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What brought you to HK?)”
홍콩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나 또한 근 12년을 홍콩에 살면서 정말 저 질문을 천 번 이상 들었던 거 같은데 대충 기분에 따라, 혹은 상대방을 봐가면서 대충 인사치레의 답을 건네기도, 혹은 진솔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인터뷰 같은 곳에서 물어볼 때의 답이라면 당연히 “일 때문에 오게 되었어요”, 하지만 정말 진실된 답은 ‘옛날 남자 친구’.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베이징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했더랬다. 당시 중국에서 리조트 사업을 하고 계셨던 아빠의 희망에 따랐던 것인데 뭐 대충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알겠지만 난 당시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흥미가 없던 상태였다. 그 나라나 언어에 대한 흥미 하나 없이 간 곳에서 나를 잡아 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음식, 그리고 반 사람들과 즐기는 술자리 정도였달까? 처음으로 반 배정을 받고 자리에 앉았던 날,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흰 피부에 피부만큼 하얀 (그 당시 내겐 하얘 보였다. 이후 스웨덴에 간 후 그 친구의 머리카락 색이 오히려 진한 색 쪽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머리카락까지 뭔가 엘프 같기도 한 친구가 내 옆에 앉았다. 사뭇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인상과 다르게 그 친구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얼굴이 빨개졌는데 보는 내가 다 민망해서 파트너와 회화 연습을 해야 할 때를 빼고는 의식적으로 이 친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참고로 나랑 말할 때만 빨개지는 게 아니라 발표를 할 때도 빨개지고 중국어가 잘 안 나와도 빨개지고 하니, ‘이 친구가 날 좋아하나?‘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 더랬다. 반에는 여러 국적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래도 게 중에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게 이 친구였던 지라 시도 때도 없는 이 친구의 홍조 증상을 감내하며(?) 나는 종종 이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고는 했었다. 물론 대화를 주도하는 쪽은 나였다. 첫 한 달이 지나고 친 시험에서 반 친구들보다 너무나 월등한 성적을 받은 나는 월반 권유를 받았고, 이후 바로 다음 레벨 반으로 옮겼고, 어차피 바로 옆 옆 반이었기에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정도 이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고는 했다.
내가 어학연수를 간 당시 내 고등학교 친구 중 하나도 다른 학교에 어학연수를 와 있었는데, 주말이면 그 친구와 만나 우다커우(한국인 유학생 지역. 지금은 어떤 지 잘 모르겠다)에서 삼겹살도 굽고, 푸다오(개인 선생님) 정보도 주고받고, 한국말 쓰는 것에 대한 회포도 풀고는 했더랬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어느 정도 베이징 생활에 익숙해 갈 무렵 문득 우리도 클럽 한 번 가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오래간만에 나가 광란의 밤을 보낼 생각에 혼자 한 껏 들떠 룰루 랄라 기숙사를 돌아다녔는데 또 마침 나와 같은 층에 살 던 스웨덴 친구가 그런 나를 보고 어디 좋은 데 가냐고 물어왔다. 싼리툰(대사관 지역. 2008년 당시만 해도 딱 이 주변에만 외국인들이 갈 만한 바나 레스토랑들이 포진해 있었다)에 놀러 간다는 말을 하자 “어 나도 거기 가보고 싶었는데” 라던 이 친구. 뭔가 너무 애절하게 가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내는데 순간 이에 나도 흔들려 그 친구에게 잠깐만 기다려 보라 하고 고등학교 친구에게 얼른 문자를 보냈다. 혹시 내가 그때 말했던, 종종 만나 밥 같이 먹는다는 스웨덴 친구도 데려가도 되냐고.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안 그래도 너 혼자 와서 나중에 집에 어떻게 갈까 걱정이었는데 잘됐다며 보디가드처럼 달고 오라며 흔쾌히 반겨 주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어느 정도 눈치를 챘겠지만 그 친구와 나는 그날 이후로 커플이 되었고, 베이징에서 서로 20대의 사랑을 풋풋하게 함께 키우다 연수 기간 종료 후 스웨덴 친구는 홍콩에 있는 대학으로, 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복학을 했다. 이후 우리는 꾸준히 장거리 연애를 이어 나갔다. 20대 초반의 사랑은 불처럼 강렬했고, 서로 죽고 못살겠다는 우리는 그 어린 나이에 결혼하자는 약속까지 하며 졸업 이후 난 겨우 겨우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홍콩으로 오게 되었다.
