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나, 너, 그리고 우리의 기억
북유럽 여름의 아름다움을 표현할만한 단어가 과연 있을까. 밤 10시가 되어도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태양, 한쪽에는 달이, 다른 한쪽에는 태양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북유럽의 여름밤. 공기는 청량했고 바람은 기분 좋게 선선했다. 조금은 차가워 보일 정도로 평소에 수줍고 타인과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는 북유럽 사람들이었지만 여름에는 경우가 달랐다. 일 년의 대부분을 어둡고 춥게 보내다 보니 간만에 맞은 따뜻함에 거리에는 항상 활력이 넘치는 듯했다. 길을 헤매는 관광객에게 먼저 다가와 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딱히 바쁠 일이 없는 경우라면 목적지까지 친히 데려다 주기도 했다. 이 날 밤도 그랬다. 한 손에는 각자 와인을, 맥주를 들고, 모두들 여유로우면서도 한껏 들뜬 표정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적인 언어를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거리에 사람들의 말소리와, 잔을 부딪히는 소리와, 음악소리가 흘러넘쳤다.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밤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O는 어떤 계기에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원래 홍콩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이였다. 알기는 아는데 그렇게 친하지는 않은 관계. 그래서 그가 처음 내 북유럽 여행 계획을 알고 - 여행을 떠나기 3개월 전에 여행 계획을 SNS에 올렸다. 워낙의 북유럽 친구들이 여름에 많이들 길게 바캉스를 떠나곤 하는 지라 일정을 미리 조율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해왔을 때,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알더라? 한참을 생각을 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내 연락처에 있는지도 몰랐던 이가 갑자기 페이스북을 통해 코펜하겐에 들를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을 때 '아, 이 사람 홍콩이 그리운가' 싶었다. 홍콩에 10년 동안 살면서 많은 이들을 만나고 또 그들을 본국으로 보내곤(?) 했는데, 대부분 유럽으로 돌아간 이들은 홍콩을 아주 많이 그리워했다. 뭐 당연할 법한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인 서울이 고향인 나도 잠시 부모님을 뵈러 돌아갈 때면 삶이 너무 조용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인데 그 한적하고 조용한 유럽 본국으로 돌아간 이들의 마음은 도대체 어떠할까. 매일매일이 똑같이 흘러가는 듯한 삶에 잠깐 동안이라도 찾아오는 새 손님이 아마 너무나도 반갑지 않을까, 그리고 역시 그도 그런 이유에서였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다. 만나자고 제안한 그의 말에 대답하는 것 이외에 딱히 나눌 대화도 없는 사이인지라 '연락 줘서 고마워. 그럼 코펜하겐에 도착하면 연락할게'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 메시지를 닫았다. 그리고 그렇게 세 달여가 흘렀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시작한 2주간의 내 북유럽 여행은 그 이후로 스웨덴으로, 노르웨이로 이어졌다. 원래 그렇게 타이트하게 일정을 잡으며 여행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워낙에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북유럽인지라, 평소 나 답지 않게 한 도시에서 짧게는 하루, 길게는 3~4일 정도 머무르며 여행을 하자니 체력소모가 어마 무시했다 (참고로 원래 나는 한 도시에 기본적으로 일주일은 머무는 스타일이다. 2019년 봄의 뉴욕 여행에서는 중간에 워싱턴 DC에 3일 정도 다녀온 때를 제외하고 무려 3주를 뉴욕에만 있었다). 이미 여러 번 가 본 스웨덴 같은 경우야 기본 관광은 이미 다 했었기에 주로 스웨덴으로 돌아간 옛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며(=술을 마시며) 보냈지만 나라 전체가 피요르드, 호수 등으로 이루어져 도시 간 이동이 쉽지 않은 노르웨이 여행은 도시 간 이동 자체가 워낙에 대장정인지라 진이 좀 많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여행이라 해도 거의 매일매일 짐을 싸며 기차로, 버스로, 페리로 이동하는 여정은 나에게 매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게다가 오슬로에서의 마지막 날, 그간의 여독과 돌아다니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러 간 펍에서 만난 노르웨이 사람이 나를 유독 마음에 들어했고 - 내가 보기엔 나를 맘에 들어하기보다는 당시 노르웨이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 유행처럼 퍼지던 아시아 여자들에 대한 환상에 내게 큰 관심을 보인 거 같았다. 