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과 첩보영화
회색 하늘 아래 베를린의 묘한 공간적 분위기에 몽롱해져 있을 때였다. 문득 맨 프롬 엉클이라는 가이 리치의 영화가 생각났다. 이 영화는 스파이 첩보물로서 1960년대 냉전 시기인 베를린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적잖이 이 영화 - 가이 리치는 내 쪽에서 무척이나 좋아하는 비주얼메이커 감독이다. 역시나 스타일리시한 편집이 압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든 것이 완벽할 순 없듯이, 영화의 밀도는 떨어진다 - 가 떠올랐다. 영화라는 것도 사실 감독이 누구인지. 또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어떠한 사상을 가졌는지,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러한 작업이 탄생했는지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면 영화에 대한 생각, 표현 방법, 느낌에 대한 자세가 견고해지고 깊어진다고 믿으니까.
첩보영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영화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내 인생에 가장 처음으로 본 영화는 전쟁 영화였다. 때는 80년대 말이었다. 비록 영화의 제목과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단 둘이 처음으로 간 극장 경험 - 신기하게도 두 번째 영화는 기억한다. 탑 건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는 도무지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었다. 처음으로 들어가본 극장은 네모난 공간이었고 어두컴컴했다. 왜 영화를 어두운 곳에서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주인공은 접이식 의자였다. 사람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실내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노릇한 오징어 냄새가 가득했고 영사기 들아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소음이 한데 섞였다. 갑자기 애국가가 나왔고 장내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뒤이어 ‘대한 늬우스’ 가 상영되어졌다. 그렇게 내 쪽의 극장 첫 경험은 냄새와 함께 어리둥절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아버지는 서부영화와 전쟁영화를 좋아하셨다. 아마도 나의 영화 취향은 나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흘러 내 취향이 확고해질 때 즈음 스릴러와 첩보 영화에 관심이 커졌다. 그중에서도 나는 첩보 영화를 좋아한다. 사실 첩보영화 중 나의 넘버원은 따로 있다. 본 시리즈와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 말 그대로 내 쪽의 취향이다. 그런데 이 둘은 서사 방식이 매우 다르다. 특히 이 후자의 제목은 그 조차도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굉장히 강렬- 사실상 강렬한 영화라기 보단 우아하고 섬세한 영화이다 - 했고, 결국 마음에 훈장처럼 그 길고 복잡한 제목을 단숨에 외워버렸다.
나는 베를린의 역사와 지금의 현실에 관해 궁금증이 커져 갔다. 어쩐지 이 곳에서의 초침이 흐를수록 알고 싶은 욕망도 커져만 갔고, 결국 나는 베를린의 힙하고 아티스틱한 공간을 쫓는 게 아닌 역사와 의식에 관련된 공간과 그 지식을 틈틈이 채워나갔다.
그중 하나가 *체크포인트 찰리였다. 우리식으로 하면 공동경비구역 JSA라고 할 수 있겠다. 정부는 번화가 한 복판에 고스란히 이 검문소를 재현시켰다. 복원된 부스를 비롯하여 몇 가지 조잡한 밀리터리 오브제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 예전 휴고 보스가 만들었던 아이코닉한 독일 군복을 빼입은 남자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포즈를 취해주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퍼포먼스에 참여하려면 일정한 대가가 필요했다. 나는 검문소 주변을 무언가에 홀린 거처럼 서성거렸다. 그와 동시에 어떤 수사적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남자가 들고 있는 성조기와 부스 옆 맥도날드의 로고. 두 사물의 관계에 나만 아이러니를 느꼈던 걸까.
Berlin | Germany | 2016 | ©Hyunwoo Kim
* 역사가 알려주듯이 전쟁이 끝나자, 베를린은 동과 서로 나뉘었다. 그리고 장벽이 지어졌고 장벽을 따라 검문소가 설치되었다. 검문소 부스 하나를 두고 허가받은 이들만 동과 서의 출입이 가능했다. 그중 체크포인트 찰리(찰리는 포네틱 코드식으로 C이다)는 냉전 시대 스파이 영화나 소설에 특별하게 등장하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까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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