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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Jun 10. 2022

몹시도 아름다운 당신의 글

유난히 슬프고 아름답게 읽힌 에세이 세 권의 리뷰

1. 『이스탄불』, 오르한 파묵 지음



오르한 파묵을 처음 만난 책이 바로 이 『이스탄불』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 100쪽까지였지요. 「파리리뷰」에 실린 파묵의 인터뷰를 읽고 생긴 호기심에 이 500쪽짜리 에세이를 덜컥 집어들었는데, 터키도 이스탄불도 그의 문체와 이난아 교수의 번역도 모두 낯설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탄불 위에 당시 그의 최근작이었던 소설을 펼쳐서 먼저 읽었죠. 그렇게 오르한 파묵의 세계 – 이스탄불에 들어서고 나자 이 책도 술술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은 ‘도시 에세이’ 중 가장 좋아하고 배우고 싶은 작품이 되었고요.


미국에 체류한 기간을 제외하면 오르한 파묵은 평생 이스탄불에 살았습니다. 그의 소설도 시대는 저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넓어져도 터키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이 도시가 제가 사는 도시처럼 친밀해집니다. 언젠가는 이스탄불을 거닐다가 작가를 만나는 꿈도 꿨습니다….

그런 저자가 일종의 자서전이자 ‘이스탄불’이란 도시를 주제로 쓴 에세이가 바로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청년기를 중심으로 ‘이스탄불’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지요. 가족과 도시의 사람들, 소설가와 시인, 역사학자 들, 나름의 환상을 가지고 이스탄불을 찾았던 서양의 예술가들, 사건들, 거리의 풍경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휘감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비애’와 거기서 파생된 감정들. 파묵의 소설이 그렇듯 이 에세이도 읽고 있으면 어쩐지 슬퍼집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비극이나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작가의 이스탄불엔 슬픈 냄새가 가득합니다. 여기선 누구나 자신이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릴 뭔가를 떠올리게 되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어떤 면에선 소설을 먼저 접하고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파묵 소설들의 종합판 같은 입문작으로는 『내 마음의 낯섦』을, 신선한 형식의 소설을 좋아하시면 『검은 책』,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면 『순수 박물관』, 추리와 시대물(?)을 좋아하시면 『내 이름은 빨강』을 추천합니다. 언젠가 이 작품들 중 하나를 소개해도 좋겠네요.

나의 출발점은, 어린아이가 뿌연 창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이제, 비애와 멜랑콜리를 구분하는 데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느끼는 멜랑콜리가 아니라, 수백 명의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그 암담한 느낌, 비애에 가까워졌다. 나는 지금 이스탄불 전체의 비애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_132p.

할리우드 영화처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진짜 삶은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고, 나를 포함한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는 엉망이며 특징도 없고 페인트칠도 되지 않은 낡고 오래되고 값싼 곳에서 살아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부차적이며 중요하지 않은 초라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내가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_419p.

아버지는 우리가 인생에 대해 물었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 찾을 수 없을 테지만 그런 질문은 좋은 것이며, (…) 이 모든 고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 고민들로 고심하거나 삶에서 기쁨이나 심오함을 추구할 때 자동차나 집이나 배의 창문을 통해 보았던 모습들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삶은 음악이나 그림이나 이야기처럼 변화무쌍하게 끝이 날 테지만, 우리 눈앞에서 흐르는 도시의 모습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꿈속에 나오는 추억처럼 우리와 함께 남을 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_427~428p.



2.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 지음



메리 올리버의 시와 산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빨리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한 번도 그녀가 산책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이젠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메리 올리버를 읽는 속도는 시인의 걸음걸이보다 느린 편이 알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음미하며 산책하는 중이니까요. 활자와 글줄의 여백 사이로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 숲, “녹슨 색깔로” 반짝이는 바다, 재활용한 자재로 지은 작은 집이 보입니다.


『휘파람 부는 사람』의 원제는 『Winter Hours(‘겨울의 순간들’로 번역)』인데요, 한국어판에서는 시 「휘파람 부는 사람」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 시에서 휘파람 부는 사람은 시인의 동반자였던 말론 쿡입니다. 하지만 편집자 혹은 번역자가 메리 올리버의 삶을 휘파람이란 시어와 연관 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책 제목으로 더 매력적이기도 하니까요. 숲속을 걸으며 휘파람을 부는 사람, 새들도 어디선가 화답을 할 것 같아 기분 좋은 조마조마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계가 없었다면 자신은 시인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게 적확한 표현이라 할 순 없지만, 자연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메리 올리버의 글에는 장엄함이 있습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산세의 장엄, 종교적인 장엄이 아니라 곤충, 새, 하물며 흙에 찍힌 개의 발자국 같은 데서도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부드러운 장엄함 같은 것이요. 산문 「겨울의 순간들」에서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고요. 그녀가 모든 존재에, 거북이 알을 훔쳐 먹으려는 너구리나 집 한 쪽에 놓인 의자, 길에 떨어진 돌멩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결같고 단단하고 절대적인 믿음”이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관찰의 결과를 산문과 시로써 우리에게 돌려줍니다. 이토록 수많은 영혼이 글에서 어른거리는데 어떻게 그 빛깔에 물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수십 년간 같이 산 사람이 갑자기 휘파람을 불어 놀라듯, 어떻게 영혼을 되찾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부전나비라고 불리는 청색 나비들이 비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짝거리며 날아오른다. (…) 한 마리가 잠시 내 손목에 앉는다. 나비들은 나를 단풍나무와 크게 다른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육중한 몸으로 땅에 누워 햇살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반쯤 잠들어 있는, 잎사귀에 감싸여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이 나무 궁전과. _31p.

