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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othing Oct 15. 2023

기억의 변주곡 또는 허구 혹은 거짓말 때로는 슬픔

나는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문득 오래된 노래를 듣는데 가슴이 아팠다. 실은 가슴이 아픈 건지 설렌 건지 구분하지 못하겠다. 납을 두른 심장이 잘게 요동쳤다. 무겁고 이상했다. 명치쯤 뜨거운 물이 지나간 듯 잠깐의 통증이 느껴졌다. 이게 뭐든 간에 이 노래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나는 왜 유독 이 노래에 반응하는가?  


 기억은 범람하는 파도처럼 휩쓸려 교복 입은 과거로 밀려왔다. 교복,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뚜렷하게 기억나는 사건이나 인물이 없었다. 마치 어떤 장면에서 교복 입은 내 모습과 카세트테이프의 외곽선을 따 분리해 놓은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떠올리려 애쓴다. 아마···엉덩이가 반질반질해진 낡은 하의는 자주색 체크무늬였다. 교복의 나는 카세트테이프를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낸다. 작고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가 두루마리 휴지에 둘둘 말려있다. 은밀해 보이는 카세트테이프는 자우림의 연인(戀人) 앨범이었다. 자우림 앨범을 전리품처럼 모았던 기억이 나지만······. 당시에도 카세트테이프는 골동품 취급이었다. 그렇다면 들을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를 왜 들고 다녔는가? 커다란 비밀을 품은 것처럼 꼭꼭 숨겨서는.

 보랏빛 내지가 들은 카세트테이프를 여니 매운 냄새가 났다. 테이프 대신 하얀 담배 몇 개비가 들어있었다. 놀라 고개를 드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입술이 비뚜르게 웃었다. 귀엽다, 너. 아빠 거 훔쳐왔나 보지? 비뚠 입술이 말하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손바닥에 탁탁 쳤다. 끝이 연갈색인 담배 필터를 물어 불을 붙이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가느라단 손가락과 긴 속눈썹이 보였고 우리는 어두컴컴한 노래방에 있었다.

 비뚠 입술은 나를 끈덕지게 쳐다봤다. 나는 카세트테이프에서 흰 담배를 꺼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다. 담배가 파르르르 떨렸다. 숨겨보려 손가락 사이에 힘을 주었지만 이미 피식- 하며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라이터의 부싯돌을 굴려 불을 켜고 보던 대로 필터를 깊게 빨아들인다. 쿨럭쿨럭. 갑자기 터진 기침이 속수무책으로 튀어나왔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비뚠 입술은 말없이 응시한다. 내가 이 과정을 순탄하게 마치길 바란다는 듯이. 흡사 어떤 통과 의례처럼.  나는 결국 담배를 끝까지 피우지 못했고 다시는 비뚠 입술을 정면으로 마주할 일도 없었다. 가끔 그 입술을 올려다볼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얼굴에 손바닥이 닿았고 입술이 찢어졌다.


 또다시 생각한다. 비뚠 입술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때 그 노래를 들었던 게 아니라 단지 테이프 내지를 보았던 건데 이토록 감상적일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아빠 담배를 훔쳐왔던 걸까? 정말로 담배를 피우지 못했을까?

 낡은 기억은 때때로 살을 더 붙이거나 이물을 떼어내 잔존한다. 혹은 기억을 재료 삼아 글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과감하게 변경할 수도 있겠다. 그 글이 일기라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일 테고 소설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 글은 허구일까 진실일까? 범람하는 기억은 변용된 것일까 날 것 그대로 일까? 날 것 그대로라면 하필 왜 이 부분을 기억하는가? 변형된 거라면 왜 하필 담배를 피우는 것일까? 슬픔 또는 흥분의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비뚠 입술을 좋아한 걸까? 그저 무리에서 탈락된 서글픈 이야기인가?


 이야기를 정정해야겠다. 기어코 나는 담배를 끝까지 피웠고 학기 내내 비뚠 입술과 함께 다녔다. 가끔 손가락을 엮어 잡기도 했으며 서로의 어깨에 기대 텅 빈 교정을 바라보았다. 중고 전자 상가에서 구한 마이마이로 자우림 테이프를 들으며 버스를 타기도 했다. 나눠 낀 이어폰 속으로 자우림의 연인 3/3이 흘러나온다. 내게 기대요, 내게 기대요―라는 가삿말이 왠지 슬프다. 그 노래를 들은 다음 날 비뚠 입술은 멀리 전학 갔다. 나는 그때부터 피운 담배를 끊지 못했다. 자우림의 연인 3/3을 들으면 아주아주 행복하고 조금 아련하거나 슬픈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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