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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May 07. 2022

인쇄소에서

책이 찍히는 날에


책은 현실 도피 수단 중 유일하게 스스로 한심해지지 않는 수단이다. 책이라 하면 그 정도의 가치는 기본으로 깔고 가야지. '기준'이라는 건 날만 있는 칼이다. 뭔가를 벨 때는 좋았지? 그만큼 내 손도 찢어진다는 건 외면했지? 최소한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책인지 판단할 객관은 없다.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간절하기만 한 구멍이 또 하나 생겨버렸다.


한 번쯤 써 보고 싶던 종이로 내지를 엮고 한 번쯤 뒤집어쓰고 싶던 커버로 표지를 쌌다. 대략 어떤 물성을 띤 책이 나올지 가늠이 되자 디자이너가 안팎 모든 부분에서 일관된 콘셉트로 디자인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종이 재질과 본문 구성, 이미지 색감까지. 조금 오래된 책. 어쩌면 예전부터 누군가가 알음알음 읽어 왔을 것 같은 책. 그건 내게 생긴 구멍을 메우는 독려이자 지원이었다. 책을 디자인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근데 책을 쓴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있었니?


인쇄는 들어갔고 수정할 여지는 없다. 길을 쓸자,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거대한 벽의 둘레를 따라 걷는다. 톡톡 두드리면 너머의 누군가가 툭툭 대답을 해 줄 거라고 믿어 버린다. 책만큼 스스로가 한심하지 않은 도피 수단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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