뭐 어떻게 헤어졌나 하는 이야기는 자세히 풀지 않겠다. 다시 만난 우리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더 이상 기억 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게 되었다. 당시 홍콩대를 다니던 그 친구는 졸업 후 바로 스웨덴으로 돌아갔고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는 홍콩에서 계속 나의 삶을 이어 가기도 했다. 그 이후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는 지금 다시 그 시절을 회상하기만 해도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전 세계에서 뉴욕과 함께 악명 높은 렌트비 1, 2위를 엎치락뒤치락하는 곳에서 친한 친구 하나, 기댈 사람 하나 없이 사는 20대 중후반 신입의 삶은 정말 고달팠다. 이후 알게 된 한국인 언니들, 그리고 모임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이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것이다, 홍콩은 한국에 비해 연봉 인상률이 좋기 때문에 처음 2~3년만 버티면 빛이 보인다며 나를 달랬지만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기는 하다), 남에게는 2~3년이라 뭉뚱그려 말할 수 있는 시간도 나에게는 매일, 매 시간, 매 분, 매 초였다. 보통 홍콩에 살면 벌이의 30%를 렌트로 쓴다고 하는데 박봉이면 박봉일 수록 그 30%의 크기는 더 크게 다가왔다. 그때 월급의 30%가 렌트로 나가는 것 또한 난 너무 힘들었었는데 요즘은(팬더믹 이후로는) 사회초년생들이 이 보다 더 많은 퍼센티지를 월급을 렌트로 쓰고 있다고 하니 남의 일이지만 남의 일 같지 않게 걱정이 많이 된다. 그리하여 나는 내 인스타그램에서 내 생활을 보고 ‘아 홍콩에 가서 일하면 저렇게 매일 외식에 와인에 파티에 여행에 정말 멋진 삶을 사는구나’라는 환상에 빠진 사회초년생들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 삶은, 홍콩에 오자마자 주어졌던 것이 아닌 10년 정도의 인고의 시간 이후에야 이루게 된 삶이었다는 것. 특히나 첫 5년은 정말 매일매일이 괴로웠으며 정말 매일매일 한국으로 돌아가버리고 싶은 마음을 눌러 가며 버텨낸 악착같은 시간들이었다는 것.
어찌 저찌 했든 간에, 내가 홍콩에 온 이유는 ‘전 남자 친구’였으며 어찌 보면 대책 없이 로맨틱했던 20대의 열정이었다는 것. 홍콩 살이 첫 년만 해도 눈치 없이(?) 사람들이 물어보면 물어보는 대로 성실한 답을 했다. 이 들이 내 뒤에서 내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말이다. 너무 사람을 전형화시키는 것 같고, 이는 사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이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말을 하자면, ‘내 경험상’ 그런 호사가들은 대부분 한국 아줌마들이었다. 우리 엄마는 퇴직하실 때까지 평생 교편을 잡으셨기에 사실 난 우리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거의 보지는 못했었는데, 정말 딱 한 번, 네 살 터울인 내 동생이 태어났을 때 엄마가 2년인가, 육아 휴직을 내셨다. 평소에도 워낙에 에너지 넘치고 활동적이던 엄마는 집에만 있는 게 심심하셨던 지 곧 동네 아주머니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고 항상 친절하고 사교적이며 이거 저거 나누기 좋아하는 엄마 성격 때문인지 우리 집에서는 곧 정기적으로 반상회가 열리듯 아주머니들 모임이 열리게 되었다. 아주머니들이 각자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가져다주고, 엄마는 뭘 이런 걸 자꾸 가져오냐며 손사래를 치며 반찬을 받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이미 이를 예상했던 엄마는 저번에 보니 그 집 아이들 김을 참 잘 먹더라면서 이거 완도부터 배달받은 김인데 갈 때 좀 가져가라며 김을 담은 종이봉투들을 건네고, 이후 엄마가 믹스 커피를 타 와서 하나하나 배분을 하고 자리에 앉으면 비로소 이루어지던 동네 아줌마들의 온 동네 소식 열전. 당시 여섯 살 정도였던 내가 들어도 귀가 쫑긋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몇 층에 그 잘생긴 아저씨가 회사 가서 그렇게 인물값을 한다더라. 여직원들이 얼마나 따라다니는지 아주 밤마다 그 집에서 부부 싸움하는 소리로 잠들기가 힘들다.’, ‘누구네 집이 보증을 잘못 서서 하던 사업을 쫄딱 망해 먹었다더라. 그래서 결국 그 집 아줌마가 다시 재취업을 했다더라’. 실제로 가서 들은 이야기들 혹은 목격담들과 함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인지 출처 모를 ‘~ 카더라’ 통신이 합세해 아니 이렇게 조용한 동네에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다고? 싶은 이야기 대잔치가 한 바탕 풀리고 나면, 어느 정도의 대화의 갈증이 해소가 된 아주머니들은 다들 저녁밥을 하러 집으로 총총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어지던 엄마의 신신당부. “너 지금 너 여기서 들은 이야기, 절대로 다른 데 가서 하면 안 돼.”
