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세 권
1. 『여름밤 열 시 반』,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사랑이 이루어지려 합니다. 마드리드까지는 약 267km. 그곳은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곳이자 또 다른 사랑의 종착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폭풍우가 찾아옵니다. 네 사람을 실은 랜드로버는 밀밭으로 둘러싸인 어느 작은 마을로 피신하고, 그렇게 사랑은 유예됩니다. 그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남편 피에르와 친구 클레르, 네 살 난 딸 쥐디트와 함께 스페인을 여행 중입니다. 악천후를 피해 찾아온 여행객들로 마을 유일한 호텔은 만실이고 방을 잡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복도에 자리를 깔고 하룻밤을 보낼 처지입니다. 마리아는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십니다. 호텔에 방이 없다니 얼마나 얄궂은 일인지. 피에르와 클레르는 오늘 사랑을 나누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놀라운 소식을 접합니다. 그날 낮,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라는 남자가 자신의 아내와 연인을 쏘아 죽이고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아마 지붕 위에 숨었을 거라고, 그를 아는 마을 사람이 이야기하지요. 그때부터 마리아는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아내와 정부를 죽인 남자의 처지와 서로 사랑에 빠진 남편과 친구를 둔 자신의 처지가 비슷해서일까요? 아니면 남편과 친구의 배신을 견딜 수 없어 술처럼 정신을 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일까요?
뒤라스의 『여름밤 열 시 반』은 위태위태한 여름휴가를 떠난 네 사람의 하룻밤을 다룬 소설입니다. 마리아는 남편과 친구의 관계를 알고 이 여행을 제안합니다. 그녀는 대체로 무기력한 상태이며 알코올에 중독돼 있지요. 피에르와 클레르가 마드리드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안으리라는 건 다음 날 폭풍우가 걷히고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사실만큼이나 확정적입니다. 마리아가 흡사 남편과 친구의 밀회가 성사되길 기다리는 듯 보이는 이유는 결국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이지요. 그러나 우연히 로드리고를 찾아낸 마리아는 지금까지 보여준 권태와는 상반된 선택을 합니다. 경찰이 포위하고 있는 이 마을에서 로드리고를 빼내어 마드리드로, 아니, 아예 프랑스로 함께 도망치려는 거지요. 살인을 저지른 이방인을 초대함으로써 예정된 세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듯, 혹은 완전히 파괴하려는 듯 그녀는 위험을 무릅씁니다. 사실 그녀는 조금도 위협을 느끼지 않습니다. 태연하고, 어떤 면에선 치밀하기까지 하지요. 마치 지금처럼 권태와 알코올에 사로잡히기 전까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듯이요.
소설은 현재 시제 위주로 마리아가 보는 것,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인물들에 대한 거의 최소한의 정보만 주어지기 때문에 많은 부분은 독자의 상상과 추측으로 조각이 맞춰지지요. 속도감이 느껴지지만 실제 시간은 작품 속의 시간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그게 왠지 모를 불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소설 초반, 소나기 내리는 소도시의 여름밤은 지금껏 제가 읽은 여름에 관한 여러 묘사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탁월합니다. 로드리고를 탈출시키고 동틀 녘을 맞이하는 밀밭에서의 묘사도 그렇고요. 불안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아름답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리고 술과 피로, 도무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말갛게 떠오르지 못하는 마리아의 의식은 그녀의 부조리한 행동을 이치에 맞고 공감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불완전합니다. 폭풍우와 도망자는 배경이었을 뿐, 예정된 시나리오는 이것이었습니다. 배신의 밤(”혼례의 밤”)을 앞두고 마리아는 피에르에게 말합니다. “우리 이야기는 끝났어.” 마리아가 이 혼란스러운 여행을 시작한 것은 결국 그 말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밤 열 시 반, 그리고 여름.
그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 드디어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_43p.
그녀 덕분에 그가 잠시나마 절박한 절망에서 벗어나, 전쟁이라든가 도주라든가 증오 같은 인간적 행동의 어떤 일반 원칙을 기억해낼 가능성. 그의 고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붉은빛 여명을 기억해낼 가능성. 이런 이유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결국 끝까지 살아가야 할 평범한 이유. _68p.
그녀가 몸에 뿌린 향수는 그녀 자신에 대한 그녀의 절대권,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떠나간 그의 배반, 그녀에 대한 그의 동정심, 이런 것들을 담고 있는, 다시없이 소중한 향수였다. 즉 그녀는 사랑의 종말을 예고하는 향기를 몸에 묻히고 있었던 것이다. _169p.
