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nothing Oct 08. 2023

가을바람이 부는 창문 아래에서는

나는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반팔에서 팔목을 가리는 긴팔 셔츠로 갈아입은 첫날, 은은한 박하향을 가둔 바람이 불었다. 입을 벌려 한 움큼 머금으면 멘톨 담배 맛이 났다. 저절로 눈을 내리 깔게 하는 아침 햇살은 여전했다. 졸음 가득한 버스도 어제와 같았다.  아무도 등교하지 않은 고요한 교정도, 바닥에 탱탱하게 솟은 잡초들도, 쿰쿰한 먼지 냄새가 나는 교실도 그러했다.


 교실 창문을 열었다. 박하향이 쏟아져 들어왔다. 같은 교문을 쓰는 고등학교 선배들이 하나 둘 무거운 어깨를 내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갈맷빛 조끼를 입고 있었고 선배들은 화다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초록에서 갈색으로, 싱그러움에서 버석거림으로, 혹은 엷음에서 진함으로 변태 되는 걸지도 모른다.


 절정기의 낙엽처럼 우수수 몰려드는 선배들 사이에 허리를 꼿꼿이 편 그 언니가 보였다. 두 학교가 공유하는 널따란 운동장에서 점심시간마다 체육복을 입고 땀 흘리던 언니였다.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땀을 흘려서 수업 시간에 졸진 않을지, 속옷까지 젖었을 텐데 찝찝하진 않을지, 배출한 땀만큼 물을 마셔야 하는데 뭘 마시는 법을 본 적이 없었다. 땀을 닦아주고 물을 건네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언니의 갈색은 바짝 말라 떨어지는 이파리의 색보다, 매점 가는 길목에 우직하게 솟은 나무 색과 비슷해 보였다. 언니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창문 밑으로 재빨리 몸을 구부렸다. 옅은 바람에 부대끼는 커튼처럼 심장이 간지러웠다. 이상했다. 고작 바람이 조금 차가워졌을 뿐인데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중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화끈거리는 얼굴, 마른 입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