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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27. 2021

가위

할머니의 선물

 그곳은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까마득히 높은 곳까지 이어진 계단.

      ‘엄마의 자궁 속이 이런 느낌일까?’

      느껴본 적 없는 평온함이 밀려왔다. 온 세상이 하얀빛으로 가득한 공간은 그 크기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두려움도 동요도 없이 한 계단씩 발을 옮겼다. 발아래 계단에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한 계단씩 오르던 그녀는 하얀 고무신 한 켤레와 마주쳤다.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고무신 위로 하얀 치마, 하얀 옷고름, 하얀 저고리, 구릿빛 피부에 굳게 다문 입술, 내리 뜬 가는 눈, 은비녀로 반듯하게 쪽진 머리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다.

     ‘아… 할머니, 할머니!!’

 그곳엔 십여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서 계셨다. 놀라움과 설움이 몰려와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쩐 일인지 아무리 목놓아 불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을 붙잡고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 순간 희란의 머리를 지그시 누르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다, 아가. 이제 괜찮아.”

      다정하고도 또렷한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할머니!!! 할머니!!”

       갑자기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새하얀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언니!! 언니! 일어나 봐요.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요?”

 룸메이트 지수다. 눈물이 범벅된 그녀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아직도 정수리에 남아있는 온기와 지긋이 내리누르던 할머니 손의 감촉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끔 할머니가 꿈에 나오긴 했어도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치매에 걸려 오랜 투병생활을 했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는 거동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팔다리가 오그라붙고 욕창으로 고통받았다. 마지막 모습이 너무 처참해서인지 가끔 꿈에서 만난 할머니는 고통에 신음하며 아기처럼 웅크리고 희란의 등에 업혀 계셨다. 그녀가 아주 어릴 때 치매에 걸리셨기 때문에 꿈속에서처럼 단정하고 고운 할머니 모습을 보는 건 유치원 이후 처음이었다. 희란의 기억 속 온전한 할머니에게선 언제나 갓 빨아 풀을 먹인 이불 홑청 냄새가 났다. 여름날 오후 대자리에 누워 무릎을 베고 낮잠을 청할 때면 한 손으로 배를 쓸어 주시거나 부채질을 해 주시던 다정한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있어 희란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시드니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고 외로웠다. 무의식이 그리운 그 시절 할머니를 불러왔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오랫동안 희란을 집요하게 괴롭혀온 증상들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빨간 책가방을 선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두통은 양쪽 관자놀이에서 시작되어 깨질 듯한 통증으로 머리를 조여왔다. 맥이 뛰는 소리가 귀에서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눈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대낮에 밖에 나가면 비정상적으로 눈이 부셔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점점 학교를 갈 수 없는 날이 많아졌다. 희란의 어머니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막내딸이 병들어 가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모든 인맥을 동원해 용하다는 병원을 수소문했다. 엄마 손을 잡고 허름한 시골 의원에서 서울의 대학병원들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온갖 검사들 다 해보아도 의사들의 진단은 한결같았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엄마의 노력에도 아이의 증상에 차도가 없자 이번엔 고모들이 나섰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온 집안에 매운 내가 진동했다. 엄마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열심히 고춧가루를 볶고 있었다. 희란을 아프게 하는 귀신을 쫓아준다며 고모들이 어느 용한 점집에서 받아온 처방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작전도 실패였다.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목이 쓰리도록 기침만 했을 뿐 그녀는 여전히 아팠다.


 고춧가루 처방이 효험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며칠 후 희란은 마당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동네가 떠나가라 울리는 풍악소리에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전립을 쓰고 검무복을 입은 사람이 마당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진한 화장을 한 무당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머리 위로 하얀 천이 펄럭였다. 홀로 다른 차원에 앉아있는 듯 하얀 천 위로 비쳐 보이는 파란 하늘만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무당이 입으로 뿜어대는 막걸리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 소란함의 한 복판에서 희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모들의 이번 처방은 성공이었다. 두통은 사라졌고 더 이상 눈이 부시거나 시야가 흐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어린 소녀가 감당하게 될 끔찍한 부작용을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아이는 낮에도 밤에도 잠을 자려고 눕기만 하면 환청과 환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들리는 거 알아. 할아버지도 모시고 왔어. 우리 얘기 좀 들어줘.”

