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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치 Jan 06. 2022

[홍콩이야기 2] 난 MBTI 가 싫어요

우리나라에 도대체 언제부터 이 노무(!) MBTI 열풍이 불어닥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온갖 소셜미디어마다 난무하는 각 성향별 특성들 잔치에 언제부턴가 MBTI의 M 자만 봐도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ENTJ니 이런 성격이고, 그러니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이래서 당연한 거야, ‘난’ 이런 성향이라 이런 때에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야. 처음에는 아 이 사람은 이런 성향이구나, 아 이 사람은 이럴 때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관심을 갖고 읽었지만, 이후 끊임없이 Me, me, me, me, me!! 를 외치는 분위기에 갑자기 확 질려버렸달까. 마치 다들 자기 생각만이 중요한 유아기 때로 돌아간 듯싶기도 했다. 이 MBTI라는 것이 이러려고 만들어진 검사방법인가, 검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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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전에 다니던 벨기에 은행은 ‘작지만 큰’ 은행이었는데, 그 말이 무엇인고 하면, 은행 자체가 상업은행이 아닌(시중 은행들처럼 개인 고객을 전혀 받지 않기에 투자은행 쪽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들어도 잘 모른다) 은행들의 은행(각 상업 은행들에서 더 나아가 각 나라들의 중앙은행, 증권거래소, 금융감독기관 등의 은행)이기에 마켓 지배력은 작더라도 존재감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는 그런 은행이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내가 그간 다닌, 주로 수익의 극대화가 거의 절대 가치라 볼 수 있는 상업 은행들과는 전혀 다른 목표와 기업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바로 은행 자체의 value를 지키는 것. 이게 무슨 말인고로, 벨기에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일을 하며 모두가 은행이 가지고 있는 아이덴티티를 공고히 하고, 더 나아가 수익과 은행의 가치가 대립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는 주저 없이 ‘우리의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그리하여 잠재적으로 수익이 매우 큰 시장마저도 은행이 추구하는 가치나 은행이 운영되고 있는 모델과 상충할 경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포기해 버릴 수 있는 대쪽 같은 조직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클라이언트들 또한 이에 대해 종종 불만을 토로하고는 했는데, 예를 들어 은행으로 몇 천억 대의 자금을 가지고 올 테니 이런저런 점을 바꿔 달라, 라는 요청에도 만약 그 요청 사항들이 은행이 추구하는 가치 혹은 구조와 대립된다면 ‘우리는 XXX입니다. 우리는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XX 은행(타 은행)은 아마 그런 서비스를 제공할 겁니다. 그쪽으로 가보시는 걸 권장드립니다’라고 딱 잘라 내는 것이 바로 그 은행이었다. 이에 한국 클라이언트들이 우스갯소리로 누가 손님인지 모르겠다며 은근슬쩍 불만을 드러내고, 때로는 그렇게 해서 수익이 많이 나냐며 대 놓고 비꼬는 상황도 가끔 생겼지만, 그런 때마저도 다정한 웃음으로 ‘당신의 의견은 십분 이해합니다만~’을 시작으로 시작 해 ‘향후 상황이 바뀔 경우 그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라며 다시 한번 완곡하지만 단호한 거절을 하는 것이 그곳이었다. 물론 이 때문에 업무를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래서 이 놈의 회사는 도대체 돈을 벌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회사에 답답했던 상황들도 참 많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그 은행이 지키고 싶어 했던 가치가 도대체 뭘까. 그 은행에 다니는 내내 정말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그래서 정말 달달 외우고 다녔던 다섯 가지 가치들은 바로 Respect, Effective, Accountable, Client first, Helpful 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생각하며 직원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가치는 바로 ‘존중’, Respect이었다.