2. 『모데라토 칸타빌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몇 년 동안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복잡한 악보가 읽히고 손가락이 어찌어찌 그걸 따라가게 되는 연습의 성과는 성취감을 안겨 주었지요. 그런데 한 가지, 꽤 오래 지나고 나서도 알쏭달쏭한 게 있었습니다. 알레그로, 포르테, 돌체… 바로 악보에 쓰인 연주 지시어였습니다. 템포나 강약, 분위기를 지시하는 음악 용어들의 뜻은 알아도 도대체 그걸 연주에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는 모르겠더라고요. 빠르게는 무엇을 기준으로 얼마만큼 빠른 것일까? ‘달콤한dolce’ 연주는 어떤 연주인 걸까? 치는 내 마음도 달콤해져야 하는 걸까? 그저 악보를 따라 정량적이고 기계적으로 건반을 두드렸을 뿐이지 음악을 ‘연주’하지는 못했던 한계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지시어들의 모호함이, 사실 그 단어들을 내심 좋아하게 만들었습니다.
연주법이자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모데라토 칸타빌레’ 역시 모호한 세계를 펼쳐냅니다. 매주 금요일 안 데바레드 부인은 아이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키기 위해 도시 정반대편 부둣가로 향합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맞은편 카페에서 길고 긴 비명소리가 들려오지요.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여성, 살인범인 남성은 그가 저지른 범죄와는 별개로 아무리 봐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죽은 여자의 시체를 끌어안고 그녀를 떠나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안 부인은 이 살인이 광기 어린 사랑의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사랑을 위해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 게 아닐까? 얼핏 죽은 여인의 얼굴을 본 안 부인의 말에 따르면, 죽은 여자는 죽고 나서도 기쁘게 웃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 선생과 아이의 끈질긴 실랑이와 살인 사건이 교차하는 불안한 도입부가 지나가면 소설은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요. 이 노래는 흥얼거림이고, 가사도 멜로디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한낱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건이 벌어진 카페에서 쇼뱅이라는 청년을 만난 안 부인은 그와 포도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눕니다. 급기야 레슨이 없는 날에도 아이를 데리고 찾아와 어느 연인이 어쩌다 죽음으로써 사랑을 완성하려 했는지 이야기하지요. 물론 두 사람 다 진상은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뿐입니다.
부유한 제철소 사장의 부인인 안과 젊은 노동자 쇼뱅은 점점 밀회를 나누는 연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고백도, 아슬아슬한 접촉도 거의 없습니다. 안은 끊임없이 쇼뱅도 알지 못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쇼뱅은 한때 자신이 일했던 제철소의 안주인을 유심히 관찰해 왔음을 밝히며 그녀를 연모해 왔다는 인상을 주지요.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아귀가 잘 맞지 않습니다. 그저 떨어지는 해와 그들이 마주 앉은 테이블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주변 손님들은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프레스토로 밀려들어 왔다 사라질 따름입니다. 두 사람이 정말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됐을까요? 아니면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공통의 이상향을 상대방한테서 찾고 있을 뿐인 걸까요?
작품 해설에 잘 나와 있듯 뒤라스가 의도한 간접적이고 추상적이면서 은밀한 이런 표현 방식은 아이가 치는 소나티네처럼 (곡보다는 훨씬 울적한 빛깔의) 심미적인 즐거움을 줍니다. 한편으로 후반부 만찬 장면은 절제되었으나 도저히 숨길 수는 없는 강렬한 감정으로 너울거리고요. 안 부인은 모든 욕망을 거세하고 오로지 식욕과 과시욕만 남은 부류에서 빠져나와 죽음처럼 강렬한 사랑을 꿈꾸었습니다. 그녀와 쇼뱅의 마지막 대화는 그녀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혹은 끝끝내 성공했음을 동시에 암시합니다. 결국 안과 쇼뱅이 불운한 연인에 관한 퍼즐을 맞춰 나가는 내내 우리도 그들의 감정을 더듬거리고 있었습니다. 악보 위 지시어의 모호한 속삭임을 듣기 위해서는 어쨌든 연주자가 되어야 하듯, 이 소설의 섬세한 속삭임을 듣기 위하여 기꺼이 독자가 되어 볼 일입니다.
“밤이면, 나중에 가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긴 침묵 때문이었겠죠.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게 된 침묵 말입니다.” _53p
그 여자는 소나티네에 귀 기울였다. 아이가 빚어내는 음악이 세월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그녀에게로 오고 있었다. 그걸 들으면서 기절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_72p.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_112p.