혹은, 사람을 크게 믿지 않는 내 마음이 그를 밀어냈었을 수도 있고 - 마침 일을 쉬고 있던 그는 내 덴마크 여행에 동참을 하고 싶어 했다. 몸이 피곤해서인지 맥주 파인트(1 파인트 = 568ml, 영국 기준) 하나에도 취기가 돌았고 (참고로 난 보통 최소 두 파인트는 마셔야 취기가 돈다) 내가 한창 기분이 좋을 때 그는 코펜하겐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 밤 내내 그의 말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난 그가 당연히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일정을 맞출 수 있으면 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공항에 그가 진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뿔싸 싶었다. 그에게 설마 비행기표를 이미 산 거 아니지? 라 물었을 때 그는 아주 자랑스럽게 표를 꺼내 들며 내가 지난밤 말했던 비행 편과 같은 표를 샀다고 했다. 그리 긴 비행도 아니었지만 숙취까지 맞물려 아주 불편하고 힘든 코펜하겐까지의 비행을 마치고 난 내가 미리 예약을 해 놓은 에어비앤비로, 그는 내 숙소 근처의 호텔을 얻으러 잠깐 헤어졌다가 다시 저녁자리에서 만났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이미 이 자리가 너무 불편했던 나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어젯밤 난 너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고 너가 이렇게 정말 올 줄 몰랐어. 공항에서 만났을 때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이미 비행기표를 샀다고 하기도 했고 너가 너무 들떠 보여서 할 수가 없었는데 정말 미안해. 아무래도 우리 따로따로 여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는 아주 슬퍼하면서 친구로라도(?) 같이 여행할 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러면서 그가 붙였던 말, "나 정말 아시아 여자 친구 사귀어보고 싶었는데" 그 말 한마디에 미안했던 마음이 순간 싹 사라졌다. "미안해. 원래부터 이 여행은 나 혼자 하려고 했던 여행이었고, 그렇게 마치는 게 맞다고 생각해" 난 웨이트리스를 불러 계산서를 달라고 했고, 내가 내야 할 금액을 내려놓고는 그에게 바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내가 에어비앤비로 돌아갈 때까지 여지조차 주지 않고 돌아서는 나의 뒷모습을 꽤나 길게 지켜봤던 것으로 안다. 사실, 혹시나 따라올까 봐, 상점 쪽으로 몸을 최대한 붙여가며 흘끔흘끔 뒤를 확인하면서 걸었더랬었기에. 집으로 돌아가던 길, 문득 코펜하겐에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O의 말이 떠올랐지만 방금 전 생겼던 일로 인해 심신이 지쳐버렸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간만에 아주 여유롭게(그간 일정에 지쳐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 코펜하겐에서만 닷새 정도 느긋하게 머물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혼자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그에게 연락을 한 건 홍콩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 이미 코펜하겐에 온 지 사흘이 지난 후였다.
혼자 하는 여행은 즐겁지만, 활기가 넘치는 도시 여행일수록 오히려 혼자라는 느낌이 강해 더욱더 무료함을 느끼기가 쉽다. 코펜하겐은 내 생각보다 작은 도시였지만 타 북유럽 도시들에 비해 젊고 활기가 넘치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들 때쯤, 그에게 연락을 했다. 이제 이 여행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대로 혼자만 지내다 간다는 것도 좀 아쉽기도 했고. '너무 늦게 연락해서 미안! 그간 노르웨이에서 너무 이 도시 저 도시 다녔더니 피곤해서 이제야 연락을 했어! 혹시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메시지를 보낸 지 5분도 채 안 돼 그에게 답장이 왔다. '코펜하겐에 온 걸 환영해! 그리고 넌 정말 럭키한 거 같아! 오늘 저녁 약속이 몇 시간 전에 취소가 됐거든. 같이 만나서 저녁 먹을까?' 그의 센스 있는 답장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좋아, 어디서 만날까?' 그는 곧 레스토랑 이름을 내게 보냈다. 자신의 누나와 간 적이 있는 곳인데 음식도 맛있었고 분위기도 꽤 괜찮았다고.
