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5시면 기상을 한다. 예전에는 알람을 두세 개 해놓아도 일어나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어느덧 이제 알람 없이도 눈을 뜨는 그런 나이가 되었나 싶다.
눈을 뜨면 물을 마시고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강아지 루이가 자고 있는 방을 들여다본다. 루이는 나의 서재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 밤사이 루이가 해놓은 '일들'을 처리해야 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바로 환기를 한다. 강아지는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나와 마루를 돌아다닌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일상의 아침 인사를 나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어제 미국 시장의 흐름을 확인하는 것이다. 요즘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미국 AI관련 반도체 ETF와 단기채권 ETF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나에게 '부자의 시간'을 가져다줄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 항상 공부한다. 나에게 또 다른 교육의 시간이 흐르는 셈이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새벽, 관련 뉴스를 살피고 유튜브를 통해 이런저런 인사이트를 듣는다. 트럼프가 또 사고를 쳤는지, 어디서 전쟁이 났는지 확인하며 오늘 매도나 매수를 할지 고민해 본다. 요즘은 매매를 최소화하려 노력 중이다. 아마 일 년 정도 후면 나의 포트폴리오는 건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집사람은 보통 6시에서 7시 사이에 눈을 뜬다. 안방에 있는 나의 최애 안마기 세라젬을 쓰려면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집사람이 나오면 나는 루이와 함께 쏜살같이 안방으로 들어가 환기를 하고, 30분 정도 안마를 받는다. 루이는 항상 내 허벅지 사이에 머리를 두고 따뜻한 안마기 위에서 다시 단잠에 빠진다. 이것이 우리의 거를 수 없는 매일의 루틴이다.
7시 즈음에는 아침을 먹는다. 오래전부터 주문해 먹는 국산 앉은뱅이 밀 통밀빵 두 조각, 유기농 블루베리와 호두, 그리고 커피 한 잔. 블루베리와 호두는 미국산을 고집하고, 스페인산 올리브유에 이탈리아산 발사믹 식초를 곁들여 빵을 찍어 먹는 것을 즐긴다. 최근 삿포로에서 사 온 저염 버터나 설탕 없는 호주산 피넛버터를 바르기도 한다. 설탕 없는 식탁을 추구하면서도 캐나다산 메이플 시럽은 늘 곁들이니 참 아이러니하지만, 이것이 나의 취향이다. 커피는 더 이상 밖에서 사 먹지 않는다. 집에서 스타벅스 캡슐 서너 개에 유기농 우유를 넣어 만든 라떼가 웬만한 커피숍보다 맛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스타벅스나 커피빈에 가는 게 일과였는데, 어느 순간 그런 자리가 불편해졌다. 이제는 집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가장 편하다.
우리는 식료품의 대부분을 오아시스나 마켓컬리 새벽 배송으로 해결한다. 이틀에 한 번꼴로 문 앞에 박스가 쌓인다. 오아시스의 유기농 제품들은 품질과 가격 면에서 항상 감사하고, 컬리에서는 네니아 군만두 같은 나만의 '원픽'들을 구매한다. 은퇴 후 가장 큰 변화는 사람을 만날 이유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 올 곳도 없다. 예전에는 그렇게도 바랐던 일이다.
어떤 이는 이런 비대면의 삶이 비인간적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인간과의 대면이 줄어드는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AI와의 소통은 늘고 타인과의 통화는 줄어드는 세상. 누군가는 외롭겠지만, 나에게 이 세상은 더없이 편안하다.
오전 9시나 10시가 되면 집 앞 요가원으로 향한다. 일주일에 5일, 빡센 빈야사 수련을 하고 나면 입에서 단내가 난다. 20년 직장 생활이 남긴 거북목과 굽은 어깨를 펴내는 일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돌아오는 길의 후련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 시간을 잘 쓰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요가원의 유일한 남자인 경우가 많아 처음엔 어색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만성적이던 등과 허리의 통증이 사라진 것을 보며 이제는 빠질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점심은 나에게 큰 기쁨이자 여유다. 직장인 시절 쫓기듯 먹던 밥이 아니다. 지난 6개월간 저녁을 굶거나 토마토로 때우며 의도치 않은 간헐적 단식을 해왔기에 점심은 더 중요하다. 자주 해 먹는 메뉴는 통밀 파스타다. 무항생제 왕새우와 마늘을 왕창 넣고 올리브유와 후추로 볶아내면 끝이다. 배가 너무 고픈 날엔 큰 접시 가득 먹고 한강을 걷는다.