‘호사가’라는 단어가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영어로는 뭘까? 막상 생각해보니 잘 떠오르지가 않아 네이버 사전에 찾아보니 ‘busybody’, ‘nosy parker’ 라 한다. 약간 좀 애매한데.. 내 옆에서 이어폰을 끼고 아침부터 신나게 복싱을 보고 있는 영국 남자 친구를 불러 이게 자주 쓰이는 단어인지 물어본다. “글쎄? 이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난 이 단어를 써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그럼 ‘호사가’가 영어로 뭐냐고 물어보니 (영어로 풀어서 설명해줬다) 한 3초 생각하더니 “asshole? (나쁜 새끼?)” 하고는 다시 이어폰을 끼고 남은 복싱을 보러 가버린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그 순간 나도 뭔가 머리가 번쩍 했다. 그래, 남의 말하기 좋아하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냥, ‘나쁜 놈들’인 것이다. 실제로 내가 만난 많은 외국 친구들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불편해했다. “I think we should not talk about this now. Let’s ask him/her in person when he/she is back (우리 지금 이런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할 거 같아. 우리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나면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자).” 이게 남의 삶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또 갖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개인주의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평소 생활 습관이나 사고방식을 생각해 볼 때 뭐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답이기는 했다. 물론 외국이라고 호사가들이 없겠나, 온 동네방네 남의 말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 분명히 외국에도 있다. 하지만 너무나 다행히도 내 주위에는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상당수이다. 기쁜 소식은 널리 널리, 나쁜 소식은 내 속에만 품어야 한다. 물론 가끔 서로 모여 타인의 나쁜 소식을 셰어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 정말 정확하게 일어난 상황에 대한 팩트 전달, 그리곤 ‘우리가 그(그녀)를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란 진지한 고민이지, 어머 얘, 너네 그거 들었니? 세상에나 걔가 그랬대. 이런 식의 가십 전달이 형식이 절대 아니었다.
쓰다 보니 너무 한국 아줌마들을 매도한 거 같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다. 특히나 나도 결혼만 안 했지 이미 나이로 보자면 영락없이 이 한국의 아주머니 그룹에 속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며, 모든 한국 아줌마들을 싸잡아 욕하려는 의도도 전혀 아니고, 그저 내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한국 아줌마'라는 그룹에 속한 그녀들에 의했던 것 일뿐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리고 나라고 완벽하겠나. 나 또한 ‘남 걱정’에 열을 올리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것을. 이에 과거에 나 또한 내 친구들에게 정말 제대로 지적을 당한 적이 있었다. “제니퍼, 물론 네가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닐 테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네가 꼭 남의 일을 너무 쉽게 여긴다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아. 우리 이제 그 이야기는 하지 말고 다른 즐거운 이야기들을 하도록 하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난 정말 잘 알고 있어. 넌 아주 좋은 친구이고, 그렇기에 너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어. 내가 널 속상하게 만든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 다시 생각해도 귀가 화끈해질 정도로 창피하고, 다시 생각해도 너무 고마운 친구이다. 따뜻하지만 정말 뼈 있는 지적을 받은 뒤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고백하건대 지금도 가끔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하던 적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창피했고, 또 나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내가 모르는 사이 다른 이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나를 생각하려 노력하며 입을 꾹 닫는다. 해가 갈수록 더더욱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인생은 부단한 자기 성찰과 노력의 연속이다.
