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남은 여행 사진을 보냈다.
엄마는 친구 조문을 가는 길이라고 했다.
엄마의 친구가 돌아가신 것인지 상을 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고민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잘 다녀오라고 말한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상가에 가신다고 하면 누가 돌아가셨냐고 물어보곤 했다.
누가, 이 평범하디 평범한 날 누가 죽었는지 궁금했고, 그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오늘 죽는다.
내가 죽어서 나의 친구나 가족이 나의 장례식에 오는 중이고 그러던 중에 연락이 와서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라고 답했을 때 상대방이 누가 죽었느냐 묻지 않는 상상을 하면 조금 슬프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절대 참의 명제를 가짜로 믿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면 살아가는 일은 몹시 중독적이라 멈출 수가 없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이름 모를 타인의 부고를 접하는 일은 재생중인 비디오 테이프의 화면을 순간적으로 일그러트린다.
이게 맞아?
그렇게 화면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방해같기도 구원같기도 한다.
엄마는 고인의 명복을 빌고 나는 엄마를 위해 출력을 맡길 여행 사진을 고르며 토요일 오후를 보낼 것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할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