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는 런던에 위치한 킹스 크로스 역 9와 3/4 정거장에서 호그와트 기숙사 학교로 넘어갔다. 옛 런던 뒷골목에 위치해 있을 법한 상점에서 해리와 그의 친구들, 론 그리고 헤르미온느는 눈을 반짝이며 지팡이와 개구리 모양 초콜릿, 기상천외한 맛의 젤리빈을 사곤 했다. 런던에 가면 해리포터를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첫 영국 여행에서 런던에 위치한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방문하고 나서 못내 아쉬웠다. 정확하게 무엇이 아쉬웠냐고 하면 대답하기 어려웠으나 영화에서 본 장면 그대로인 장소들을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도 무언가 부족했다. 그 마음의 이유를 몇 년 뒤 영국에 와서야 알았다.
해리포터의 도시는 런던이 아니라 에든버러였기 때문이었다.
해리포터를 집필한 작가 J.K. 롤링은 스코틀랜드 지역 도시 중 하나인 에든버러의 어느 카페에서 해리포터를 썼다. 에든버러 성을 바라보며 공동묘지, 학교 등을 배경으로 삼고 영감을 받아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이 에든버러 곳곳을 둘러보며 해리포터 성지 순례를 하곤 한다. 유명한 관광지를 도장깨기 하는 여행 스타일은 이제 싫기에 여기저기 다 둘러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스튜디오에서는 느끼지 못한 그 아쉬운 한 구석, 해리포터의 감성 한 스푼 느끼고 싶어서 한 번은 에든버러에 가보고 싶었다.
뉴캐슬은 잉글랜드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기차 타고 한두 시간이면 에든버러에 갈 수 있었다. 가까울수록 언제든지 갈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고 어영부영 영국에서의 1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영국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에든버러를 방문할 기회를 잡았다. 에든버러에서 출발하여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 티켓을 사기로 했고, 출국 전날 아침 에든버러에 가서 도시를 구경하고 다음날 출국하는 아름다운 일정을 짰다.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은 잉글랜드 지역의 상징이다. 뉴캐슬은 산업혁명으로 부흥한 도시라서 도시 계획에 맞춰서 자로 대고 그은 듯 집을 지었기에 어딜 가나 붉은 벽돌집이 구획에 맞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잉글랜드의 끝자락 뉴캐슬에서 스코틀랜드로 기차를 타고 올라가면 붉은 벽돌이 점점 사라지고 회색 벽돌집이 많아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따뜻한 색을 선호하여 붉은 벽돌이 더 예쁠 거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스코틀랜드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살짝 푸른기마저 감도는 잿빛 하늘에 어울리는 회색 건물들이 이곳의 분위기를 신비롭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에든버러에 도착할 무렵, 남자친구는 내게 한 가지 약속을 해달라고 했다.
"기차역에서 나가면 무조건 왼쪽을 보지 않고 숙소까지 걷는 거야."
에든버러에 자주 왔던 남자친구는 20kg 넘는 캐리어와 10kg 넘는 백팩을 메고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내가 에든버러의 처음을 소진해버리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가장 예쁜 광경을 기대감 가득한 상태에서 보여주고 싶은 그 마음을 알기에 기차역 밖으로 나서서 최대한 왼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는 낯선 도시를 걸으며 단 한순간도 왼쪽을 쳐다보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에든버러의 풍경이 20분은 더 걸어가야 하는 이 길에 활력제, 홍삼이 되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보자.'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순간, 왜 그가 왼쪽을 보지 말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서구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은은하게 넘실거리는 안개 사이로 보이는 절벽과 그 위에 솟아 있는 고딕 양식의 건물들. 날렵한 선들이 모여 위엄 있는 면이 되어 도시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에든버러는 로망처럼 품위 있었고, 소문처럼 아름다웠다. 절벽 위에 위치한 에든버러 성을 중심으로 올드 타운이 있고, 공원을 사이에 두고 길을 건너면 뉴 타운이 있었다. 우리가 보았던 멋있는 곳은 올드 타운이었고 맞은편이 뉴 타운이었다. 유서 깊은 도시들의 뉴타운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곳은 올드 타운만큼 고고한 분위기의 건물들이 없었다. 하지만 뉴타운에서 창문을 열면 올드 타운이 보인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뉴타운의 가치는 충분했다. 이곳에 살고 싶어졌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올드 타운으로 걸어갔다.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코로나를 1년 반째 겪으며,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전히 일하고 있는 친구들은 여행을 그리워하며 다른 취미를 찾지 못해 헤매는 마음으로 인한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행히 회사를 잠시 떠나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이미 시간이 풍요롭고 넘치는 슬로 라이프를 살고 있었기에, 여행이 예전만큼 그립지 않았다. ‘나, 여행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어!’라고 생각했으나, 에든버러에 오는 순간 여행자 모드가 작동했다.
지금 나는 살던 곳, 뉴캐슬을 떠나왔다. 그리고 곧 이곳, 에든버러를 떠나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곳을 탐험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굳이 무언가를 보기 위해 종종걸음을 하기보다는 올드 타운과 뉴 타운 중간의 공원에 자리 잡고 앉아서 사람 구경, 도시 분위기 음미에 들어갔다. 뿌연 안개를 평소에 좋아하지 않았는데 안개가 만들어낸 약간의 습함과 스산함이 공원의 활기참과 어울려서 한층 따뜻해진 기분이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다람쥐가 피크닉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음식을 얻어먹고, 갈매기와 비둘기가 기회를 보다가 사람들이 먹던 음식을 낚아채 가기도 했다. 아무도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고 해프닝을 웃고 넘겼다.
주요 관광지가 밀집한 올드타운은 크기가 크지 않아서 1시간이면 에든버러 도시를 대부분 둘러볼 수 있다. 도시를 둘러보다가 질린 사람들은 갤러리, 뮤지엄을 가거나 근교를 둘러보는 일정을 짜곤 한다. 이곳은 그런 면에서 여행보다는 살기에 좋은 도시였다. 언제나 관광객이 넘쳐나는 도시라서 주거, 음식 등 전반적인 생활 물가가 비싼 곳이었지만, 살면서 더 행복해질 도시로서의 여건이 충분했다. 중세 시대 어디쯤으로 넘어온 듯한 건물들이 자아내는 분위기, 도시 가운데에 크게 위치한 공원이 만들어낸 녹음, 조깅하고 피크닉 하는 사람들, 겁 없이 아이들과 뛰노는 다람쥐, 사람들에게 음식을 얻어먹는 갈매기들까지. 번화할 만큼 번화하고, 잔잔할 만큼 또 잔잔한 이곳은 균형이 잘 잡힌 도시였다. 영국에서의 생활을 매듭짓는 마무리 도시로 이렇게 적절한 도시가 있을까 싶다. 살면서 아쉽고 서운하기도 했던 마음은 씻겨져 나가면서 언젠가 다시 오고 싶고, 멀리서 그리워할 것만 같은 에든버러. 과하게 내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이 도시는 참 기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