          자려고 누운 희란에게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말을 걸어올 때면 목과 어깨를 타고 한기가 느껴지며 온 몸이 굳어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다. 주방에서 엄마가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엄마를 부르고 싶어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등을 돌리고 벽을 바라보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똑바로 누워서 자는 날이면 천장에서 풀어헤친 머리카락 늘어트리고 그녀를 향해 내려오는 얼굴과 마주치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기이한 현상은 잠을 자려고 누울 때만 일어나는 환청이나 환상만이 아니었다. 낮에 홀로 집에 있으면 텔레비전이 저절로 켜지는 일이 많았다. 유선전화의 스피커폰이 켜지고 다이얼이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론가 전화가 걸어지기도 했다. 종료 버튼을 눌러도 코드를 뽑을 때까지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희란은 낮에도 혼자 집에 있는 것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언니~ 언니~.”

       “어…응…? 왜 그래 란아?”

        잠에 취한 선배 언니가 눈을 감은 채 대답한다.

       “언니… 정말 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

       “하아… 진짜… 뭐가 무섭다고 그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서는 저녁에 물조차 편히 마실 수 없었다. 밤에 화장실을 가려면 잠든 선배 언니나 친구를 깨워야 했다. 커다란 기숙사에는 희란에게 말을 걸어오는 더 수많은 존재들이 있었다. 벽 쪽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있어도 그들은 벽과 문을 통과해 들어오고 나가며 떠들어댔다. 아무 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두 세계에 한쪽씩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스윽… 척. 스윽… 척 스윽… 척’

       잠결에 뭔가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희란은 눈을 뜨지 말아야 했다. 친구들과 마신 술 때문이었을까? 무심코 눈을 떴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사극에서나 본 조선시대 죄인처럼 목에 긴 칼을 차고 머리를 풀어헤친 두 남자. 퍼런 얼굴 위로 퀭하게 달린 시커먼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개라도 맞은 듯 침대에서 튕겨져 나와 그대로 기절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입에 넣어 준 청심환 삼키고 정신을 차렸다. 단 하루도 불을 끄고 편히 잘 수 없는 공포영화급 일상 속에서도 희란의 삶은 계속되었다.





 영문학과를 졸업한 희란은 영어권 국가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혼자 있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던 그녀에게 유학은 큰 결심이 필요했다. 당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영어학원 동료 스콧은 호주 출신이었다. 그가 들려준 시드니는 환하고 따뜻한 나라였다. 시드니에서 유학 중이던 그녀의 절친도 시드니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라며 호주행을 권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 보다 친한 친구가 있는 곳, 어둡거나 음습하지 않고 환하고 따뜻한 곳. 호주가 어쩐지 자신에게 딱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드니에 도착한 지 삼일 째 되던 날 돌아가신 할머니 꿈을 꾼 것이다.

 

       “괜찮다… 아가… 이제 괜찮아.”

      그날 이후 희란은 자려고 누워도 더 이상 이상한 것들이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고 밤에 누구도 깨우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 있다. 똑바로 누워서 잠을 청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꿀 수 있다는 건 환상적인 일이었다. 타는 듯한 햇살을 가진 이 땅의 밝은 기운이 희란을 변화시킨 것인지, 꿈에서 본 할머니가 손녀딸에게 주신 선물인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할머니가 한 번 더 꿈에 찾아와 주시길 기다린다. 다시 만나면 따뜻하게 안아드릴 터였다. 희란은 오늘 밤도 반듯하게 천장을 보고 누워 잠자리에 든다. 어떤 근사한 꿈을 꾸게 될지 설레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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