은행에 들어가게 되면, 특히 경력직의 경우 대략 1~2주간의 트레이닝 이후 바로 실선으로 던져지게 되는데, 해외 투자은행들은 우리나라 은행들처럼 별도의 신입 트레이닝 과정이 없기에 이를 기대한다면 업무 적응에 아주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적극적으로 보스에게 가 모든 이메일에 카피를 해 달라 요청을 하고, 매일, 혹은 얼마 간에 한 번씩 원온원(1대 1 미팅)을 잡아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본인의 프로그레스를 업데이트하고, 입사 이후 이뤄지는 이런 일련의 행동들이 이후 각 개인의 업무 능력 평가에 다 반영이 된다. 주어진 일이 없다고 핸드폰이나 확인하고 있거나 누가 내게 일을 던져줄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간 ‘업무에 열의가 없다. 너무 수동적이다, 승진에 관심이 없다, 지금의 역할 정도만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라는 평가를 듣기 마련이다. 회사에서 계획되고 대략 3~6개월에 한 번씩 전체 메일, 혹은 회사 내 자기 관리 시스템을 통해 던져지는 트레이닝 또한 결국 이를 틈틈이 체크 해 완료해 나가는 것 또한 자기 하기 나름이다. 공고된 트레이닝들 중 알아서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고, 업무시간에 진행되는 트레이닝일 경우, 외부 미팅 스케줄을 알아서 조절하고, 보스에게 승인받고, 이를 듣고, 듣고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관련 부서에 가서 모르는 걸 직접 물어보고 하는 것 또한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것들이다. 


보통 투자 은행의 트레이닝은 대략 크게 나누어 1) 업무 관련 규제 등에 대한 지식 트레이닝 (직급에 따라 매년 적게는 6~7개, 많게는 10개 이상 배정이 된다. 말 그대로 지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후 시험도 보는 형의 트레이닝으로 이루어진다. 중요도에 따라 시험에서 60~80% 이상 답을 맞혀야 통과하며 통과하지 못할 경우 통과할 때까지 시험을 보거나 통과 못한 사람들을 위한 트레이닝을 따로 들어야 한다. 트레이닝이 배정되었을 때 기한 내에 완수를 못 하거나 시험 성적이 안 좋을 경우 인사 고과에 바로 영향을 주는 트레이닝 중 하나이다), 2) 소프트 스킬(soft skill) 트레이닝 (직원 관리법, 갈등 상황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방법, 스트레스 관리법 등등 회사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스킬들을 트레이닝해 준다), 3) 회사   보스들이 주관을 하는 마켓 동향 업데이트/트레이닝 (보통 지역/글로벌 헤드급 이상의 빅 보스들의 시각으로 본 마켓 동향, 앞으로 우리 회사가 추구할 방향 등을 셰어 한다. 업무 길잡이를 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기에 인사고과에 영향이 없더라도 웬만하면 시간을 내 들어가는 세션들이다) 등으로 나눠진다. 아무래도 다들 바쁘기도 하고 업무에 직접적으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1)과 3) 이기에 대부분 이런 트레이닝과 업데이트 세션에 많이 참가를 하고 소프트 스킬 트레이닝과 같은 경우 많이들 뛰어넘고는 한다. 그런 것들 쯤은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다고 자신(이라 쓰고 ‘자만’이라 읽는다. 물론, 나 또한 그랬고)하고 있기도 하고. 그 외는 전부다 실무다. 실제로 일이 터지고, 클라이언트한테 깨지고, 보스한테 깨지고, 은행의 모든 업무는 전부 돈과 연관이 되기에, 그리고 투자은행의 특성상 적게는 몇 십억, 크게는 천억 단위 이상의 돈이 오고 가는 일이기에 한 번 일이 터지면 기본이 한 달이다. 한국 스타일의 반성문 형식의 시말서는 없지만, 내가 직접적으로 그 잘못에 연관이 없더라도 사건 경위서를 쓰고, 임팩트가 가는 모든 부서와 미팅을 해야 하고, 클라이언트에게 업데이트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프로세스를 정비하는 것 까지, 해결이 되는 그때까지가 지옥이다.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라는 선배들의 말을 듣다 보면 이런 실무 또한 어찌 보면 트레이닝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또한 미국계 은행에서 처음 은행 커리어를 시작했기에 이 벨기에 은행으로의 이직 이후 단단히(=처참하게 깨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출근을 했더랬다. 