3.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마르그리트 뒤라스
달리 선택지가 없는 호텔에서는 매일 똑같은 요리(”영구불변의 생선구이”)를 내놓습니다. 끔찍한 더위를 이기는 법은 바닷물에 들어가 해가 저무는 짧은 저녁을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을 올해도 찾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보다 나은 휴가지를 알면서도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다른 술은 제쳐두고 ‘캄파리’만 들이키는 사람들. 매일 똑같은 스케쥴을 반복하며 휴가지에서 일상을 만들어 사는 사람들. 애초에 옆에 있는 친구와 배우자조차 지긋지긋해진 사람들. 여름, 무더위, 권태. 이 소설을 읽으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들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여름에 더 잘 드러난다.” 사랑과 슬픔과 증오와 연민조차 반쯤 녹아 흐물흐물해진 고무처럼 미적지근한 파도를 기다립니다.
출판사에서 고심 끝에 붙였을 것 같은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라는 부제처럼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권태에 빠진 부부 관계를 다루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그 주제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치대는 다섯 친구의 대화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애정은 물론 우정의 영역에서도 이들은 서로를 못 견딜 만큼 지겨워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저버리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억지로 끌려와 온갖 행패(?)를 부리는 가정부조차 자신의 고용주와 그 아이 곁에 붙어 있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가실지 모르는 폭염 앞에 드러나는 걸까요? 최초의 사랑과 친밀감과 헌신은 시간의 흐름과 반복 앞에 무뎌지고, 양각에서 음각으로 파고들며 양쪽을 찌르는 흉기가 될 수밖에 없는 걸까요? 인간의 선한 정신은 본디 그토록 변질되고 말 운명인 걸까요?
부부인 사라와 자크, 친구 부부인 루디와 지나, 그리고 싱글인 다이아나는 다른 휴가객 모두 인정할 만큼 똘똘 뭉쳐 다닙니다. 멋진 배를 타고 등장해 사라와 뜨거운 욕망을 주고받는 ‘장’조차 그들 무리 안으로 파고들 수 없어서인지 소설 내내 이름 대신 ‘남자’로 호명되지요. (비슷한 원리는 반대로도 작용하는지 남자가 사라를 간절히 원하며 그녀를 “사라”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그녀는 놀라고 맙니다. 남자가 단순한 욕망의 대상을 넘어 자기 인생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음을 깨달은 듯이요.)
그 유대감 안에서 다섯 친구는 서로에게 현실적인 면과 나이브한 면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자신의 잣대로 상대의 어리숙한 면을 공격하지만, 반대로 제 허점을 세게 얻어맞기도 합니다. 논쟁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을 고수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에게는 이기적이고 비논리적으로 굴기도 하고요. 독자로서는 다섯 인물 누구에게도 온전히 정을 붙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들이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자신의 루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더 강력한 루틴에 갇혀가는 ‘늙어가는’ 인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처음 책 제목만 봤을 때는 ‘말들’이 words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원제목을 다시 보니 chevaux, 프랑스어로 이힝 말의 복수형이더군요. (한국어에서만 우연하게 동음이의어지만, 실제 제목의 의미가 words였어도 소설과 잘 어울렸을 것 같네요. 사족으로 ‘파에스툼의 물소들’ 혹은 ‘파에스툼 신전의 잠든 물소들’ 같은 제목이었어도 좋았을 것 같은…) 친구들이 신물 나는 생선요리와 지독한 더위를 떨치고 일어나 보러 갈 타키니아의 옛 벽화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그게 변화의 실마리가 될까요? 권태는 계속되겠지만 조금은 더 잘 유영하게 될까요? 최소한 이들이 떠날 여행이 더위 때문에 오지 않는 비만 기다리던 헛된 희망과는 사뭇 다르리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그녀가 결코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어 버릴 남자였다. 또 다른 남자는 그녀가 결코 알지 못할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삶을 동시에 다 살 수는 없어, 라고 루디는 말했었다. 두 남자에 대한 지식은 양립이 불가능했다. _248p.
모두 명백한 노스탤지어와 함께 망명자라도 된 듯 자기의 도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곳이 아무리 열악해도 제각각 그곳에서 보냈던 삶의 양식에 애착이 있었던 만큼, 그 삶의 양식이 최악이 아니라는 증거를 늘어놓을 준비가 돼있었다. _292p.
“어쩌면 오래된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악의적으로 만드는 건지도 몰라. 위대한 사랑의 황금 감옥 말이야.” (…) “그래도 넌 날 사랑해야 돼, 난 최소한 내가 악의적인 걸 알고 있으니까.” _295p.
* 이 리뷰는 여분의책방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