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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Sep 07. 2022

세상을 담기에 충분히 짧은

단편집 세 권의 북 리뷰

1.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파리 리뷰 엮음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미국 문학지 〈파리 리뷰〉에 실렸던 단편 선집. 그러나 이 멋진 제목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는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열다섯 편의 단편이 실렸으니 열다섯 문장이 필요할까요? 그조차 부족할 것 같네요.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 뚜렷한 경향성은 없습니다. 주제도, 분량도, 심지어 장르조차도 서로 다릅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보르헤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미국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것.

각 단편 뒤에는 그 단편을 추천한 작가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일종의 작품 해설이고, 때로는 팬레터이며, 한 편의 완결된 에세이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떤 작품들은 읽으면서도 해설이 궁금해 자꾸 페이지를 훌쩍 뛰어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 책의 백미 자체가 열다섯 편의 해설일지도 모릅니다. 번역가의 서문에서도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원제인 『Object Lessons』이 ‘작가들이 추천하는 단편’이라는 콘셉트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처음 이 책을 엮은 〈파리 리뷰〉에서도 해설을 기존에 발표된 단편들을 재발견하는 트리거이자 하나의 명분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해설 부분에 접은 페이지가 꽤 많았고요. (밑줄을 긋는 대신 책장을 접어서 표시해 둡니다. 어느 쪽이든 헌책방에 되팔 일은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실제로 영화로 만들어졌을 만큼 페이지터너급의 서사를 자랑하던 「궁전 도둑」. 제목처럼 어렴풋한 읽기를 하게 되는 시적인 문장에 가슴이 아릿하던 「어렴풋한 시간」. 여름에 관한 아름다운 묘사로 이 계절에 잘 어울리던 「하늘을 나는 양탄자」. 늙음에 관한, 시쳇말로 ‘웃픈’ 소품 「늙은 새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젊은 예술가의 부침을 직조한 「펠리컨의 노래」, 이 책의 한국판 제목을 결정한, 동시에 왜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 수밖에 없는지’ 강렬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위트 넘치는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 충격적인(?) 블랙 코미디였으며, 그게 하필 맨 마지막에 배치되어 색다른 기분으로 책을 덮게 하는 「스톡홀름행 야간비행」. 개인적으로는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희한하고도 슬픈 ‘팩션’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 아, 카버와 설터의 단편도 빼놓을 수 없지요. 다른 책에서 읽었던 작품이지만 다른 번역으로 읽는 맛을 선사합니다.

리뷰를 해도 이렇듯 표면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네요. 해설도, 추천사도 입을 모아 말하듯 단편마다 개성이 뚜렷하여 작품과 작품 사이를 매번 새로운 세계를 방문하듯 통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책이 두꺼워도 금방 읽히는 장점이기도 하고요. 단편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세요.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기쁨은 물론, 열다섯 작품 중 어느 하나는 바로 내 이야기 같다고 느끼실 겁니다. 짧지만, 이 소설들이 삶 이모저모를 채취하여 제 안에 가두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도 그에게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일도 노골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를 변화하게 한 일들은 흐릿하고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이상하게 거추장스럽고 있을 법하지 않은 삶을 살게 했다. 죽음은 철저하지 않았다. 죽음에는 선명한 테두리가 없었다. 모든 사랑과 책임만 남겨두고 야옹거리며 영영 사라졌다. _「어렴풋한 시간」 중

노스탤지어는 구체적이고 세밀한 감각이 쌓일 때 생긴다. (…)
기억의 대상이 아무리 평범하고 진부하더라도 그 기억과 감정을 심오하게 하고 느껴지게 하고 사실이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정밀함과 축적이다. _「하늘을 나는 양탄자」 해설 중

행성들과 은하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온 우주가 원래 쌀알 하나 크기에서 왔다고 해. 그게 폭발해서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 태양, 별들, 지구, 바다, 내가 당신에게 느꼈던 마음을 포함해 모든 것을 형성했대. _「방콕」 중



2. 『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세상이 잠든 동안, 크리스마스 야외 조명 콘테스트의 유력한 우승 후보자 집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석고상이 사라진 것이죠. 주인은 엄청난 현상금을 겁니다. 하지만 끝내 석고상은 나타나지 않고, 주인은 급하게 다른 장식을 사들여 예정대로 콘테스트의 승자가 됩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도박장을 운영하며 살인, 탈세를 저지르는 범죄자였던 그는 누가 봐도 천박하고 화려한 조명 쇼로 신문에 대서특필될 순간을 고대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잠든 동안, 공장 지대 너머 어느 누추한 헛간에서 사라졌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석고상이 발견됩니다. 예수의 탄생 순간이 그대로 재현된 듯한, 보자마자 모두가 저절로 진심 어린 기도를 올리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죠. 수많은 사람이 도시의 축제를 뒤로하고 기적이 일어난 헛간으로 경건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우화 같은 이야기는 커트 보니것의 단편입니다. 책의 표제작이지요. 모두 열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세상이 잠든 동안』은 그의 장편 소설보다는 좀 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은 아들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시어머니를 만나야 하는 여인, 타인의 실체 대신 녹음된 목소리만 들으며 일하는 외로운 타이피스트, 같은 팀의 노부인에게 거짓 이야기를 꾸며내며 삶의 기쁨을 찾는 회사원, 얼굴도 모르는 펜팔 친구에게 애틋한 감정을 키우는 여인, 내심 열등감을 느끼던 상대와 그림으로 대결을 하게 된 두 명의 화가……. 저마다 다른 상황과 관계에 놓인 이들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하나,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함입니다.