당뇨 전단계 수치를 십여 년째 유지 중이라 점심 후 산책은 본능에 가깝다. 날씨가 좋으면 한강으로, 미세먼지가 심하면 집 앞 백화점으로 향한다. 미세먼지 없는 날은 신의 축복 같지만, 심한 날은 중국과 전쟁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증오가 차오르기도 한다.
은퇴 후 저녁 약속은 거의 잡지 않는다. 어쩌다 연락이 오면 기쁜 마음으로 나가 형님들에게 대접받기도 하고, 호텔 중식당이나 횟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남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듣는다. 이런 만남은 일상의 감초 같다. 더 이상 무언가를 얻기 위한 가식적인 영업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참 기쁘다. 직장에서의 영향력으로 맺어진 관계는 은퇴와 동시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생은 그렇게 필요한 것들로 농축되어 가고, 그 농축된 결과가 지금 나의 하루다.
요즘은 다음 삶의 공간을 고민하며 긴 호흡의 시간을 갖고 있다. 지금 사는 곳은 어느덧 매수한 지 10년이 흘러 재건축을 앞두고 있고, 살인적인 주차난과 녹물에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노후를 위해 수익을 인식하고 미친 보유세에 대응하려면 움직여야 한다. 부동산은 세금으로 시작해서 세금으로 끝난다. 10년 전 나의 선택이 소중한 보금자리를 선물했듯, 이제 다시 '우아하게 살 수 있는 동네'를 찾아 구경 다닌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그건 부자가 아니라 그저 돈 많은 사람일 뿐이다. 요즘 다음 집을 찾는데 재미가 들었다. 물론 그동안 또 비 이성적인 규제로 인해 집값은 엄청나게 올랐다. 이미 자산을 구축한 세대에게는 갈아타기 하는데 무리가 없지만 새롭게 진입을 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재앙이다.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모든 정책과 규제는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역사는 증명하고 있는데 한심한 인간들을 했던 실수를 반복한다.
공간을 옮겨 잉여 현금을 만들고 미국 ETF 투자를 늘리면 나의 금융 소득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서두를 것 없다. 젊은 시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저질렀던 실수들이 이제는 귀한 교육이 되었다. 이제는 천천히 움직일 때다. 내 운명의 대운의 흐름은 그렇게 단단히 흘러간다.
나중에 현금 흐름이 더 풍부해지면 부리고 싶은 사치가 있다. 습하고 더운 한국의 여름을 피해 6월부터 9월까지 호주에서 3달을 사는 것이다. 50이 넘으니 이코노미를 타고 10시간 넘게 여행하는 건 더 이상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즈니스 항공권을 구매해서 편안한 좌석과 5성급 좋은 호텔이 보장되지 않는 고생스러운 여행은 안 가느니만 못하다.
사람마다 돈을 쓰는 곳은 다르다. 우리 집은 집사람이 자동차에 목숨을 건다. 집이 없을 때도 독일산 유명 브랜드의 차를 탔고, 지금도 소득 수준보다 높은 차를 탄다. 누군가는 욕할지 모르지만, 본인이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건 선택의 문제다. 반면 나는 해외에서의 유랑과 공부에 돈을 썼다.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비싼 월세를 감당하며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녔다. 남들은 사치라 했지만, 나에게 그 공간과 경험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집사람에게 슈퍼카가 허영이라면 나에게는 도쿄의 박사학위가 허영일 수 있다. 부자는 무조건 아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한다. 내가 원하는 시간과 공간을 누릴 수 있다면 돈은 그 수단으로써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다.
저녁 산책 겸 백화점에 들러 품질 좋은 파프리카나 옥수수를 사 들고 돌아오면 하루가 저문다. 백화점 식품관이 대부분 비싸다고 생각하겠지만 은근히 세일도 많이 하고 좋은 품질의 제품을 좋은 가격에 살 수 있는 행운을 선물 해주기도 한다. 저년 9시 근처, 어떤 날은 8시만 넘어도 우리는 안방으로 들어가 책을 보다가 잠든다. 책 읽는 시간은 30분을 넘기기 어렵다. 일찍 자는 것이 집안의 가풍이 되었다. 루이도 알아서 제 방으로 들어간다. 9시 이전에 자야 다음 날 컨디션이 좋다. 딱히 대단한 일을 할 컨디션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게 평온하게 하루를 닫는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5시, 어김없이 또 다른 부자의 시간이 눈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