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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Jun 28. 2022

다시 떠나볼까요?

아직 비행기표를 끊지 못했다면 책이라도 펼쳐 보자

1. 『우연히, 웨스 앤더슨』, 월리 코발 지음



완벽한 대칭, 손대면 묻어날 것 같은 생생한 컬러, 배경의 규칙을 깨고 도드라지는 존재 자체의 의외성. 어떤 건물에 이 모든 면이 담겨 있다면 시간에 쫓기고 있는 와중에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익숙한 행동을 하게 되겠죠. 스마트폰(운 좋게 가지고 있다면 카메라)을 꺼내 사진을 찍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질서와 균형을 겸비하고 색에 대한 감수성이 넘치는 대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리엔 회색 콘크리트가 태반이지요. 멋을 부렸다 하더라도 30년 전 장식과 15년 전 장식과 작년에 새로 단 장식이 혼랍스럽게 엉켜 있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매일 봐서 익숙한 풍경 안에서 숨겨진 미덕을 발견해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굳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알고 보면 전혀 진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여기 한 권이 책이 그 갈증을 해소해 주겠다고 도전장을 내밉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유명 감독의 이름을 내건 『우연히, 웨스 앤더슨』은 사진집이자 일종의 가이드북입니다. 서점 분류상 ‘여행 가이드’ 카테고리에 속해 있다고 가이드북이라고 한 건 아닙니다. 사진은 대륙별로 나뉘어 있긴 하나 그다음부터는 어떤 규칙도 기준도 없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장소가 과연 이걸 맨눈으로 보기 위해(그리고 똑같은 사진을 찍기 위해) 그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망설여지게 할 만큼 너무나 멀고 생소한 곳에 있고요. 그럼에도 이 책이 가이드북인 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런 아름다움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내 주변에서, 혹은 운 좋게 잡은 다음 휴가지에서 찾고 싶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영감을 위한 가이드북이라고 할까요?



이 책은 사진집이지만, 넘기다 보면 의외로 이미지보다 텍스트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진 속 지역 혹은 건물에 관한 설명이 자그마한 고딕체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거든요. 때로는 글이 사진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영국 버킹엄 궁전의 시계공들!) 아시다시피 이 책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에 등장할 법한 실재 장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물 파사드 전체를 찍은 사진이 있는가 하면, 내외부의 극히 일부만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런데 설명은 건물과 장소, 심지어 도시에 얽힌 에피소드를 건드리고 있으니 프레임 안에 담기지 않은 부분은 상상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호기심이 일고,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매력을 갈구하게 만들지요. 글로 떠나는 여행이 실제 여행보다 더 나은 경우도 있음을 이번에도 조심스레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실린 건물들은 완벽한 수직과 수평의 미를 보여줍니다. 카메라 렌즈는 구조상 주변부에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데 편집 프로그램에서 렌즈 교정 옵션 같은 걸 적용하면 미세하게 말려 있거나 뒤집혀 있음을 알게 되지요. 아마도 이 사진집에 참여한 수많은 사진가는 수평·수직계처럼 정확하게(실제로 그런 기구도 사용해 가며) 촬영을 하고, 그러고 나서도 피사체를 강조하기 위해 사진을 자르고 후보정으로 더 정확한 선을 구현하려 했을 겁니다. 아마 육안으로 봤어도 이렇게 완벽한 수평과 수직을 마주하진 못했을 겁니다. 대체로 건물은 밑에서 올려다보게 되니까요. 어떤 면에선 가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모든 선들은 안정감과 완벽에 관한 환상을 불어넣어 줍니다. 이상향이 어떤 곳인지 힌트를 드러내듯 말이죠.