구글맵에서 찾아보니 마침 내가 머무는 곳에서 걸어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곳이었고, 그럼 조금 있다 만나자는 말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디 데이트라도 가나 봐?" 당시 머무르고 있던 에어비앤비의 호스트가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했다. 보통 에어비앤비에서 숙소를 구할 경우 난 집 전체를 빌리는 걸 선호하지만 집값 이외에도 교통비며 식비며 워낙에 돈이 많이 드는 북유럽이었던 지라 북유럽에서만큼은 위치나 금액이 맞는 다면 방 하나를 빌리는 에어비앤비도 마다하지 않았다. 코펜하겐에서의 호스트들은 게이 커플이었는데 첫날 노르웨이 남자와 한바탕을 치른 후 마트에서 세일을 하던 1+1 와인을 사들고 들어갔는데 그들 또한 막 와인을 열려던 참이었었다. 내 표정이 말을 다 했는지 그들은 별 다른 이야기 없이 같이 한 잔 할 것을 제안했고 나 또한 정말 그래도 되겠냐는 예의 치례도 없이 그대로 그들 옆에 앉았다. 방금 내게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O에 대한 이야기까지 친한 친구에게 하소연을 털어놓듯 나도 모르게 말이 줄줄 나왔고, 그들은 격한 리액션과 함께 내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 한 병씩 아주 즐겁게 마시며 첫날밤을 보낸 후 거의 매일 밤을 그들과 와인파티를 하며 보냈다. 호스트에게 지금 O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하자 "You are a naughty girl! Two boys in one city!" 라며 놀리듯이 이야기를 했고 난 둘 다 데이트 아니고 친구라고! 뻘쭘한 듯 손사래를 치며 대답을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이거, 그냥 나가서 홍콩에서 알던 사람들끼리 저녁 먹는 거 맞나? 이거 혹시, 데이트인가?
여름이라 해도 저녁에는 간혹 조금 쌀쌀해지기도 하는 북유럽인지라 도톰한 회색 스웨터에 검정 스키니 진을 입고 나갈까 하다 나가기 직전 마음을 바꾸어 흰색 도트가 들어간 40년대 스타일 남색 원피스에 빨간 카디건을 걸쳤다. 2주간의 북유럽 여행 동안 운동화 이외에 거의 신을 일이 없던 빨강 플랫 슈즈도 꺼내 신었다. 입술도 조금 붉게 발랐고. 옷은 맘에 들었는데 머리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하고 또다시 하고를 반복하다 결국 약속시간을 넘기고야 말았는데 옆에서 그런 부산한 모습을 바라보던 호스트가 나에게 "너 그러다 걔 그냥 가버린다?" 라며 소리를 쳤고, 난 "안 그래도 지금 나갈꺼에요!!" 라며 후다닥 인사를 하고 만나기로 레스토랑으로 뛰어 나갔다. "오늘 밤에 집에 들어오는 거 맞지?"라고 장난스럽게 소리치는 그에게 등 너머로 "You are not my father!!"이라 소리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양이 밝게 빛나는 날이었고, 마침 주말이었던 지라 레스토랑이 위치한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갑자기 메시지가 오는 느낌이 들어 핸드폰을 보니 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혹시 길 잃었어? 레스토랑에서 나와서 분수대 앞에 서 있어. 검정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은 유달리 금발인 사람이 보이면 그게 나일 거야.' '아 맞다, 여기는 홍콩이 아니라 코펜하겐이지. 다들 금발이라 나 잘 찾을 수 있으려나?' 연달아 도착한 그의 메시지에 피식 웃었을 때 누군가 내 머리 한참 위에서 말을 걸었다. "역시 여기서는 내가 너를 찾는 게 훨씬 빠르네" 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호수보다도 더 맑고 시릴 정도로 파란, 그리고 다정함을 한껏 머금으며 내 떨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그의 눈이. Damn, those eyes. 순간이 심장이 배 밑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미 그에게 푹 빠져버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의외로 굉장히 단순할 때가 많다. 특히나 나 같은 경우는 어느 한 부분이 나에게 강렬하게 인상이 되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그 사람한테 빠지게 되는데, 그러니까, 어떤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코를 찡긋했는데 그것이 굉장히 귀여워 보였다던가, 어떤 단어를 발음하는 그만의 방법이 아주 독특했다거나, 내가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다 중간중간 재치 있게 한 마디씩 던지며 받아친다거나, 뭐 그런 아주 사소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들. 전등의 스위치 같이 내 안의 스위치가 클릭이 되고 나면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내 컨트롤 바깥의 일이었다. 그의 파란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후로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난 왜 그에게 이제야 연락을 했을까.
