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본을 기다리며
본 시리즈 여섯 번째 이야기가 나온다고?
*<본 아이덴티티>를 비롯한 본 시리즈의 세부 내용이 다수 포함된 글입니다.
하버드를 중퇴하고 그저그런 배역을 전전하던 맷 데이먼이 죽마고우 벤 에플릭과 공동으로 집필한 시나리오 <굿 윌 헌팅>을 통해 스타로 발돋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그가 헐리우드에서 대체 불가한 명배우로 거듭난 작품은 누가 뭐래도 '본 시리즈'의 시작, <본 아이덴티티>다.
일종의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본 레거시>를 골수 팬들이 거의 쳐 주지 않는 분위기인데다, 오랜만에 본체가 컴백한 <제이슨 본>도 작품성이나 흥행 면에서 미적지근했던 터라, 첫 편에서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까지를 트릴로지로서 꽉 닫힌 완결된 세계관으로 받아들이는 관객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중 하나다.
제이슨 본은 헐리우드 프랜차이즈 메인 캐릭터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냉전이 끝난 21세기에 스파이들이 나아갈 이정표를 보여준 장본인이다. 원작은 1927년 생의 작가가 불혹이 넘어 작가로 데뷔하고, 냉전 시대를 직접 거친 후 1980년대에 쓴 작품이지만, 2000년대를 배경으로 세련되게 각색된 작품은 이념 갈등이 사라진 시대에도 고독한 스파이의 세계가 여전히 건재함을 세상에 증명했다.
원작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는 기회를 갖기로 하고, 오늘은 전설로 남은 시네마틱 시리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본 시리즈가 거둔 성공의 비결은 기본 중에 기본이 있다. 바로 내용과 형식의 조화다. 본은 모든 기억을 잃고 자신의 원죄이자 주적인 조직의 배후를 쫓는 위태롭고 고독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인물을 담아내는 영화의 형식도 이와 정확히 닮아 있다.
고독한 스파이를 담아내겠다며 수다스러운 영화의 처참함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 명절이나 휴가철 개봉된 첩보 영화를 보러 갔다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면 바로 이런 경우였을 확률이 높다.
본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실험의 부작용으로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는 데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당연히 할 말이 많지 않다.
<본 아이덴티티>에서 작전에 실패하고 바다에 둥둥 떠 있던 제이슨은 한 원양어선에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노련한 선장은 긴 항해를 떠나는 배에 갖춰져 있는 기본적인 의료 도구들로 그의 등에 박힌 총알을 빼내는 등 기본적인 처치를 해준다. 그러다 그의 엉덩이 부근에 수상한 흉터를 발견하고, 그 부위를 째서 스위스 은행 계좌가 담긴 소형 레이저빔을 꺼낸다.
나는 영화를 예닐곱 번째 볼 때쯤에야 이 장면에서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아무리 망망대해 짬밥이 극에 달해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한들, 남의 몸에 있는 흉터를 보고 거기에 뭐가 들었다고 생각해 굳이 칼을 댈 이유가 뭐란 말인가? 최근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며 이런 의문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몰입이 깨진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특유의 사로잡는 몰임감의 비결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영화가 이 장면을 관객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씬에 다른 선원을 추가하고, 선장과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이거 봐, 이 흉터.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 꼭 뭔가 넣고 꿰맨 것처럼."
"한번 갈라 볼까?"
이런 대화가 오간 다음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제이슨 본의 음울함과 혼란스러움은 절반 이하로 곤두박질 쳤을 것이다. 내 생각에 영화는 이걸 이런 식으로 돌파했다. 바로, 선장을 누가 봐도 비범한 인물로 보이도록 연출하는 것. 그 선장이 갑자기 제이슨 본의 머리를 열었다고 해도 관객들은 납득했을 것이다.(원작에서는 진짜 머리를 연다. 선장이 아니고 의사가. 영화 속 선장은 본을 구한 선장과 선장이 육지로 가 본을 맡긴 괴짜 의사가 합쳐진 인물이다.) 영화 예술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것은 언제 연출, 스토리가 아닌 연출에 있음을 일깨워 준 장면이다.