나는 내 시가 무언가를 묻기를, 그리고 그 시의 절정에서 그 질문이 응답되지 않은 상태로 남기를 원한다. 질문에 답하는 건 독자의 몫임이 작가와 독자 간의 약속에 명시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 시가 고동침을, 숨차오름을, 세속적인 기쁨의 순간을 담기를 원한다. _45p.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_76p.



3. 『다른 딸』, 아니 에르노 지음



열 살 어느 여름 날. 골목길에서 가게를 찾은 손님의 아이와 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손님은 한참 수다를 떨고 있었지요. 그때, 문득 어머니의 말이 들려옵니다. 서로 쫓고 쫓기는 놀이를 하는 중에도 부쩍 낮아진 그녀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박힙니다. 다른 딸이 있었다고, 여섯 살에 병에 걸려 죽었고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그리고 어머니는 이렇게 덧붙이지요. “그 아이는 쟤보다 훨씬 착했어요.”

아니 에르노한텐 그녀가 태어나기 이 년 전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언니가 있습니다. 자기와 달리 착하고 신앙심이 깊은 아이였다고 하지요. 첫 딸의 죽음은 부모님을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아이의 짧은 생애는 가족의 비밀이 됩니다. 아니 에르노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언니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저자의 삶 내내 언니의 존재, 혹은 부재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부모님은 경제적인 이유로 자식은 하나만 기르겠다고 결심한 상태였고,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자신을 낳았을 리 없었을 테니까요. 왜 삶은 언니가 아닌 나를 택했는가? 신을 믿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은’ 나를? 애도와 함께 털어버릴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는 덫이 되고 맙니다.

죽은 사람은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아니 에르노도 파상풍으로 죽을 위험을 넘긴 적이 있고, 딸을 두 번이나 잃을 수 없는 부모님에게 남은 딸은 어떻게든 보호해야 하는 존재이자 유일한 희망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의무였을 수도 있어요. 그걸 저자 역시 느꼈을지 모르고요. 그래서 언니란 존재는 더욱 절대적인 비교 대상, 완벽한 상像으로 커져갔을 겁니다. 이 책의 제목인 ‘다른 딸’은 죽은 언니가 아니라 아니 에르노 자신을 말합니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행복했던 세 가족에게 새로이 나타난 다른 딸.

그래도 이 책은 저자의 불안, 열등감, 죄책감, 빚을 진 기분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만 이야기하진 않아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 영원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에 관한 글이기도 해요. 그리고 짧은 생애 동안 이런저런 이미지를 주변에 남기고 떠난 한 아이, 결국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잃은 아이를 향한 상상 혹은 애도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몇 장 안 남아 있는 사진 속에서 언니는 항상 얼굴을 찡그리고 있습니다. 죽은 언니를 아는 사촌이 이런 결론을 내리지요. “그 아이는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 착하고 신앙심 깊은, 성녀 같았던 아이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아니 에르노가 “존재하기 위해서” 끝내 “부인해야만” 했던 당신은요?

삶과 죽음은 이야기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 짧은 책에는 슬픔과 분노, 두려움, 부채감, 비참함, 이기심, 자기애와 자기혐오, 그리고 용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문장 위에 놓인 그 감정들을 어루만지다가 책을 덮으며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는 독자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나는 이 이야기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요. 한 번도 나누지 않았던 언어들만 있을 뿐. _20p.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_39p.

흐린 일요일, 이브토에서 산책을 합니다. 그들은 내 손을 잡고, 나는 자갈길 위로 걸어가는 그들의 신발과 그 옆의 조그만 내 신발을 바라보아요.
이런 이미지 속에서, 당신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어요. 나는 그들과 함께 본 그곳을 당신에게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있었던 그곳에 당신을 데려다 놓을 수 없고, 내 존재를 당신의 존재로 바꿀 수 없습니다. _82p.




* 이 리뷰는 여분의책방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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