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나, 너, 그리고 우리의 기억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해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은 11월, 푸켓은 건기가 이제 막 시작된 터라, 햇볕은 뜨거웠지만 그늘에 들어오면 금세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기는 청량했다. 홍콩에 있을 때만 해도 그렇게나 마셔오던 낮술이었는데 장기 휴가를 떠난 이후로 낮에 술을 마시는 걸 즐기지 않게 되었다. 요샛말로 에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은 첫 입은 달콤했지만 계속 더위 아래 있다 보면 곧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의 편두통을 가져오기에, 이후 오후 일정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해가 질 때까지 잠시 참아두는 편이 나았다. 무엇을 마셔야 할까 메뉴판을 한참 살피다 맥주 대신 패션 프룻 소다를 시키고 앉아 바람을 좀 쐬니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휴가가 주는 행복함에서 일까, 아니면 따뜻한 남국(南國) 특유의 느긋함에서 일까,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보통 때 회사 건물에서 동료들을 마주치더라도 인사하고 small talk을 해야 하는 것이 싫어 핸드폰을 보는 척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쏙 내려 종종거리며 내 자리로 가곤 하던 나 마저도 절로 반대편에서 오는 이에게 눈을 마주치고 눈인사를 건네게 하는 남국의 여유로움이었다. 너도 지금 행복하지? 나도 모르게 건네게 되는 상냥한 웃음. 그런 나의 얼굴에 열이면 열, 모두가 만족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음 그럼, 오늘도 참으로 멋진 하루야.
기분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볍다. 나만 해도 그렇다. 빨간 비키니 탑에 속이 훤히 비치는, 작은 바람에도 나부낄 정도로 얇은 흰 셔츠, 그리고 화려한 프린트가 들어간 숏츠. 제 아무리 더운 홍콩에서라도 바닷가에서가 아닌 이상 이렇게 입고 다니면 모두가 미친 여자 보듯이 쳐다볼 텐데, 같은 옷이 어떻게 이렇게 장소에 따라 아주 적절할 수도, 아주 무례할 수도 있는 걸까. 이미 답을 알면서도 그 미묘한 종이 한 장 차이의 차이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차림이었다.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셔츠, 혹은 비키니가 훤히 보이는 비치 드레스, 과감한 탱크탑, 모두가 저마다 '난 지금 휴가 중이에요'라고 아우성대며 외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저 사람들은 평소에 어떻게 입고 다닐까 궁금증이 들었다 - 저 사람은 왠지 항상 블랙으로 맞춰 입고 다닐 거 같아, 저 사람은 평소에도 과감한 색감을 즐기지 않을까? 저 아저씨는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저 화려한 셔츠를 입고 있지만, 왠지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셔츠를 벗어 버릴 것만 같아. 마침 나온 달콤한 소다를 홀짝이며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문득 휴가를 마치고 돌아갈 이 화려한 옷들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졌다. 휴가를 마친 후 본국으로 돌아간 후 제 본연의 기능을 다 한 이 옷들은 과연 다 어디로 갈까? 순간 태국에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하나씩은 꼭 있다는, 그리고 나 또한 매 여행 때마다 사 입던 코끼리 바지가 떠올랐다. 옷장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다 다음 휴가 때 다시 빛을 보게 될까? 아님 그대로 장롱 안에 쳐 박혀 서서히 잊히게 될까. 아님 내 코끼리 바지처럼 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채 타지도 못하고 호텔방 어디엔가 방치가 된 채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 마치, 처음부터 전혀 존재하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Holiday fling, 휴가기간의 정사. 직역을 하고 나니 너무 성적인 느낌이 들어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린다. 영어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한국 단어들이 있듯이('서운해' 라던가, '뜨뜻미지근해' 라던가) 어떤 영어 단어들은 도저히 한국어로 영어 그대로의 느낌을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우리나라의 언어는 주로 감정의 미묘함을 상대방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돌려서 전달하는데 큰 강점을 가지는 반면 영어는 분명하고 정확한 전달력이 큰 강점인 듯하다. Holiday fling 도 그런 단어들 중 하나. 어떤 것을 - 특히나 이런 류(?)의 단어들을 - 직접적으로 칭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일상에서 쓰기에 다소 충격적인 단어들이기에 여기에 한국식으로 약간의 의역을 더해 '휴가기간 동안의 짧은 사랑' 정도라 표현하면 좋을 듯싶지 않을까 싶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고 화려한 트로피칼 셔츠들을 보며 난 문득 나의 holiday fling들이 떠올랐다. 휴가 기간 동안에는 더없이 달콤하고 로맨틱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는 그런 불편하고도 이상한 관계. 하지만 문득 문득 생각나는 그런 순간들. 휴가가 끝난 후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길을 잃는 저 셔츠들같이 말이다.