"사랑은 완벽한 보살핌이라는 '상태'가 아닙니다. '투쟁'과 같은 적극적인 명사입니다." _피츠버그 체육회

문명을 완전히 저버릴 결심을 했다면, 항해를 시작하기 좋은 장소는 '세상 끝의 도시',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일 것이다. (…) 등대의 줄무늬가 멀리 사라지면, 당신과 다른 선원들에게 "아디오스" 하고 인사해줄 최후의 생명체는 물개·가마우지·바다사자·펭귄들일 것이다. _레 제클레뢰르 등대

나치의 야만성, 소련의 억압, 공산주의의 등한시, 전쟁의 파괴를 목격해왔음에도 이 건물이 이 가혹한 역사의 중심축들을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격려가 된다. 이 도시에 아름다움을 인식할 줄 아는 공동의 능력이 존재한다는 증거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국가도, 국경도, 한계도 없는 인식 능력이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기에, 그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_BGZ BNP 은행 파리바 지점



2. 『40일간의 남미 일주』, 최민석 지음



최민석 작가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이분의 기행문이 어떨지 대충 상상이 가실 겁니다. 저희가 주로 여행 소재의 책과 웹진을 발행하던 시기엔 따로 여행기를 찾아 읽지 않았는데요, 집에선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요리사의 마음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베를린 일기』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체류기이지만) 이렇게 유쾌한 기행문이 있다니! 『40일간의 남미 일주』라는, “1일 차부터 40일 차까지 시시콜콜하게 남겼을 것 같은 여행 기록을 읽어도 될까?” 싶은 제목 앞에서 겁이 나지 않았던 건 역시 최민석 작가가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구성도 정직하게 1일부터 40일(실은 41회에 에필로그)까지 시간과 여정 순으로 흘러감에도 말이죠.

이 책은 여행 중에 손으로 쓴 원고가 90%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기억을 더듬으며 쓰는 여행기(이쪽이 일반적이긴 합니다만)보다 생생하지요. 게다가 하루의 기록은 되도록 한 가지 소재(에피소드)로만 채운다는 저자의 신념(?) 덕에 디테일과 지루함이란 양면성을 지닌 ‘시시콜콜’의 함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오 이것이 바로 남미군, 싶은 장소와 사람들이 잔뜩 나오는데요, 정작 본문에선 어떤 날은 택시(혹은 우버) 기사 이야기만 있고요, 어떤 날은 세탁기와 씨름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딱히 의도했다기보단 현지에서 어제를 돌아보며 가장 기억에 남은 사건을 쓰고, 일정 분량이 되면 그냥 거기서 끝내고 다음날로 넘어가며 자연스레 만들어진 구성이지요. 그래서 긴 여행기를 읽다 보면 느껴지는 피로감이 없긴 한데, 어쩐지 좀 아쉽기도 합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좀 더 얘기해 달라고요! 외치고 싶어집니다.


bogota, colombia @unsplash


보통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여행이라고 하지만, 저자에게도 불행은 계속 따라옵니다. 일정의 절반 이상 배탈에 시달리고, 잠도 못 자고 항공사 고객 센터 직원과 3시간 넘게 채팅하고, 24시간 동안 싸지도 않은 신발을 세 켤레나 사기도 하지요. 그걸 저자 특유의 유머와 함께 읽고 있으면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기보단 그냥 계속 웃고 싶어져서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듭니다. 또, 여행 중 마주치는 낯선 모든 것을 독자가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익숙한 것으로 해석하고 묘사하는 것도 최민석 작가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작가는 빛을 발합니다. 가벼운 듯하지만 그 가벼움을 유지하는 솜씨는 가볍지 않지요.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며 쓴 『피츠제럴드』는 느낌이 또 다릅니다.) 몇 번 이런 유쾌함을 따라 해 보려 했지만, ‘황새를 쫓아가려다 다리가 찢어진 뱁새만이 제 심정을 이해할 겁니다.’ 직전의 리뷰가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라 이왕이면 계속 남미로, 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읽고 리뷰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흐름이 좋네요. 해외여행을 갈 수 없는 코로나19 시국이라 사람들이 여행기를 많이 읽을 것 같습니다. 실은 그렇지 않다는 현실은 저희 책 분기 판매량이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가장 먼 곳인 남미를 이 책을 통해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유쾌한 글이 일상화된 우울도 좀 털어내 줄 거라 생각합니다.


