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ZE3000 SV
* 셰에라자드로부터 콘텐츠 제작 비용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나 다시 돌아갈래
20대 청춘 일부를 앗아갔던 악마의 게임 마비노기의 모바일 버전이자 리메이크 버전이 얼마전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하면 할수록 옛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가운데, 저는 이 게임을 설치하지 않으려 매일 매일 도를 닦는 수행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듯 수년 ~ 수십년 전에 출시된 게임을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꽤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해당 IP의 인지도를 무기삼아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더라도 맨땅에 헤딩하는 위험부담을 줄이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테지요. 이걸 추억팔이라 비난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허나 양쪽 말을 다 들어보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제작사 입장에서는 여러 아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미처 보여주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고, 그 때 내렸던 결정이 지금에 와서 봤을 때는 틀렸다고 판단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바람이 일본의 음향기기 명가 파이널에도 불고 있나 봅니다. 얼마전 리뷰했던 '새로운 D8000'에는 DC라는 수식어가 붙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더니 이번에 출시된 '새로운 ZE3000'에는 SV라는 단어가 붙어 또 완전히 달라졌더라고요.
- ZE3000
전작인 ZE3000 얘기부터 꺼내는 것이 예의겠지요. 22년 8월에 국내에 출시되었으니 3년 약간 못되었습니다. (국내 인증 때문에 겁나게 늦어져서 그렇지 일본에서는 21년에 출시됨) 199,000원이라는 금액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본 사양으로 여겨지던 ANC도, 외부 소음 듣기도, EQ 조절도, 전용 앱도 지원이 되지 않는 오로지 음질 하나에만 몰빵한 제품이었습니다. 제가 작성한 ZE3000 리뷰의 제목을 찾아보니 '본격 음향애호가용 코드리스 이어폰' 이더라고요. 다른 거 다 제끼고 사운드만으로 승부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뒤돌아보면 당시 파이널 측에서 유선 이어폰 / 헤드폰과 다른 '무선 이어폰'이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확실하게 갈피를 못잡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사운드와 기능 양면 모두에서 말이지요.
첫번째로 기능입니다. '순수하게 음질만을 우선하는 무선 이어폰' 이란 ZE3000 정도의 등급에서 먹힐 만한 주장이 아닙니다. 이 정도 금액대의 무선 이어폰에서는 생활 친화적인 속성을 등한시할 수 없습니다. 편의성 때문에 무선을 선택한 만큼 ANC, 외부 소음 듣기, 통화품질, EQ 조절, 넉넉한 재생시간과 같은 무선 특유의 기능들을 완전히 배제하면 안됐다는 거지요.
그런 기능이 하나도 지원되지 않는 주제에 케이스와 이어폰 본체의 크기도 경쟁모델 대비 그다지 작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플래그십 등급이라면 대상이 음향애호가라서 '음질만을 우선한다' 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브랜드 내에서 표준, 기준을 담당하는 3000 모델은 보편타당성이 먼저여야 했습니다.
두번째로 사운드입니다. 무선 이어폰은 내부에 칩셋 + 배터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유선 이어폰과 구조도 다르고 하드웨어 + 소프트웨어 양쪽면에서 튜닝이 가능하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기존의 유선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사운드를 튜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개발팀은 숨이 턱 막혔을 겁니다. 원래 선택지가 많으면 더 어려운 법이니까요.