예전에는 - 어렸을 때는 이라고 해야 하나 - 일상에서도 쉴 새 없이 사랑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서른이 넘고 나서부터, 그러니까 금방 사랑에 빠지고 난 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심한 후폭풍들을 몇 번 경험하고 난 후로는, 사랑에 빠지는 빈도수가 아주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랑에 빠질 기미가 보일 때마다 '이번에도 이렇게는 안돼' 그 아픔을 잊어선 안돼, 라며 내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로 인해 내 삶은 점차 건조해져 갔지만 그 편이 나았다. 더 이상 잠을 설치지도 않았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스스로를 고문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내가 문제였던 걸까, 스스로에 대해서 의구심을 느끼며 괴로워 할 필요도 없었고, 이런 감정적 방해물들이 사라지자 회사 업무에도 더욱더 의욕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론 문득 문득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설렘, 하늘에 붕 떠 있는 듯한 그 달콤함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내 마음을 다독였다. 더 이상 사랑 따위에 내 삶의 컨트롤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려선 안돼.
하지만 이런 나조차도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질 때가 있었는데, 주로 휴가나 장기 출장에 떠나 있을 때가 그러했다. 여행지에, 그곳의 음식에, 그곳의 분위기에, 평소에 매일 접하지 않는 이국적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내 가드를 내려버리곤 했달까. 물론 이런 휴가지에서의 짧은 만남들은 대체로는 한창 취기가 올라 있던 바(bar)를 벗어난 순간, 그리고 다음 날 어마어마한 숙취가 시작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잊히고는 했지만 내 인생에 딱 두 번,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그 감정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하는 Holiday fling이 존재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두 번의 경우가 매일 같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이십 대 때가 아닌, 나 자신조차도 내 가슴이 사막같이 건조하다 여긴 서른이 넘고 나서였다. 처음에는 내 생활이 너무 팍팍해서 그 달콤했던 감정들이 잊혀지지가 않는 것일까 싶었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기는 지겨운 회의에서 무심히 던진 보스의 말도 안 되는 우스개 소리가 유난히도 웃기게 다가오듯, 가뭄이 들듯 말라버린 내 가슴에 간만에 찾아온 단비이기에 더욱 달콤하게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다음 날 입기 위해 미리 옷걸이에 예쁘게 걸어 놓은 맥시 원피스를 바라보았다. 작년 4월 뉴욕 여행에서 샀던 긴 랩 원피스였다. 밝은 소라색에 자잘한 흰색 페이즐리 무늬가 전체적으로 들어간 산뜻한 원피스였다. 적당히 도시적인 디자인이라 홍콩에서도 종종 주말에 입고 다니곤 했는데 또 나름 시원하면서도 밝은 소라색 옷이라 이번 장기 여행의 짐을 꾸릴 때 까다로운 나만의 one suitcase only (짐 가방을 딱 하나!) 평가 기준을 통과해 나와 6개월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된 드레스이기도 했다. 뉴욕. 그 단어를 떠 올리자마자 난 나도 모르게 난 어느새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봄날의 센트럴 파크로 이동해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갔던 이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마돈나가 뮤직 비디오를 찍었다던 첼시의 한 호텔 바, 취기가 한참 오른 채로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간 작은 재즈 바로까지..
푸켓에서 지낸 지 3주 정도 되었을 무렵 푸켓에서의 마지막 행선지인 라와이(Rawai)라는 곳으로 옮겨갔다. 근 10년 넘게 뻔질나게 들락날락하던 푸켓이었고 잘 알고 있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라와이라는 동네는 참 오묘했다. 동네 전체가 유럽 사람들의 실버타운 같은 느낌이었달까. 워낙에 장기로 여행을 오는 유럽인들이 많은 푸켓이었지만 이를 넘어서 이 동네는 푸켓에 거주를 하는 사람들만이 오는 동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몇 년이상 머무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약간은 폐쇄적이라는 느낌도 받는 곳이었다.