그래, 처음 이직하고 3개월은 그냥 깨지고 터지고 스트레스 만땅으로 받는 게 당연하다. 이 것도 다 배우는 과정이다! 마음 단단히 먹자! 홍콩 같은 경우 1인 가구가 많아 저녁이나 술자리 약속도 자연히 많은 동네인데, 누가 이직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1~2달 정도 모임에서 완전히 사라져도 말없이 이해해 주는 것이 암묵적 동의이다. 그 기간 동안 회사에서 돌아와 바로 지쳐 쓰러져 자고, 다시 출근을 하는 생활을 할게 뻔하니까. 그렇게 나 또한 내 지인들에게 앞으로 내가 다시 말할 때까지 나 당분간 찾지 말라는 선언 같은 부탁을 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는데, 어라? 이 회사는 입사 후 한 달간 업무에 투입이 되지 않고 우리나라 식 클래스룸 트레이닝(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 강의실에 모여 트레이닝을 받는 형식)을 한단다. 처음에는 이게 웬 횡재냐 싶었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나자 이미 4년 이상을 업계에서 일하고 온 나에게 이런 업무 트레이닝은 지옥 같이 다가왔다. 도대체 왜 알고 있는 걸 또다시 배워야 하는지, 같은 마켓 프랙티스에 은행별로 업무 처리만 좀 다를 뿐인데 왜 이걸 이렇게 앉아서 하루 종일 배우고 있어야 하는지 정말 지겨워 미칠 지경이었다. 참다 참다 2주 정도 지난 후 보스에게 이거 나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니 그냥 후딱 시험 같은 거 있으면 보고 얼른 업무 전선에 투입(?)시켜 달라 읍소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보스는 빙긋 웃으며, 회사 처음 들어와서만 즐길 수 있는 지금 허니문 기간인데, 일도 안 하고 월급 따박 따박 다 주는 데 얼마나 좋냐며 아주 천하태평이었다. 방금 타 온 차 티백을 아래 위로 탈탈 털어 가며 정말 세상 여유롭게 말하는데 솔직히 그때 ‘아니 이 사람이 캐나다 사람이라 이렇게 느긋한가?’, ‘진짜 뭐 이딴 회사가 다 있나, 나 잘못 이직한 거 아닌가, 이러다 업계에서 도태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그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더랬다. 물론, 나중에 한 1년 반 여가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아, 그때 보스가 어떤 마음으로 그때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달여간 이어졌던 트레이닝 중 신기하게도 이 회사는 업무 지식 관련 트레이닝 못지않게 소프트 스킬 트레이닝을 참 많이 시켰다. 이메일 쓰는 법 (생각보다 중요한 트레이닝이다. 글로벌 헤드 같은 빅 보스 들일 수록 이메일에 10줄이 넘어가면 대부분 읽기 싫어한다. 실제로 그렇게 길게 쓰면 안 읽고 씹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 또한 7~10줄짜리 이메일 하나 쓰는데 한 시간 이상 걸린 적이 수두룩 하다),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동기 부여를 하며 일하는 법, 협상하는 법, 아주 예의 바르게 하지만 단호하게 상대방의 제안을 거절하는 법, 워라벨 발란스를 갖는 방법, 심지어는 회사 내 부서 이동 하는 법까지. 그중 하나 자리했던 것이 바로 지금 초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MBTI와 아주 비슷한 유형의 적성 검사 트레이닝이었다. 적성 검사라 하면 설문지 주르륵 작성하고 결과지를 받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읽고 파악하고 나면 끝이 아니겠냐는 내 생각과는 달리 이 트레이닝은 유별나게도 하루 전체를 다 써가며 해야 하는 트레이닝이었는데, 뭐 이딴(!) 트레이닝에 하루를 쓰냐 싶었지만, 이미 이 때는 이 회사의 거북이 같은 속도에 이미 지쳐가고 있었던 때라, 그래 될 되로 돼라, 난 월급만 받아가면 상관없다, 라는 자포자기적 마인드로 트레이닝에 임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가장 큰 회의실에 각 부서에서 모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오래되어 이름은 까먹었지만 MBTI 보다는 좀 더 간단한 유형의 검사를 베이스로 한 트레이닝이었는데, 사람의 성향을 크게 빨강, 노랑, 초록, 파랑으로 나누어 그 조합으로 - 예, 빨노, 빨초, 노초 등등 - 성향을 진단하고 진행을 하는 형식이었다. 