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日
이 나이에 가슴 뛰는 이메일을 받았다고 해서 부러움을 받을 일이 아니다. 매년 이 맘 때가 되어 도착하는 이메일 제목을 보면 함께 가슴이 뛸 사람이 제법 많을 수도 있다.
-공동 인증서 갱신(기간 연장) 안내-
공동 인증서로 이름을 바꿔봤자 속지 않아.. 공인인증서 갱신 메일에 두근두근. 1년의 하루 정도는 이 번거로운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걸 인정은 하고 있다. 그래도 단추는 한 번 어긋나게 끼기 시작하면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공인인증서와의 관계는 영국에서 겪었던 일로 지금껏 불편하게 남아있다.
학기가 시작되고 몇 개월 만에 한국 계좌에서 영국 계좌로 생활비를 해외송금을 하려는 참이었다. 아뿔싸, 공인인증을 갱신해두지 않아서 만료가 되어있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는 것으로 일이 시작되었다. 지갑에 돈이 똑 떨어져 있는 상태여서 송금을 못하면 당장 마트를 갈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스콘이 너무 먹고 싶어서 송금을 하면 당장 밀가루와 버터, 더블 크림을 사러 갈 작정이었다. 주머니 사정을 체크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짜증이 스멀 올라왔다.
그렇게 공인인증 재발급과 등록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인증서를 다시 받으려니 휴대폰 인증을 받아야 했다. 다운로드할 프로그램이 어찌나 많은지 기다리며 차를 한 잔 타 왔다.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한국에서 쓰던 심카드는 일시정지 중이어서 아이핀을 발급받아 은행 PC 아이디로 접속해 등록할 차례. 음? 이중 보안이 걸려있었다. 걱정병이 있는 나는 출국 전, 당시 은행에서 발표한 신기술인 지정 단말기 서비스를 신청해서 지정된 노트북과 휴대폰으로만 인증, 이체업무를 하도록 지정을 해두었다. 지정한 노트북은 해외 IP라서 그런지 자꾸 오류가 났다. 그럼 남은 건 휴대폰 인증. 아까 적었지만 휴대폰은 일시정지 중이다. 그럼 지정 단말기 서비스를 해지하고 인증 방법을 바꾸려면?... 휴대폰 인증이 필요하다. 가슴에 주먹만 한 돌덩이가 명치를 턱-강타하는 느낌을 받았다. 온몸에 열이 화끈 돌고서는 난데없이 가슴이 뛰었다. 아, 이런 게 홧병인가.
일시정지는 1년에 2번 가능한 데, 보안번호 문자 하나 받겠다고 결국 일시정지를 풀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휴대폰이 없으면 나를 인증할 방법이 없겠다 싶다. (가는 곳마다 전화나 QR체크인을 해야 하는 요즘은 더 그렇다.) 벼랑에 몰리면 참고만 있는 성격이 아닌데, 밖에 날씨까지 너무 좋아서 더 화가 났다. 기어이 이 날씨 좋은 날 작은 기숙사 방에 들어 앉히는 최악의 사용자 경험을 설계한 전문가들에게 화가 났고, 쓸데없이 보안에 너무 신경 써서 제 손을 옭아맨 과거의 나에게 화가 났었다.
메일에 쓰인 날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캘린더에 일정 알림을 해둔다. 시간에 여유를 두고 설정해두면 좋은데 일정은 만료일 이틀 전으로 맞춰둔다.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그래도 하루 정도는 여유 있게.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놔야 하는 거지?”
“전 재산이 왔다 갔다 하는데 쉽게 만들어서야 되겠어?”
“아, 왜 이렇게 하기 싫은 거지.. 정말.”
“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거고, 좋게 말하면 시간의 효용을 생각하는 거겠지.”
“이렇든 저렇든 너무 싫어.”
“한 달 남았다며, 빨리해놔, 나중에 또 마음고생 말고. 갱신은 쉬워.”
나는 남편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했다. 쉬워봤자지. 이건
마음속에 다락방을 만들어서 몰아넣고 잠가두고 싶은 그런 일이라고! 그러나 결국은 내 손으로 다시 문을 열고 내보내 줘야 하는 일. 마음의 준비가 한 달은 필요한, 남들에게만 별일 아닌 ‘별일’이 있다. 만료일 D-30. 공인인증서든, 공동 인증서든 제발 전문가들이 조금만 더 힘 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