중남미 작가들이 왜 그토록 글을 길게 썼는지 이제야 알겠다. 단지 굴곡진 역사 때문이라 여겼는데, 와 보니 이곳이 현실적으로 거대한 스피커 통이기 때문이다. 음악 템포가 빠르면 마음이 급해져 말을 빨리하게 되고 말도 많아지듯, 이런 환경에서 글을 쓰니 수식도 길어지고 계속 무엇이라도 쓰게 된다. 안 그래도 역사적 이유로 할 말이 많은데, 환경마저 이러하니 그들은 그토록 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_74p.

200자 원고지 한 장에도 돈을 받고 쓰는 나와, 출연료도 없이 거리에서 겨우 동전 몇 닢을 받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춤추며 노래하는 이들 중, 과연 프로는 누구인가. 과연 직업 예술인은 누구인가. 기타를 치는 저 손가락은 거의 얼어갈 텐데, 어찌 얼굴에선 웃음꽃이 시들지 않는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자 기쁨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_303p.

지금의 내 심정은 한겨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길바닥에서부터 조리 샌들을 신고 와,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서 마침내 맨발이 된 오직 나 자신만이 이해할 것이다. _358p.



3. 『로포텐』, 정해진 지음



8년 동안 디자이너로 살며 숱한 야근과 병을 얻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떠난 북유럽. 여행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 장 한 장 편지를 쓰고, 눈물도 흘리고,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에 진 응어리가 풀리는 걸 느낍니다. 돌아와서도 삶은 원래대로 이어져 이제 15년차가 넘는 디자이너가 됐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후로 여력이 될 때마다 북유럽을 다시 찾게 됐다는 것입니다. 『로포텐』을 쓴 정해진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로포텐 제도는 노르웨이 북서부에 있는 군도입니다. 계절에 따라 극야와 백야가 오고, 겨울엔 물론 오로라를 볼 수 있으며, 대구가 어마어마하게 잡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저 먼 북쪽, 극지에 가까운 그 땅과 바다엔 묘한 자력이 있어요. 땅 끝에 서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스물네 시간 낮이 계속되거나 스물네 시간 어둠만 내리는 세상이라면 해답 없는 질문도 풀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북극으로, 북극에 가까운 그 땅과 섬으로 나아가는 건가 봅니다.



제가 극지방, 아니, 『로포텐』을 서점 매대에서 보고 집어들 수밖에 없었던 건 지도책처럼 세로로 길쭉한 판형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표지에 박힌 금박, 감각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사진 배치, 책을 반으로 나누어 앞쪽은 4도 인쇄, 뒤쪽은 1도 인쇄로 찍은 효율성. 정보도 지루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고, 만들기 어렵다는 지도 이미지도 깔끔하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직업병(?)이 튀어나왔는데, 그렇습니다, 『로포텐』은 편집자나 북 디자이너에게 레퍼런스가 될 책입니다. 이 책은 정해진 작가가 쓰고, 찍고, 디자인도 직접 한 책입니다. 그러면서 한국엔 거의 정보가 없는 ‘로포텐 제도’를 안내하고 있어 유용하기도 하지요. 에세이 파트가 짧은 게 아쉬울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 나침반 같은 마음이 된다면, 얼어붙은 겨울의 극지에서 뵙겠습니다. 또는 백야의 섬에서 God Kveld, 가장 밝은 저녁 인사를 나눕시다.


로포텐 제도의 끄트머리 오. 탄생, 죽음, 일출, 일몰… 모든 시작과 끝은 그 이름만으로 가치를 지닌다. 이곳도 그렇다. _92p.

지난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친구와 “여기는 마치 촬영이 끝난 트루먼쇼 세트장 같아”라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이곳은 그것의 결정판이었다. _95p.

해가 지지 않는 이곳에서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고 너나 할 거 없이 몽유병 환자처럼 넋을 놓고 주변을 서성인다. _103p.




* 이 리뷰는 여분의책방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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