회사에서 아주 아주 비싸게 모시고 왔다는 외부 강사는 아주 경쾌한 성격의 호주 여성이었는데 무슨 도살장에 끌려간 소들처럼 누가 봐도 억지로 온 게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우리들을 보고는 생긋 웃으며 한 사람 한 사람 눈인사를 했다. “나도 알아요, 바빠 죽겠는데 도대체 왜 이런 트레이닝 따위에 하루 종일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들 하고 있는 거. 하지만 어쨌든 여러분들 회사에서 나에게 이미 거액의 돈을 지불했으니 우리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오늘은 나랑 뭐라도 좀 해봅시다!” 혹시 정말 급한 일이 있다면 중간중간 나가도 좋아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일즈 팀 동료 하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 급한 일 있는데 지금 나가도 되나요?” 그러자 그녀는 깔깔대며 대답했다 “Nice try! (좋은 시도였어요!) 아니요, 안돼요. 적어도 첫 한 시간은 듣고 나가도록 해요. 그리고 트레이닝의 50% 이상을 불참할 경우 이 트레이닝을 다시 들어야 한다는 걸 명심하고요!” 그 말에 세일즈 팀 동료는 곧 시무룩한 얼굴로 올린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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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이뤄진 트레이닝을 구구절절이 다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 하니 간단히 간추려 이야기하자면, 트레이닝의 처음은 각 색깔별 성향 - 빨강(다급, 직설적), 노랑(활달, 유쾌, 사교적), 초록(차분, 분석적), 파랑(내향적, 사색적) - 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이 되었다. 이후 트레이닝에 참가한 개개인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순번을 돌아가며 자신의 유형에 대한 발표를 하게 했고, 이후 가장 성향이 큰 색을 기준으로 네 팀으로 나누어 상황을 주고 이런 상황에서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냐는 유형의 실전 예시 트레이닝을 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트레이닝 틈틈이 업무 이메일을 체크하고, 중간중간 걸려오는 클라이언트 전화들을 받으러 나가고 하던 초반과 다르게 실전 예시 트레이닝이 이루어지자 하나둘씩 핸드폰을 내려두고 트레이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족과의 갈등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 와 같은 아주 간단한 일상생활 관련 상황이 주어졌고, 이후 점심을 먹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시작된 오후 트레이닝에서는 실제 업무 관련 예시를 주며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느낌을 받는가, 어떤 액션을 가장 먼저 취할 것인가, 각 팀이 발표를 한 후 각 팀이 낸 액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같은 날카로운 질문들이 이어졌다. 어떤 예시들은 불과 몇 달 전에 실제로 우리가 겪었던 상황이기에 시간이 갈수록 토론은 눈에 띄게 열 띄게 진행이 되었는데, 같은 상황인데 각 성향별로 이렇게 다르게 생각하고 반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아니,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어제 클라이언트가 약 1000억 가까이의 미국 주식 매도를 지시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주식 매도가 불발되었고 클라이언트는 노발대발한 상황이다. 시차 때문에 아직 미국 시장이 열기 전 인지라 아시아 시간으로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이 것이 은행 프로세스의 오류였는지, 클라이언트가 무언갈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당신이라면 어떤 액션을 취하겠는가.


