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라는데 당사자는 불쾌한 인종차별

친절한 듯 숨겨진 인종차별주의자(Hidden racist)

by 청두유

거리에서 만나는 인종차별 주의자들(지난 포스팅 참조) 은 혐오를 대놓고 드러내거나 캣콜링과 같은 성희롱을 서슴지 않는다. 악의적인 의도가 다분하니 단칼에 무시하면 그만이다.


진짜 골치 아픈건 숨겨진 인종차별주의자(Hidden racist)들인데,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인종차별 발언을 하거나, 친근한 태도로 은근히 차별과 비하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친절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차별과 그로 인한 상대방의 불편함이 희석되곤 한다. 게다가 대부분 일면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주치기 때문에 불쾌함을 바로 드러내지 못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곱씹어보다가 제대로 말할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적절한 예시를 만났다. 셰어하우스 위층에 새로 입주한 영국인 할아버지로, 뭔가 찝찝하면서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그는 늘 8시 즈음 내려와서 말을 건넸다.

“지금 한국 시간으로 오후라서 일찍 일어나는구나. 하하하하”


늦은 오후 요리를 하고 있으면 다가와서 또 말을 건넸다.

“졸리지 않니? 너네 시간으로 지금 새벽이잖니. 하하하하”


그냥 농담으로 넘기기에는 아이에게 우쭈쭈 장난을 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이 걸렸다. 이 곳에 놀러 온 여행객이 아니라, 몇 개월째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시차 이야기를 하며 이방인임을 주지 시켰다. 듣다 못한 남자친구가 웃으며 “시차는 하루 이틀이면 다 적응되는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적응하는데 오래 걸렸나 봐?”라고 그의 말이 이상하다는 듯 받아치자, 그는 과장되게 웃으면서 “농담”이라며 남자친구의 어깨를 주먹으로 힘주어 쳤다.


크고 작은 “농담”들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는데, 너네 한국인들은 살아있는 낙지를 그냥 입에 막 집어 넣는다는데 너도 먹어봤냐는 질문은 놀랍지도 않았다. 한국 사람과 캄보디아 사람 구분하기 어려운거 아니냐는 저의를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기도 하고, 갑자기 영어 실력을 언급하기까지 했다.


“영국에 온 지 4개월밖에 안되었는데, 영어를 꽤 잘하는구나?”


얼핏 들으면 칭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뉘앙스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상함을 감지한 이후 대화를 최대한 피했기 때문에 진짜 영어 실력에 감탄했거나 칭찬을 해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온 아시아인이 영어를 하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하다는 듯한 태도는 자신을 높은 위치에 두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계급의식이 전제된 차별이었다.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은 전혀 가까운 사이가 아님에도 자꾸 물리적 접촉을 시도한다는 점에서였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와 이야기를 할 때에는 내 어깨나 팔뚝을 만지곤 했다. 친근함을 나타내는 듯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상대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개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비하가 깔려 있었다. 설령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해도 개인의 공간, 각자의 사회적 거리를 중시하는 이 곳 문화를 고려했을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불편하니 그만하라고 말해야지 다짐했지만 자꾸 이 감정이 정당한지를 판단하려고 하는 나 자신을 알아챘다. 혹시 정말 몰라서 그런 실수를 하는 건 아닐까 그의 행동에 변명거리를 갖다 붙이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당신의 행동은 명백한 인종차별적인 행동이라고, 그래서 불쾌함을 느낀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서 어떻게든 그 상황을 피해보려고 애쓰는 것만 같았다.


피해자가 느낀 불쾌한 감정은 검열당할 필요도, 정당함을 증명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가해자의 의도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상대가 기분이 나빴다면 행동을 멈추고 사과를 해야 한다. 잘못된 행동인지 모른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정말 몰랐다면 그때라도 배우고 제대로 사과해야한다. 이 당연한 진리가 사회에서 지켜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상처 받기 싫은 마음에 자꾸 현실을 왜곡하려는 내 모습에 어쩐지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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