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생활 중 새로운 일 한 가지 시도해보기
석사를 시작하기 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석사를 하면서 엄청난 것들을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이것저것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 나 역시 To-do list 만들기에 열 올리다가, 그러다 가기도 전에 지친다는 경험자들의 만류로 이내 정신을 차렸다.
머무는 장소, 나라를 바꾼다고 180도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영국에 가면 새로운 인간관계와 환경에서 그동안 생각만 하고 하지 못했던 일을 한 가지는 꼭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는데, 바로 비건 지향이다.
2019년 여름, 비건 페스티벌에 다녀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보고 나서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비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무작정 시작한 터라 회사 생활과 유연하게 병행하지 못했고, 결국 두 달만에 페스코 베지테리언(유제품, 계란, 해산물까지 섭취하는 채식주의자)으로 전향했다.
1년 가까이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하면서 비건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오던 중, 한국보다 비건 제품이나 비건/비건 옵션 식당이 보편적인 영국에서라면 비건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특별히 사교 활동을 할 수 없는 코로나 시대의 유학생활은 더더욱 비건을 도전하기에 최적의 기회로 보였다.
그렇게 2020년 10월부터 비건을 지향해보기로 결심했다.
영국은 비건 사이에서 천국이라고 불릴 만큼 관련 인프라가 풍부하다.
두유 외에 아몬드유, 오트밀유, 캐슈너트유, 헤이즐넛유, 라이스유 등 다양한 식물성 우유와, 비건 소시지, 비건 패티, 비건 너겟 등 비건 식재료를 어느 마트에 가든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뉴캐슬이 런던이나 맨체스터와 같은 대도시가 아닌데도 비건 식당이 꽤 많고 6~70% 정도의 식당에 비건 옵션이 있어서 비교적 무리 없이 논비건인 사람들과 외식을 즐길 수 있다.
또 영국은 다른 나라보다 비건을 하기에 마음이 편하다.
한국에서 한두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나 블로그 이웃을 제외하고는 비건은 커녕 채식주의자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는데, 영국에 와서는 채식주의자 및 비건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영국에 비건이 많기 때문에 더 마음이 편하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에서 채식을 한다고 말하면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고 건강이 괜찮냐는 친절 섞인 우려를 받아야만 했다. 여기까지는 호기심이나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식물은 안 불쌍해?” 식의 공격을 하거나 “그럼 나는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야?” 식의 불편함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에 와서는 왜 비건이 되었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거의 없었고 철저히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해주는 걸 느꼈다.
비건 지향은 온라인 수업의 연속으로 자칫 무료했을 유학생활에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주었다. 바로 비건 제품 구경 및 체험이다. 마트에 갈 때마다 비건 코너에서 떠나지 못하고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특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스낵 코너에서 긴 시간 머무르며 맛있어 보이는 과자를 신중하게 하나씩 골라서 맛보며 나만의 최애를 뽑기 위한 경쟁을 펼친다. 특히 비건 젤리를 좋아해서 종류별로 먹어보는 재미에 빠졌다.
현재까지의 베스트 스낵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오레오다. 한국에 유통되는 오레오는 비건이 아니라서 먹을 수가 없는데, 외국에서 생산되는 오레오는 비건이라서 즐겨 먹는다.
스낵 외에 식재료도 하나씩 사서 시도해보았다. 비건 치즈, 비건 소시지, 비건 패티, 비건 오리고기, 콩고기 등 활용할 수 있는 식재료들이 많았다. 아쉬운 점은 채식을 하기 전에도 소시지, 햄, 버거 등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건 식재료를 즐겨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도전 끝에 가장 최애 제품인 비건 오리를 발견해서 떨어질 일 없이 냉동실에 꾸준히 채워놓는다.
결국 지금은 두부, 채소, 버섯 등을 활용한 요리에 정착해가고 있다. 인공적인 비건 제품보다 활용도 높은 채소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입맛에도 잘 맞기 때문이다. 버섯, 다시마 육수를 내서 만든 떡국, 된장국, 메밀소바는 일주일에 한 번씩 먹는 친근한 메뉴이다.
그 외에도 요즘은 미역 파스타, 오징어 없는 볶음 국수 등에 도전하며 어떻게 하면 채소들을 활용해서 맛있는 신메뉴를 만들어볼까 고민하고 있다.
채소만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미션을 수행하는게 뿌듯하고 즐겁다.
비건을 위한 많은 것이 갖춰진 이곳이 정말 비건의 천국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가 천국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영국이어서가 아니라, 신념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가 어딘지는 더 이상 상관이 없어졌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신념을 실천할 수 있는 이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