빨강 & 노랑 유형의 사람들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이나마 누가 잘못을 한 것인지, 얼마나 빨리 이를 종합하여 클라이언트에게 연락해 현재 상황을 알리는지, 취할 수 있는 플랜 B가 뭔지 등에 초점을 맞췄다.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팀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일단 어느 정도 정보가 모아진 이후에는 최대한 클라이언트에게 빨리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다들 이견이 없었다. 반면 초록 & 파랑의 사람들은 문제 원인 분석에 더 집중을 했다. 또한 정확한 원인을 알기 전까지는 클라이언트에게 연락하기보다는 사건 조사에 집중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 업데이트가 없을지라도 시간에 한 번씩 내부 콜을 통해 사건 경위 보고가 이뤄져야 한다는 노랑 & 빨강의 말에 초록 & 파랑은 어떤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쓸데없이 그런 데 시간을 낭비해야 하나 반발했다. “그럼 클라이언트는 어떻게 하라고?” 라고 바로 받아치는 빨강 & 노랑이들 말에 초록 & 파랑이들은 “아직 원인도 모르는데 연락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데?" 라고 정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그리고 꼭 이걸 콜로 해야 하냐고, 이메일로 써도 충분한 것 아니냐고. 시간이 갈수록 좀 더 자세하고, 복잡하고, 사건의 크기가 큰 상황들이 주어졌고 그렇게 주어진 다른 상황마다 각 색깔마다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던 중 그 발표 과정에서 갑자기 파랑이 팀이 이야기를 했다. “근데 이거 이렇게 발표 안 하고 글로 써서 내면 안돼요?” 그 말을 들은 트레이너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면서 빨강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시간도 없는 데 그냥 빨리빨리 이야기하고 후딱 끝내는 게 낫지 않아요?” 빨강이들의 대답에 트레이너는 빙긋 웃었다. 이미 대충 예상이 되겠지만, 빨강 & 노랑이들은 주로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프런트 오피스(front office) 부서(세일즈나 클라이언트 릴레이션쉽 부서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반면 초록 & 파랑이들은 오퍼레이션(operation, 실제 업무 처리),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회사 내 규율 등 내부 프로세스 감시의 역할) 등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 진 열띤 토론들에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른 트레이닝의 마지막 세션은 이제까지 진행된 트레이닝에 대한 개인 감상 발표였다.  다만 의견을 말할 때 한 가지 룰이 있었다. 불만을 말하기 전 꼭 단 한 가지라도 상대방에 대한 칭찬을 먼저 할 것. “파랑이들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아주 침착하고 객관적으로 사안을 파악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완전히 결론이 날 때까지 피드백을 주지 않아 듣는 입장에서는 답답해요”, “빨강이들은 불편한 상황에서도 클라이언트에게 연락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요. 은행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때로는 우리 대신 화난 클라이언트와 맞서기도 해요. 하지만 빨강이들은 사항이 채 다 분석이 되기도 전에 자꾸 결론을 내어 놓으라 종용해요. 우리가 대답을 내지 않는 건 일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직 분석을 하고 조사하고 있는 중인데, 우리가 꼭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매도를 해서 기분 나쁠 때가 있어요” “노랑이들은 언제나 유쾌하고 즐겁고 모임을 주도하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참 잘해요. 그런데 업무 이외의 대화를 너무 많이 해서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질 때 그에 대한 반박의 사유부터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 감상평을 내놓으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이 답답했던 점부터 떠올랐다. 하지만 트레이너가 정한 전제 조건에 따라 상대의 장점을 억지로라도 찾아내고 먼저 이야기하는 과정을 겪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절로 ‘아, 빨강이들은 아마도 이래서 이렇게 했나 보다..’라는 상대에 대한 이해 프로세스를 거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서로에 대한 사과 아닌 사과들. “그때 네가 아직 준비도 안 되어 있었을 텐데 무턱대고 너 자리로 찾아갔던 거 미안해”, “내가 아직 조사를 하고 있다고 너한테 중간중간 이야길 을 해줬으면 너도 마냥 기다리지 않고 클라이언트랑 뭔가 해결책을 찾아나갈 수 있었을 텐데 너 이메일에 답장 안 해서 미안해”. 