ZE3000은 파이널 최초의 무선 이어폰이었고, 그에 따라 익숙했던 유선 이어폰 라인업 A시리즈와 E시리즈의 사운드를 6:4~7:3 정도로 적당하게 버무려 완성했습니다. 나름 안전한 길을 선택한 것이고 '파이널의 무선 이어폰'만이 나아갈 별개의 노선은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후 출시된 ZE8000의 사운드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이질적이었지만 하위 모델 ZE3000과 결이 너무나도 달랐거든요. 적어도 한 시리즈 내라면 어느정도 공통된 특성을 보여야 할 텐데, 하급 VS 상급의 차이라고 보기엔 아예 방향성이 다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ZE8000은 파이널이 도달해야할 '무선 이어폰'만의 이상향을 제시했습니다. 유선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었던 경지 말이지요. 나를 감싸는 구 형태의 공간을 8K 해상도로 빼곡히 채우고, 그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헤드룸으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겁니다. 음악을 듣는게 아니라 내가 음악 한복판에 던져져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중독적 상태가 되게 하는 이런 사운드 튜닝은 기존의 모든 이어폰들의 감상법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뭐, 당연하게도 엄청나게 혹평을 받게 되었지요. 어쩔 수 없이 파이널은 이례적으로 빠른 시기에 ZE8000 MK2를 출시했습니다. ZE8000이 가진 높은 이상과 목표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난이도를 확 낮추기로 결정한 겁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파이널의 무선 이어폰 ZE시리즈가 가야할 길이 확정되었고, 길잡이 역할을 해줄 하위 모델 ZE3000의 리메이크가 결정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네요. 이제 본론입니다. ZE3000 SV는 전작 ZE3000이 리부트 되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모조리 다 바뀌었습니다. 디자인과 기능 면에서 '무선 이어폰'다운 편의성이 대폭 강화되었으며, 사운드는 '젊고 친절한 ZE8000 MK2'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ZE3000 SV
1) SV
본사에서 슬쩍 전달해준 정보에 따르면 SV는 Smooth Vocal이라는 의미를 담기도 했고, f-Core의 개량된 버전이기도 하답니다. f-Core는 파이널 기술력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이내믹 드라이버로, A시리즈와 VR시리즈, ZE3000에 공통으로 사용된 바 있지요. SV 버전은 진동판의 직경이 6mm에서 10mm로 크게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착용감에 지장만 없다면 드라이버 크기는 클수록 좋다는 입장입니다.
2) 디자인
충전 케이스와 이어폰 본체의 크기가 절반가량으로 작아졌고, 이어폰 본체는 동그란 모양으로 변경됐습니다. 이전의 ZE3000은 각진 다면체 모양이었고 각 모서리가 귀 내부를 지탱하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방식이 귀가 아프다는 얘기가 종종 보였기 때문에 이것 역시 잘된 변화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f-LINK 포트
또한 이어폰 내외부의 압력 차이를 해소하는 f-LINK 라는 기술을 개선했습니다. ZE3000에서는 노즐을 통해 압력을 조절하는 방식이었는데 SV버전에서는 이어폰 몸체에 직접 포트를 2개 뚫어 더욱 자연스러운 공기의 흐름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무선 이어폰 특성상 방수에 신경써야 하니 외부에 뚫는 것은 불가능하고, 귓구멍을 향하는 안쪽 부분에 뚫려있습니다. 전작대비 저음의 깊이라든가 반응성 면에서 훨씬 좋아진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방수 등급은 전작과 동일한 IPX4)
4) 금액
199,000 -> 159,000원으로 금액이 낮아졌습니다. 사실 ZE8000이 플래그십 치곤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서 그만큼 ZE3000의 금액은 더 낮아야 정상이지 싶었는데 결국 더 낮아졌네요. 앗싸.
5) LDAC 코덱 지원
드디어 최상위 스펙을 지닌 LDAC 코덱을 지원합니다. 그러면서 aptX 코덱이 빠지긴 했는데, 제 경험상 aptX보다는 LDAC의 성능이 우월하니 굳이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안그래도 aptX는 aptX, aptX HD, aptX Adaptive, aptX LL로 분화되어있어 호환되는 코덱을 지원하는지 확인하는 것도 고역입니다. 넷 다 동시에 지원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6) final connect 앱 지원
플래그십 ZE8000에서만 지원되던 앱이 이제 ZE3000 SV에도 지원됩니다. 4종류의 소음 제어, 7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조절 가능한 EQ, 음질과 연결 안정성을 희생시키고 지연율을 낮춘 게이밍 모드, 2대의 기기에 상시 연결 상태로 전환 가능한 멀티포인트 ON/OFF, 그리고 펌웨어 업데이트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7) 소음 제어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 엠비언트 사운드, 윈드 컷, OFF까지 해서 4가지의 변경이 가능합니다. ZE8000 때도 강조한 부분인데 파이널의 소음 제어는 좀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소음 제어를 활성화해도 뭔가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거든요. 물론 회로가 동작하는 만큼 기본적인 사운드에 영향을 주긴 하는데, 위화감이 이 정도로 미미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운드가 왜곡되든 찌그러지든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든 상관할 바 아니고 소음 제어의 강도만 높이면 된다는 접근 방식은 전자기기 브랜드에서나 할 생각입니다. 음향기기 브랜드라면 재생하고 있는 사운드를 최우선으로 보존한 채 아주 조심스럽게 소음 제어를 시도해야 마땅합니다. 이런 점에서 파이널이 모범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 달성 목표
앞서 간단하게 ZE시리즈가 도달해야할 목적지에 대해 소개했었지요. 다시 정리해보자면 음악이 내 눈앞에서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음악 한복판으로 던져지게 되어 차원이 다른 몰입감과 일체감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이 상태에 익숙해지면 다른 모든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죄다 엉성하고 이상하게 들리게 됩니다. 이른바 ‘최면에 걸리는 것’이라고 할까요.