커트 보니것이 반전, 풍자, 휴머니즘으로 유명한 작가이긴 하지만, 그의 단편을 읽으며 비판과 해학이 주는 쾌감 그 이상의 울림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같은 영미권 작가인 레이먼드 카버와 제임스 설터의 단편은 칼로 툭 내리치듯 이야기를 시작해 구경이 넓은 드릴로 살덩이 안을 천천히 파고드는데요, 보니것의 단편에도 그에 못지않은 해부학적 파괴력이 있습니다. 보니것의 인물들은 카버보다는 좀 덜 처절하긴 하지만 보다 보편적인 인간상을 끌어안고 있어요. 그래서 더 깊지는 않을지언정 더 넓다는 느낌, 더군다나 아닌 척하면서도 끊임없이 인물들에게 장난기 어린 애정을 보내는 작가의 시선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열여섯 편 중 특히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제니」, 「세상이 잠든 동안」, 「사기꾼들」이었습니다. 공장 지대의 쓸쓸함이 전해져 오는 「여성인력팀」도 좋았네요. 그러고 보니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외면하는 게 일상이 된 이 시대에 메시지를 전할 법한 「루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러다가는 계속 나열할 거 같으니 여기서 줄여야겠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유령이에요. 아침이면 연기와 추위를 뚫고 나타나서, 하루종일 보일러와 실리콘 개스킷과 몰리브데넘 걱정을 하며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다섯시가 되면 사라져요.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버린다고요.” _「여성인력팀」 중

“세네카행 427번 열차가 4번 플랫폼에 도착합니다.”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목소리는 자신들의 목적지가 원래 있던 곳보다 나을 거라는 승객들의 환상을 전부 박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_「루스」 중

캐딜락이 벤의 가게 앞에 섰다. 캐딜락의 점잖으 천둥 같은 엔진 소리가 멎었다. 싸구려 천으로 된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차에서 내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찬 공기 속에서도 건강과 젊음으로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지만, 굉장히 수줍어했다. 내딛는 모든 걸음이 사과하는 것처럼 보였다. _「돈이 말한다」 중



3.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의 책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입니다. 사실 제목이 너무 멋져서 뽑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년에 접어든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승차권』은 당시 함께 읽던 제임스 설터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었지요. 우하향 곡선을 그리는 인간의 삶, 거진 ‘평생’을 산 이후의 적막함이 두려워도 꼭 해야만 하는 예습 같았습니다.

로맹 가리의 단편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승차권』이 떠올랐습니다. 역시 제목이 매력적이고요,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승차권』의 주인공 이름이 ‘자크 레니에’로 같기 때문이지요. 작가 자신은 부인했지만, 독자는 ‘자크 레니에’란 인물이 로맹 가리의 분신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쓴 「페루」에서도, 노년에 쓴 『승차권』에서도 자크 레니에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걸 쉽게 꺼내지 못할 만큼 회한으로 가득한 인물입니다.



소설집 『페루』에는 모두 열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반전이 있는 소품에서 무려 SF까지 외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단편 특유의 모호함과 간접적인 서술 때문에 한 번 읽는 것으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저한텐 많은 이들이 표제작만큼 인상적인 단편으로 꼽는 「류트」가 그랬습니다.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오십이 넘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 남편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그가 외교관으로 사는 삶에 충실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애쓰는 아내의 이야기였습니다. 단편 「페루」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지만, 인간은 참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랫동안 동반자로 살아온 사람들끼리도 끝까지 모를 부분이 있지요. 심리학이나 생물학이, 그러니까 ‘과학’으로 대표되는 문명과 기술이 인간의 작동 원리를 낱낱이 밝힐 수 있을까요? 뭐, 그러고 있는 게 분명하긴 하지만 저에겐, 그리고 로맹 가리에게도 인간은 여전히 이해 불가한 존재인 듯합니다.

이 소설집 전반엔 냉소와 희망이 동시에 흐릅니다. ‘냉소’를 먼저 말한 이유도 있고요. 어떤 이는 잘못된 명분을 좇고, 어떤 이는 개인의 복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속이고 희생시킵니다. 자신을 고문한 나치 친위대를 돕는 남자(「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암담한 상황에서 낙관과 인내를 잃지 않는 사람들(「지상의 주민들」), 핵전쟁으로 인류가 돌연변이가 되었음에도 이념 대결과 경쟁을 멈추지 않는 인간들(「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카버, 설터의 단편을 읽었을 때처럼 로맹 가리의 단편들 역시 읽고 나서 개운한 기분을 남기진 않습니다. 가슴 한구석이 베여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지요. 그리고 그 구멍에 뭔가가 차오릅니다. 인간이 더 알 수 없는 존재가 됨으로써 아주 조금 인간에 더 가까워지는 묘약이랄까요, 그게 아마도 문학의 작동 방식인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할 때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_「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

두 손이 자기 몸을 떠나 상점의 후미진 구석으로 가서는, 그가 막연히 느끼고는 있지만 의식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두 손의 삶, 기어가는 듯 더듬더듬 나아가는 신비로운 삶을 살아낼 것 같은 느낌으로, 자신이 또 하룻밤을 새우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_「류트」 중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인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걸 말이죠, 선생님, 하하! _「본능의 기쁨」 중




* 이 리뷰는 여분의책방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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