어느덧 대화는 흐르고 흘러 나를 따라 코펜하겐까지 온 노르웨이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까지 나왔다. "어이쿠 내가 지금 얼마나 인기가 넘치는 사람이랑 앉아 밥을 먹는 거지? 이후에 내 손자가 생김 코리안 슈퍼 스타랑 밥을 먹었다고 꼭 이야기를 해줘야겠어"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농담을 던졌다. 메뉴를 어떻게 시켰는 지도, 어떤 와인을 골랐는 지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꼭 생전 처음 남자를 만나는 소녀처럼 내 가슴이 너무 쿵쾅 거려서 그 설렘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내가 시킨 미니 버거가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이거 예쁘게 먹기 어렵겠는 걸?"이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는데 이에 그는 "난 지금부터 딱 10초 동안 내 파스타에 코를 박고 먹을 거야, 그동안 그 버거를 입에 다 집어넣어 보도록 해"라고 했다. 내 눈의 콩깍지라 할 도 있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재치가 넘치고 또 대화가 얼마나 즐거운 지,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 쉴 새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받아치고 웃으며 대화를 했다. 주문했던 와인 한 병이 금방 동이 났다. 한 병을 더 시킬까 초반부터 너무 많이 마시나? 싶었을 때 갑자기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나에게 오늘 오래간만에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뒤를 봐, 와인 한 병으로는 도저히 안 될 날이야" 그의 말에 뒤를 돌았고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테라스 밖 광장은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북유럽보다는 발리에 어울릴만한 그런 하늘이었다. 순간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고 모두들 핸드폰을 꺼내기에 바빴다. 그 광장 분수대 앞에는 누구라도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순간 정말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군중들 중 남자 하나가 나와 재즈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거짓말같이 모든 게 완벽한 상황. 재즈 연주와, 보라색 석양과, 한껏 들뜬 사람들의 에너지, 그리고 와인이 주는 취기와, 선선한 바람. 다시 그를 마주 보고 돌아앉았을 때 어느새 도착한 새 와인을 내 잔에 따라주며 찡긋하던 그의 예쁜 눈까지. "내 말이 맞지?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라고"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아주 상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심장이 울렁였다.
저녁을 먹으며 각자 와인 한 병씩을 마시고 나니 취기가 제법 올랐다. 얼굴이 좀 달아오르는 느낌이라 화장실에 가 화장을 좀 고치고 왔더니 어느샌가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모두 치워져 있었다. "디저트 안 좋아하지? 단 거 잘 안 먹잖아" "응, 난 안 먹을 건데 너는 먹을 꺼면 먹어도 돼, 앞에 앉아 있을게" "아니야, 나도 요새 주짓수를 하느라 그런 정크 푸드들을 모두 끊었어, 그럼 나가자, 밖 공기가 아주 선선하니 좋은 거 같아" "그럴까? 계산서 달라고 하자" "계산은 이미 내가 했어. 그냥 나가면 돼"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나라도 이제 더치 페이가 일반화가 되었지만 외국, 특히 내가 알기로 북유럽권에서는 연인들 사이에서도 정말 칼같이 자기 몫을 나누어 내는 더치 페이가 아주 일반화되어 있다고 알고 있었다.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 거지? 왜 내 거까지 다 계산을 한 거지? 이거 혹시 데이트였나? 그의 행동에 대해 의문이 듦과 동시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에 나도 모르게 '너무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면 또 실망하게 될 거야' 란 불안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그는 말했다.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야. 나가자, 완전 깜깜해지기 전에."