플래그십 ZE8000 MK2가 거는 최면의 강도는 매우 높습니다. 쉽게 걸리지 않지만 일단 걸렸다 하면 헤어나올 수 없어요. ZE3000의 최면 강도는 매우 낮기 때문에 누구라도 쉽게 걸리고 그만큼 다른 이어폰들과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또한 EQ 조절에 의해 변경되는 사운드의 폭도 넓습니다. ZE8000 MK2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EQ 변경폭이 제한되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었거든요. 최면의 강도가 약한 만큼 듣는이의 의지를 더 많이 반영시킬 수 있는 겁니다.
- 그래서 대체 소리가 어떻게 나온다는 거요
전체적인 사운드의 느낌은 힘차고 다이내믹 합니다. 확실히 3000 넘버에 걸맞은 '젊은' 소리예요. 무선 이어폰을 찾는 분들의 연령대라든지 음악적 취향을 고려하면 이런 신나고 재미있는 사운드가 좀 더 와닿을 것 같습니다. 제가 들어본 파이널 제품 중에 가장 박진감이 넘치는 스타일입니다.
해상력은 물론 훌륭합니다. f-Core가 내장된 모델 중에 해상력이 떨어진다고 느껴지는 경우는 아직 없었습니다. 과거 f-Core를 처음 소개할 때, ‘성능을 고려했을 때 정말 가격을 낮게 책정했다’ 라고 본사에서 자랑했던 기억이 나네요. 또, ZE3000 대비 소리가 대단히 부드러워졌습니다. Smooth Vocal이라고 얘기했지만, 딱히 보컬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다 부드러운 이미지입니다. 오래 들어도 피곤하거나 귀에 부담이 가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음향애호가’ 스럽다기보다 다분히 대중적인 사운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허나 그 외의 사운드 요소는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아, 여기서 대중적이지 않다는 건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대가 내 앞에 연출되지 않고 내 머리 속 한가운데에 맺힙니다. 그곳이 중심이 되어 완전한 구형의 헤드룸을 그리기 때문에 음악이 나를 감싸안고 있다, 또는 내가 음악 속에 들어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헤드룸의 크기는 이어폰 치고 굉장히 크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공간이 큰 게 아니라 공간 활용을 기가 막히게 하고 있는 겁니다. 위쪽 공간에 충분한 여백이 느껴지고, 아래쪽 공간도 충분히 느껴질 수 있도록 아주 낮고 육중한 저음을 깔아두었습니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예 허락되지 않는 측후면 공간감이 잘 살아있다는 겁니다.
사실 이런 공간 형태는 파이널 ZE시리즈만이 가진 건 아닙니다. 입체감을 중시하여 공간을 연출한 몇몇 제품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지요. (특히 게이밍 헤드셋류) ZE시리즈만이 가진 특별한 점은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저음의 안개’ 입니다. 그래서 첫인상이 좀 뿌옇고 저음이 너무 많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헌데 어느 순간 높은 밀도감과 더불어 일체감, 몰입감이 한번에 들이닥칩니다. 제가 최면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저음의 느낌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다가오는데, 일단 걸리게 되면 다른 모든 이어폰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예상하셨겠지만 ZE8000 MK2의 공간은 더욱 크고 입체적이며, 저음의 안개 역시 강하기 때문에 그만큼 이질감이 더 강하지만 걸렸을 때 중독성이 또한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음역대의 표현과 각 음상들이 아주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공간이 넓고 해상력이 뛰어나면 소리가 날카롭다거나 정신이 산만하고 어지럽다는 느낌을 받기 쉬운데 이 제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듣기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바로 최면에서 깨어나버릴테니까요.
- 사운드로 만들어진 이세계로의 초대장
ZE3000 SV는 경쟁 모델들과 비교시 부족함이 없는 기능적인 면모, 듣기 편안하면서도 재미있는 사운드, 가격 경쟁력, 사용하기 편리하며 유행타지 않는 디자인이라는 여러 장점을 갖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특장점은 ‘이 금액대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수준의 몰입감,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ZE3000 SV의 SV를 저만의 언어로 소개한다면 'Surround Vision'입니다. 나를 둘러싼 음악의 세계,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파이널 무선 이어폰의 이상이자 목표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사운드로 만들어진 이세계로의 초대장, 받아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