<본 얼티메이텀>에 이르면,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영화의 장기는 정점에 달한다. 본 시리즈는 매번 CIA 중견 간부를 메인 빌런으로 내세우는데, 세 번째 시리즈의 빌런인 노아 보슨이 단연 밉상이다. 그가 식당에서 '염소 치즈와 후추가 들어간 웰빙 오믈렛'을 주문하는 장면이 있다. 사방팔방 사살 명령을 내려 놓고, 본인 몸은 끔찍히 챙기는 파렴치한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잘 드러낸 장면 되겠다.
시리즈는 이처럼 말하지 않음으로서 말하고, 압축적으로 말하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제이슨 본이라는 인물을 담아내는 탁월한 그릇을 완성했다. 그 완결성은 정말이지 아름다워서 다음 시리즈 소식이 들릴 때마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먼저 고개를 들도록 할 정도다. 어쨌거나 내 마음 한켠은 언제나 그를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는 제이슨 본은 여섯 번째 시리즈로 돌아오는 쉰 살이 넘은 맷 데이먼이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이는 정확히는 '다음' 제이슨 본이다. 누가 IT 시대를 넘어 AI 시대에 도착한 인류에게도 여전히 스파이의 존재 가치는 유효함을 증명할 것인가?
매거진을 만들던 시절에 스파이 영화에 바치는 헌사 격으로 썼던 글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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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히어로 전성시대 이전에는 사실 스파이의 시대가 있었다. 살인 면허를 들고 다니며 아이덴티티의 위협을 감수하고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던 스파이들의 시대. 초능력도 슈트도 없이 맨몸으로 세계를 누비던 냉전 시대 스파이들의 양성 과정을 상상해 본다.
그들은 명문대를 졸업 후 자원입대해 엘리트 장교 코스를 밟는다. 고도의 훈련을 통과한 끝에 양복을 입고 국가 정보기관에 출근한 첫 날,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 맞고 정신을 잃었다가 어둑하고 축축한 어느 지하실에서 눈을 떠 불사의 인간 병기로 재편된다. 스파이 영화의 시작은 대개 이런 식이다. 한때 세상을 둘로 갈라놓았던 이념의 종죽국들은 앞두투어 체제의 수호자, 스파이 영화를 생산해 냈다.
시리즈로 계약이 되어 있는 그들은 여전히 한두 해 걸러 임무를 맡는다. 격변한 세상에서 대의와 명분을 잃고 일개 점조직을 소탕하거나 소형 핵폭탄을 제거하러 다니는 그들을 보면 나와 친구들의 처지가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임무 단위로 축소한 그들의 존재는 과거처럼 화려하고 영광되지 않다. 어딘가 혼란하고 우울한 기색을 감추기 어렵다. 길을 따라 걷지만 방황하거나 방황하지 않기 위해 가던 길을 계속 가는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
산업화의 열전이 끝난 뒤에 우리는 최첨단, 디지털, IT 따위의 단어가 내뿜는 냉기에 노출된 채 세상을 바꿀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몸을 떨었다. 학교도 나왔고, 지원했으며, 견뎠고, 필요에 따라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상은 변했고, 지금껏 네가 준비했던 일들은 로봇과 인공 지능이 할 것이니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한다. 정예 요원을 꿈꾸던 젊은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핵폭탄 청소부가 된다.
각자 일을 마치고 접선하듯 모여 이런 얘기를 나눌 때마다, 한 친구는 검지를 치켜세우고 내게 단호히 말한다. 통장을 쪼개고, 적금을 들라고! 그 말에 하릴없이 고객를 끄덕이고 있자면 또 다른 친구의 꿈결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여행을 떠나. 친구들은 날 위해 이토록 충고를 아끼지 않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입을 연다. "성공한 스파이처럼 사는 거야." 영웅의 완성은 입신양명일지 모르나 스파이의 삶은 성공적일수록 드러나지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삶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고, 작전을 수행한 뒤에는 은밀하고 평범한 행복 속에 살다가 비밀스럽게 사라지는 거다. 존재를 감추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작전이 성공적이라면 외부러부터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작전에 스스로 얼마나 제대로 준비되었는지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자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