그렇게 거리로 나오고 나니 아까보다는 조금 더 어둑해져 있었다. 이미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초저녁 같은 느낌이었다. "인력거 안 타시겠어요? 저렴하게 해 줄게요" 레스토랑에서 나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는 옆에 어느새 인력거꾼이 붙어 살갑게 말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덴마크는 다른 북유럽 도시들과는 사뭇 달랐다. 우선 슈퍼마켓에서 맥주 이외의 술들을 판매하고 있었고 (참고로 스웨덴, 노르웨이는 국영 주류 상점에서만 주류 구입이 가능하고 그것도 5~6시면 닫는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보지 못한 길거리에 쓰레기들도 가끔씩 (그래 봤자 껌 종이나 레스토랑에서 날아온 냅킨 정도였지만) 보였고 술이 거하게 오른 취객들도 더러 보였다. 그래 봤자 미국이나 영국의 취객들과는 아주 다른 훨씬 더 꼿꼿하고 예의가 바른, 유쾌하게 취한 취객들이었지만.
그리고 또 하나, 인력거. 신기하게 시내 중심가에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력거들이 넘쳤다. "혹시 저거 타봤어?"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인력거? 아니 안 타봤는데. 저건 주로 대학생들이 만취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타는 거야. 그들은 정말 끔찍해. 나도 대학생 때 그랬었나? 갑자기 자신이 없네?" 그는 대학 시절을 회상하는 듯 갑자기 멈춰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멋쩍게 웃었다. "아 그래? 그냥, 재밌을 거 같기도 해서. 타고 싶지 않으면 괜찮아. 어차피 플랫 슈즈 신어서 좀 걸어 다녀도 돼" 인력거 타는 것을 별로 반기지 않는 듯한 그의 말에 내가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저거 타고 싶어? 그럼 타자. 사실 나도 한 번도 안 타봤어. 한 달만 지나도 아주 괴팍한 겨울 날씨가 되어 버릴 거야. 지금 안 타면 후회할 거 같아. 네가(관광객이) 나의 좋은 변명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 타보자 우리!" 그는 인력거 기사에게 가서 가격을 묻고 약간의 흥정을 한 뒤 나에게 여기로 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내가 인력거 앞에 다가가자 스무 살 조금 넘어 보이는 인력거 기사 청년이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 어서 올라타세요, 마차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나와 O 둘 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리고 힘이 넘치는 기사라 그런지 인력거는 내가 생각한 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출발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타기 전에 레드불이라도 마시고 탄 거예요? 왜 이렇게 힘이 좋아요?" 그가 묻자 인력거 기사는 말했다. "오늘 여자 친구한테 일찍 들어간다고 약속했거든요. 얼른 후딱 시내 구경시켜드리고 집에 갈 거예요." 그는 코펜하겐에 온 지 6개월 정도 된 불가리아 청년이었다. 두 달 여 전, 불가리아에 휴가를 온 지금의 덴마크 여자 친구를 만난 후 서로 스카이프와 이메일로 연락을 하다 여자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얼마 전 코펜하겐으로 무작정 왔다고 했다. 젊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평소보다 집에 일찍 가게 되어 기쁜 그와,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은 우리는 그렇게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인 양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고 어느새 원래 우리가 여정을 시작했던 곳으로 방향을 바꾸던 그는 갑자기 인력거를 멈춰 세우고는 우리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맨날 취해서 함부로 말하는 대학생들만 태우다 당신들 같이 좋은 사람들이 만나서 전 오늘 너무 기분이 좋아요. 여자 친구는 코펜하겐에 살고 있지 않는 거 맞죠? 티볼리 공원 가봤어요? 지금 시간에 문을 열지는 않지만 전구들은 그대로 켜 놓아서 밖에서 바라만 봐도 아주 예뻐요. 거기 들렸다 돌아가는 거 어때요?" 여자 친구라는 말에 순간 움찔해서 나도 모르게 당황했을 때 옆에 있던 O가 나에게 물었다. " 아주 좋은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때?" 그의 다정한 미소에 나도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why not? 난 어차피 매일매일 노는 여행자라고, 다들 좋다면 나도 좋아" "알겠습니다 my prince and princess. 티볼리 공원으로 모시지요" 익살스러운 어린 인력거 기사는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바람은 시원했고 오래된 돌바닥을 따라 인력거는 덜컹거리며 점점 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새인가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