동네 분위기가 어떠하든 간에 딱히 소셜라이징에 관심 없던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 달리 말하면 혼자 여행하는 동양인 여자 여행자를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 신기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혼자서 잘 먹고, 잘 쉬고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벨기에 펍(pub)을 발견했고 신기한 마음에 그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아이리쉬나 잉글리시 펍이야 세계 도처에 널려 있지만 벨기에 펍이라니! 그것도 라와이에서! 게다가 난 벨기에 은행에서 2년 동안이나 일을 하다 온 사람이 아니던가!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와 내 소개를 하고 말을 걸었다. 왠 동양 여자가 들어오더니 벨기에 은행을 다녔다 하고, 또 브뤼셀(벨기에의 수도)에도 한 달 이상 머물며 일을 했다고 하니, 게다가 벨기에 맥주의 알아주는 팬이라 하니! 역시나 벨기에 출신이라는 주인아저씨도 신이 나셨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인사를 시키며 창고 구석에 숨겨 놓은 귀한 맥주들을 잔뜩 꺼내 주셨다.
한적하던 펍은 저녁 8시가 넘어가자 도대체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었나 싶게 어느덧 주변 로컬(?) 유럽인들로 꽉 차고 술에, 흥에 취한 나도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지난 몇 주간 눌러 놓았던 소셜라이징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게 얼마나 오래간만인지 모르겠어요" 방콕과 푸켓을 오가며 생활을 한다는, 나보다 6살이 많다는 스코틀랜드 남자가 문득 내게 말을 던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코멘트라 당황하여 잠깐 멈칫하자 그는 재빨리 그 공백을 채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혹시 내일 무슨 계획 있어요? 내 빌라에 수영장이 있는데 와서 태닝하고 같이 놀래요?" 이미 알콜의 영향으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혹은 재빨리 굴리려고 '노력을 했다'. 이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미안해요, 믿기지 않겠지만 제가 햇볕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오퍼는 정말 고마운데 아무래도 거절해야겠어요" "그래요? 그럼 저녁 먹을래요? 어디 가고 싶은데 없었어요? 나 차 있거든요. 여기 차 없으면 돌아다니기 힘든 동네인데 부담 없이 말해요" 정말 못알아 들은 건지, 못알아 듣는 척을 하는 건지. 나름 돌려 거절을 했는데 이렇게까지 나오니 나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이럴 때 대처해야 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나의 의사를 확실히 전하는 것.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 분명히 말하는 것이니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새로 만난 친구로서 어울리자는 거면 수락을 하고요, 데이트 신청이면 거절할게요. 전 어차피 1주일 후면 발리로 떠나요.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런 단호한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내 대답을 듣고 잠시 당황하던 그는 다시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 알았어요. 걱정마요, 친구로서 저녁을 먹는 걸로 하죠"
사람들은 흔히 내가 까다로워서 사람을 잘 못 만난다 생각하는데 나를 오랫동안 봐왔던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안다. 내가 누군가에게 까다롭게 군다는 건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딱히 click 되는 순간을 만나지 못해서인거지 그 click이 되고나면 주위에서 말리는 소리 하나 듣지 못할 정도로 그에게 철저히 빠져든다. 지나치리만큼 forgiving 해 지기도 하고. 내 가슴속까지 찌릿하게 하는 대화, 상냥한 미소, 그리고 따뜻한 눈빛.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내 영혼에 속삭일 때면, 쿵, 심장이 떨어지며 온 몸으로 전해지는 찌릿함을 느낀다. Damn, that eyes. 난 그 순간을 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에게 빠져드는 순간. 더 이상 주위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 곳에는 그와 나 단 둘만 존재하는 듯한 순간을.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일분일초가 가는 게 너무 아까워 나도 모르게 자꾸 시간을 체크하게 되는 안달나는 마음을. 그렇게 시작된다, 나의 holiday fling은. 짧고, 아쉽고, 강렬하게, 그렇게 정말 내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뉴욕의 한 호텔의 바로 걸어들어오던 나를 발견하고 반가움에 눈을 크게 뜨며 여기라고 머리 위로 크게 손을 흔들던 그의 모습을, 그의 따뜻했던 밤색 눈동자를, 온 세상을 보랗빛으로 물들이던 코펜하겐의 노을을 뒤로하고 내 눈동자만 응시하던 호수같이 파랗던 눈동자를 나는 아직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직도 가슴을 찌릿하게 만들던 순간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다시 한 번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하게 만드는 그 강렬했던 감정의 순간들을. 뭘 어떻게 다시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할 수 없이 떨리고 행복했던 당시의 그 느낌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나의 holiday fl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