그 스웨덴 친구와 결별을 하고, 그 이후로 몇 명의 남자들을 더 사귀고 헤어지고를 하면서, 나 모르는 사이에 한국 아주머니들 그룹 사이에서 무수한 소문들이 양산이 되었던 듯싶다. 몇 년 만에 만났던 언니가 대화 시작 10분 만에 지금 누구 만나는 사람 없냐며, 아줌마들 사이에서 제니퍼 연애사가 제일 핫해,라고 눈빛을 반짝이며 말할 때, 정말 나도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좋은 남편 만나 좋은 집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며 사모님같이 살면 뭐하냐, 행동이 따라 주지를 않는 것을. 본인의 의도를 감출 생각도 안 했다.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것도 인지를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들 특징 중 하나가 본인 이야기는 잘 안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오지랖이 그저 타인에 대한 악의 없는 '업데이트'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 대화의 대부분은 내 근황 업데이트가 아닌 남의 근황 업데이트이다. 슬슬 대화가 지겨워졌다. 이 사람은 이렇게나 자기 삶에 대해서 말할 게 없나 싶기도 하고, 본인이 해 놓은 게 있어서 자기도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면 이야기가 돌까 봐 걱정을 하나 싶기도 했고, 왜 이렇게 남의 삶에 집착할까 싶기도 했다. 한 번은 갑자기 인스타로 알고 지내던 인스타 지인에게 DM이 온 적도 있었다. “제니퍼 씨, XX 씨한테 제니퍼 씨 개인 이야기하는 거 조심하세요. 제가 어쩌다 그분 모임에 나가게 되었는데 제니퍼 씨 연애 이야기며 개인적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정말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제니퍼 씨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분께 제니퍼 씨 그런 분 아닌 거 같다고 이야기했었어요. 인스타에서 보니 친하게 지내시는 거 같던데,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실제로 자주 보지는 않지만 나는 친하다 생각했던 언니였고, 내 속 이야기나 내가 겪고 있었던 개인적인 어려움들도 다 풀었었는데 정말 그때 들었던 배신감과 받았던 상처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다. 홍콩이라는 정글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거의 12년을 굴렀던 서른일곱의 나도 이러한데 이십 대 후반의 나는 정말 어떠했을까.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난 그 스웨덴 친구를 사랑했던 죄 밖에 없는데, 그래서 장거리 연애를 감수했고, 홍콩이라는 나라까지 날아왔고, 그와 헤어지고 난 후 정말 고통스러운 1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던 나는 ‘외국인만 좋아하는 여자’로 낙인찍혔고 곧 ‘남자 엄청 만나고 다닌다’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말 한마디에 따라 사람 병신 되기 참 쉽다는 걸 깨달았다.
난 카르마(karma)를 어느 정도 믿는 편인데 조금은 오래전 아 이 카르마가 나 대신 복수를 해 주는구나! 싶게 짜릿했던 사건이 있었더랬다. 평소에도 남 이야기 하기 참 좋아하던 그 언니는 프랑스 배우자가 있었는데, 오늘 입고 나온 밍크 조끼가 2천만 원이라는 둥 (그 말을 할 때 마침 밍크를 매우 좋아하는 어머님을 둔 친구가 내 옆에 있었다. “언니, 이거 들어보니 정말 가벼운 게 쪽 밍크인데 무슨 쪽 밍크가 2천만 원이에요, 이백만 원이라면 모를까!”라는 그 친구의 말에 언니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가득해 시뻘게졌었다), 남자 친구가 결혼하면 샤넬 백을 사주기로 했다는 둥 평소에도 허풍이 좀 심했고 (난 진짜인 줄 알고 부러워서 일부러 프랑스 형부를 띄워주기 위해 커플 앞에서 그 이야기 꺼내며 언니 너무 좋겠다 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프랑스 형부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며 너무 당황해하고 내 앞에서 언니에게 크게 화를 냈던 사건도 있었다) 뭔가 그룹으로 여러 명이 만날 때면 꼭 소수의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있었던 일들만을 말하며 대화해 나머지 사람들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는 사람을 1대 1로 만날 때는 타인의 가십들을 긁어모으고는 했는데(그리고 자신이 제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그러고 나선 다른 사람들을 만나 "너 그거 들었어?" 라며 잔뜩 신난 얼굴로 여기와 서는 저 이야기, 저기 가서는 이 이야기하는 꼴이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내 눈에도 딱 철없는 중학교/고등학교 수준의 정신연령에 머무는 것처럼 보였다.