실제로 이는 이 은행에서 이뤄지는 모든 소프트 스킬 트레이닝의 전제 조건이자 실제 업무에서도 적용하기를 바라는 스킬이기도 하다. 칭찬의 힘이라는 것, 역지사지의 힘은 생각보다 커서 개인적으로 난 2년 반 넘게 이 은행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회의 중에 상대와 얼굴이 붉히거나 언성이 높아지는 상황을 본 적이 없다. 이는 클라이언트 미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무리 클라이언트의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낼 지라도 우선 클라이언트 의견에 대한 칭찬이나 약간의 동조로 시작하며 논지를 전달하는 것과 바로 아니 그것은 아닙니다, 라며 이어가는 것에는 분명 큰 결과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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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을 마무리하며 트레이너는 힌 사람 한 사람에게 대형 레고 같은 블록을 건넸다. 그리고는 자신의 성향에 따라 블록을 쌓아 책상 위에 두라고 했다. 예를 들어 노랑 성격이 강하고 그다음으로 초록 성격이 강했던 나는, 노랑을 제일 위에, 초록을 그 아래에 쌓아 내 책상에 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트레이너는 상대랑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가서 이 사람이 대면으로 싸워도 되는 사람인가 이메일로 싸워도 되는 사람인가, 이 사람은 어떤 식으로 갈등 상황을 이해하고 반응을 하는 가를 미리 좀 생각해 보고 싸움의 준비를 하라고 장난 섞인 말투의 뼈 있는 멘트로 트레이닝을 마무리했다. 나는 나 나름의 입장이 있고, 너는 너 나름의 입장이 있다.  너무나 뻔해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모든 갈등의 근원은 결국 서로의 ‘다름’과 ‘이해의 부족’에서 시작되고 결국은 상대방의 성향과 입장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쉽게 ‘더불어’ 일하고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게 결국 이 트레이닝의 목표였다.


트레이닝 이후 받은 검사지를 통해 내 성향에 대해 꼼꼼히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그리고 부록처럼 함께 엮인, 하지만 실제로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페이지였을 곳에서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그들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불편해하는지 등에 대해 정말 꼼꼼히 읽어 보았다. 이 트레이닝은 신입 직원이 들어오면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트레이닝 중 하나인지라 모든 동료들의 책상에는 이 색깔 블록이 놓여 있었는데, 트레이닝이 끝난 후 사무실 한 바퀴를 천천히 돌며 어떤 사람은 어떤 유형인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가 자주 같이 일하고, 자주 부딪히는 사람들의 경우엔 핸드폰 메모 장에 꼼꼼히 메모도 해 놓으며. 내가 그렇게 하릴없이 사무실을 어슬렁 거리는 내게 동료들이 고개를 들어 “너 적성검사 트레이닝받았구나?” 라며 씽긋 웃어 보였다.


상대에 대한 이해의 노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고 자기 성향만을 어필하는 현재의 MBTI 유행을 보며 생각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목에 핏대 세워 가며 내 성향을 어필하고 나와 비슷한 성향에 맞아 맞아하면서 물개 박수를 친 만큼, 가깝게는 내 배우자는 어떤 성향인지, 내 동료는 어떤 이유에서 이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했을까,라고 알아보고 이해를 해보려고 한 적이 있는지. 왜 내 남자 친구는 그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을 했고, 그 사람의 유형을 생각해 볼 때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불편해하고 또 어떤 식으로 갈등 해결을 하는 것을 선호하는지. 난 이런 성향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했다! 그에 대한 댓글 또한 대부분 그러하다. “와 이거 진짜 ” “도 딱 이러는데” “이거 완전  이야기” 가끔은 친구나 남자 친구/여자 친구를 태그 하기도 한다 “자기, 이제 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 가지?” 기가 빨린다. 갈등 상황을 견디는 게 어렵고 다 좋게 좋게 지냈으면 좋겠는 노랑이적 성격과 대화 상대방이나 상황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걸 좋아하는 초록이 성격을 가진 자는 오늘도, 지금도! 요즘의 MBTI 유행이 너무 힘들다. 아, 이것도 너무 ‘노초’인 내 위주의 생각이던가? 진정 어. 렵. 도. 다!


- ‘[홍콩이야기 2] 난 MBTI 가 싫어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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