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베네치아, 1

by Belle Holmes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헤밍웨이가 “모든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진실되기만 한다면”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헤밍웨이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을 때였는데도 그 문장이 굉장히 와닿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솔된 문체로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했다. 이 이야기가 진실된 이야기일지 아닐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2월 4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2월 4일. 이 날은 낭만적인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가면축제, 사육제, 혹은 카니발이라고 불리는 행사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따라서 하루 종일 도시의 땅과 운하 곳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개막 행사들이 열리고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카니발’하면 가면과 분장, 화려한 옷과 형형색색의 폭죽을 떠올린다. 2월 4일의 베네치아 역시 그와 멀지 않은 모습을 방문객과 베네치아의 거주민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비싼 가격대 때문에 모든 사람이 궁정 드레스같은 복장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0유로정도만 있으면 장만할 수 있는 가면만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착용하거나 지니고 있었다.

여자 역시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 사람들 속에서 인파를 따라 길을 걷고 있었다. 운하 위에서 벌어진다는 황홀한 개막식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아직은 겨울이라 7시였지만 하늘은 캄캄한 밤이었다. 하늘이 어두운 만큼 운하를 사이에 둔 건물과 길들은 가로등과 조명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운하의 물에 반사되어 두배로 밝게 느껴졌다. 겨울철만 되면 도시를 가득 메우는 안개는 거리의 빛들을 분산시켰고, 물가의 빛은 찬기를 머금은 바람을 따라 일렁였다. 개막식은 보지도 않았는데도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게 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여자는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개막식 시간보다 일찍 장소에 도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하 바로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운하를 무대로 치면 2-3열정도의 앞 자리에 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고, 잠시 후 주변의 모든 불빛이 소등되었다. 사람들은 올해에는 어떤 아름다운 개막식이 펼쳐질지 기대하며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곧 이어 하얀색, 붉은색, 보라색, 푸른색, 서로 다른 색의 조명들이 원 모양을 그리며 건물과 운하를 교차했다. 그리고 눈부신 조명 사이로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운하 저 먼 곳에서부터 곤돌라들이 하나 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첫 곤돌라 위에는 트로이의 목마처럼 생긴 거대한 모형 말을 타고 있는 장군이 있었다. 갓 개선한 로마의 기세등등한 어느 장군같은 모습이었다. 그 뒤로는 곡예사들이 뒤따랐다. 한 곡예사는 커다란 고리 사이를 자유자재로 드나들었고, 어떤 곡예사는 움직이는 곤돌라 위에 있는 막대에서 이중으로 균형을 잡는 묘기를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곡예사는 불에 불타는 무언가를 가지고 저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불 역시 운하에 그대로 그대로 반사되어 이글거림을 배가시켰다.

개막식과 함께 베네치아의 운하는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하늘과 땅을 비치는 거울이 되었다. 유리가 아니라 물로 만들어진 거울이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은 사람들이 절대 스스로는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이 신비스러운 도구는 여태껏 수많은 예술가들의 소재가 되어왔다. 하지만 물로 만들어진 베네치아의 거울은 그보다 더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운하에 반사된 그 모든 것들이 바람과 물결을 따라 움직이며 아른거렸기에 색과 온갖 모양이 한 데 섞여 아름답고 평온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을 휘어잡는 강렬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적어도 100개는 넘어 보이는 풍선을 타고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춤을 추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무용수의 움직임은 공중에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뿐싸분해 마치 요정이나 천사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 뒤로 피터팬이 타고 네버랜드로 날아갈 것 같은 작은 돛단배도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과 돛단배가 내려오고 있는 곳이 운하의 바로 위였기 때문에, 여자는 도대체 이들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인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운하의 바로 위에는 줄을 매달 곳이 없지 않는가. 말 그대로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처럼 사소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운하의 물이 반사된 풍경, 건너편에서 빛나는 조명들, 안개가 가득한 하늘, 곤돌라 위의 공연들이 매 순간 변화하며 눈부시게 사람들의 눈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놀라며 감탄하며 매 순간을 눈에 담아두기에 바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사소한 것이든 중대한 것이든 모든 생각들은 잠시 접어둔 지 오래로, 그저 자기 자신의 감정, 감각과 찰나의 순간들에 충실했다. 여자 역시 곧 잡생각들을 집어넣어두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집단적인 희열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여자가 감정에 압도당한 채로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마지막 곤돌라 위에는 사랑의 나라 이탈리아, 낭만의 도시 베네치아 답게 연인들이 하트 모양의 조형물 앞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었다. 짝을 지어 춤을 추는 저 남녀가 실제 연인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실제 연인이라면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커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축제의 한 가운데에서 일반인들은 볼 수 없는 풍경을 즐기며 사랑을 나누고 있으니까 말이다. 만일 그들이 실제 커플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에 고용되어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엄청난 실력자임이 틀림없었다. 운하 위의 곤돌라와 사람들이 개막식을 구경하는 땅 위는 떨어져있어 그들의 눈빛까지는 보이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들의 춤은 분명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서로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속에 자신들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그런 사랑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사랑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여자는 이런 생각의 끝에 누군가를 잠시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