내게도 굳이 본인과 친하게 지내던 한-프 커플 이야기하며, 그 (한국) 언니는 다 좋은데 너무 교양이 없다고 자기 남자 친구 아니었으면 같이 어울리지 않았을 사람이라 하지를 않나, 또 다른 한-영 커플과도 겉으로는 잘 지내면서도 “XX는(한국 여자) 참 뇌가 순수하다며 정말 너무 재밌어, 그지?” 라며 정말 대차게 그 사람을 돌려까질 않나, 나중엔 하다 하다 내가 소개해줬던 내 친구한테도 당시 내 스웨덴 남자 친구가 별이가 시원치 않아서 제니퍼가 고생이라는 둥 정말 별 이야기를 다해 일치감치 딱 손절을 해 버렸다. 물론 집에 와서는 너무 속상한 마음에 당시 스웨덴 남자 친구한테 장장 두 시간을 하소연을 하며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지만. 그렇게 인연을 끊고 산 지 2년 정도 흘렀을까, 우연한 계기에 한 데이팅 앱에서 그 프랑스 형부 사진을 보았다. 내가 그 커플과 만나고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그 커플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들 덕분에(?) 그들이 현재 결혼 중인 게 맞고, 심지어 그 언니는 임신을 한 상태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앱 같은 경우 반 경 몇 km 내에 있는 앱 사용자들을 보여 주고 서로 매칭이 될 경우 대화를 할 수 있는 앱이었는데, 만약 유저가 한동한 사용을 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목록에 뜨게 하니 그 이후로도 몇 달간 그 형부 사진이 자꾸 떴던 걸 보아 아마 도그 앱을 주기적으로 사용하는 듯 보였다. 그때의 짜릿함이란! 결국 이런 식으로 벌을 받는구나. I love you Karma!!!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다니, 저질 중에 저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최악의 인간이라 손가락질받아도 상관없었다.
서른일곱 살이나 먹고도, 이제는 이 나이 먹도로 남자 친구가 없었더라면 흠이 되는 나이가 되고 나서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그 질문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해진다. 뭐 하러 다 말하느냐, 다들 대충 거짓말하고 산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게 사람들인데 그냥 둘러대지 뭐하러 다 말해서 네가 상처받냐 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오히려 억울한 마음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피해를 받은 사람이 질책을 당해야 하나, 왜 내가 입조심을 해야 하는가. 오히려 그런 말을 옮기고 다니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불쌍한 마음마저 든다. 저들은 저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항상 입조심해야 할 정도로 온통 주위에 다른 이들 말을 막 하는 사람들밖에 없구나. 내 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든다.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마음에 품고, 그들 선에서만 간직해 주는 정말 고마운 이들.
그래서 난 오늘도 당당히 말한다. “12년 전 한 스웨덴 사람을 사랑했고, 2년간 장거리를 연애를 하다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으며 20대 중반이라는 혈기왕성한 나이에 앞뒤도 재지 않고 사랑이라는 마음 그 하나로 홍콩으로 건너왔습니다. 그 사람과 인연이 끝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전 홍콩에 사는 게 맘에 들었고, 그 이후로도 열심히 살다 보니 벌써 12년이 흘렀네요. 더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제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보지 마시고 저한테 바로 물어봐 주세요. 제가 친절히 다 이야기해 드릴게요.”
- ‘[홍콩이야기 3] 홍콩에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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