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판 글로벌 크리스마스 보내기

by 청두유

한국에서 살 때 “만약 내가 해외에서 산다면?”이라는 가정을 두고 외국 생활을 상상한 적이 많다. 보통은 새로운 아이템을 계속 상상하기보다는 한 가지 꽂힌 상상을 계속하곤 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을 꼽자면 전 세계 각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모여 살며 시끌벅적한 나날을 보내겠지 라는 상상이었다. 한국에서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데, 친구들끼리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와인 한두 잔에 살짝 취해 껴안으며 인증샷을 남기는 그런 삶. 나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런 삶”은 여러 행운이 겹쳐야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줍음이 많고 낯가리는 내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거기에 코로나 까지 합해지니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만나고 서로를 집에 초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미국 시트콤에서나 볼 법한 왁자지껄한 지구촌 일상은 없지만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라는 12월의 긴 휴가를 앞두고 잠깐이나마 체험판을 해볼 기회가 생겼다. 남자친구가 사는 셰어 하우스의 플랫 메이트들과 음식을 함께 먹고 영화를 보며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가족들 또는 친구들과 보내겠다고 한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각자 어떤 메뉴를 만들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요리를 못하는 친구들은 술과 음료 그리고 디저트를 담당하기로 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요리는 자연스럽게 커플들의 차지가 되었다. 대니와 아지타는 양고기 바비큐와 채소 구이를 준비했고, 나와 남자친구는 한국음식, 터키음식을 각각 준비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드는 적이 처음이라 어떤 메뉴를 선정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여러 가지 후보군 중에서 결국 선택한 것은 김치찜이었다. 매일 김치를 피클처럼 먹는 김치 매니아 대니에게 김치를 활용한 새로운 요리를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채식을 하는 줄리아와 나는 두부김치찜을, 육식을 하는 다른 사람들은 돼지 김치찜을 먹을 수 있도록 따로 음식을 준비했다.

요리를 빨리 준비하고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기 위한 옷을 입고 꽃단장도 해보려 했지만 꿈은 야무졌다. 생각만큼 푹 익어주지 않는 김치찜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밥 먹기 직전이 되어서야 다른 친구들이 가져온 다소 작은 산타 모자를 머리 위에 살짝 올려놓을 수 있었다.

채식을 배려해서 음식도 따로, 소스도 따로 준비해준 사람들 덕분에 메뉴에 구애받지 않고 푸짐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큰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들은 연말까지 냉장고에 자리 잡아서 우리의 식사를 한 끼씩 해결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맥주와 간단한 과자들을 놓고 영화를 봤다. 어떤 영화를 보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선택한 카테고리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복잡한 서스펜스나 잔인한 스릴러를 보기에는 너무도 따뜻한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에게도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 중 대다수가 보지 않은 “고양이의 보은”이 최종적으로 선택되어 우리의 크리스마스를 책임지게 되었다. 영화를 다 보고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일을 마친 토니가 돌아왔고, 가볍게 맥주 한 잔씩 걸치며 우리의 크리스마스를 마무리했다.


셰어하우스에 사는 플랫 메이트들은 대부분 영국인이지만 가족과 떨어져 다른 도시에 살고 있었다. 원래 인생은 외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해 조금 외로워지기도 할 터.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끼리 식사를 하며 크리스마스에는 서로의 식구(食口)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