종이 뒤섞여 ‘자유’라는 이념을 생득 하고,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에 항상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최신의 논문으로 내려올수록 그의 이러한 주장과 생각은 점차 옅어진다. 다양한 종류의 민주주의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고 언급하거나, 미국이 만든 체제(regime)가 오롯이 기능할 수 있도록 국가들을 끌어들여야만 한다던가, 외부의 적이 예상만큼 부상하지 못해 내부의 선민(선량한 시민)에 대한 정의를 끊임없이 내리기 위해 발생하는 내부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던가 말이다.

거시적인 질서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모순에 대한 해결책이 본격적으로 난무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순간은 2001년이다. 분명 후쿠야마와 헌팅턴이 불러온 냉전 이후의 세계에 대한 거대담론에서부터 시작됐을 수도 있지만, 외부의 침략을 일절 받아본 기억이 없는 미국의 역사 속에서 2001년 9.11 테러가 던진 화두는 페르시아의 점령을 당했던 아테네의 시민들과 같았을 것이다. 미국은 침략당했던 아테네를 복기했을 것이며, 십자군적 응분에 불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해 중동과 대규모 전쟁에 돌입한다. 이러한 생각은 왈트의 저서(미국 외교의 대전략)에서 인용한 모 공화당원의 평인 “민주주의 이외의 지역들은 곧 불모지와 같다”라고 발언한 부분과 궤를 같이한다. 2000년대 개입주의(혹은 행동주의적) 외교정책은 이렇게 시작했다.

<Oppenheimer> 中

왈트가 그의 저서에서 비판을 가했던 블롭(Blob)의 체제유지용으로 남용된 21세기의 중동외교정책을 고발했듯, 미어샤이머 또한 항상 보편적 원칙과 민주주의, 법치에 따라 개입했는데 단극체제(제국)로서 질서를 활용해 무분별하게 개입을 시도했기에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을 목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유주의적인지에 대한 모순성과 개입을 언제 멈추고 다시 할지에 대한 모호성으로 인해 종국적으로 미국의 자유주의 패권질서가 미국의 자유주의 정체성과 국제제도보다 그 이면에 숨겨졌던 근육에 입각했다는 걸 반증했다. 전후질서개편을 통한 권위의 획득과 공고화의 과정은 질서 창설 시기의 세대가 역사 속으로 감춰지는 와중에 이제 검증의 무대 위에 놓였고, 검증의 시간을 거치는 중이다.


Da Capo al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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