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의 밤거리에서 본 것들

나는 그 순간에 이미 돌아갈 날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by 베르고트

탈리스커를 마시고 싶어, M이 말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십여 분을 걸어서 도착한 크헤성 가Rue Crescent는 별세계 같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해안가의 산책로가 떠올랐다. 한쪽에는 해변이, 한쪽에는 식기와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자라나는 파라솔이 늘어선 산책로였다. 크헤성 가의 한쪽 길엔 모래밭은커녕 서프보드가 그려진 그라피티도 없었지만, 원색의 필터를 투과한 불빛은 파도가 그러하듯 시야 한 귀퉁이로 밀려왔다 쓸려갔다를 반복했다. 해변을 산책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하지도 않았다. M에게 듣던 것보다 훨씬 쌀쌀한 날씨에 웃옷 깃을 단단히 여며야 했다. 하지만 이 도시의 시민들은 이런 날씨 정도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식당과 술집의 테라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파라솔은 없어도 그것과 똑같은 빳빳한 재질의 차양은 있었고, 파도가 칠 때마다 들리는 쌀을 흔드는 소리는 없어도 매니저나 DJ의 취향에 따라 선곡된 음악이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전등 하나만 켜진 비밀스러운 거실과 하루 장사를 마감하려는 옷가게나 잡화점의 졸린 쇼윈도만 보았기 때문에, 저녁과 밤 사이의 그 고단한 한숨 같은 시간의 풍경에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에, 크헤성 가의 흥겨운 분위기는 나를 새로운 기분으로 인도했다. 탈리스커를 마셔야겠어, 나도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크헤성 가의 한 술집에 들어갔다. 클럽도 아닌데 주크박스에서 통제하는 음악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컸다. 정장 차림의, 아니, 침대 위에 잠옷을 꺼내두고 입고 있던 외출복을 풀어헤치기 직전의 차림을 한 회사원들이 바 주변에 서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런 것도 회식이라면 내가 알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인걸. 나는 그들이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인지 퇴근 후에 모인 대학 동기들인지 궁금했다. 한 여자는 벌써 잔뜩 취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뜨고 있었다. 일행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고, 사무실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좋은 가죽을 덧댄 의자와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미움을 받는 처지는 아닌지 남은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그녀를 배웅하고 자신이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실내에 앉을 수는 없었다. 그걸 줄여달라고 하면 그들의 흥을 깰 게 분명했다.


탈리스커는 그리 널리 알려진 위스키는 아니다. 하지만 나와 M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오늘이 우리가 몬트리올에서 함께 하는 첫날이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메뉴판엔 탈리스커 10년 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시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주문을 하고 위스키 두 잔이 나오는 덴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 머리 위에는 전기난로가 붙어 있었는데 그게 스피커 역할을 겸하기라도 하는 듯 음악은 밖에서도 아주 잘 들렸다. 나는 반지하 술집의 몇 계단을 올라 담배 한 대를 태웠다. 건너편 식당의 테라스에는 재킷을 입은 여자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일광욕을 하는 사람처럼 전기난로의 불그스름한 체온을 쬐고 있었다. 언뜻 봐도 지금 이 거리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멋쟁이였다. 그들은 해변 산책로에서도 어떻게 하면 돋보이는지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몬트리올엔 워낙 대학이 많아서 어딜 걸어도 대학가를 걷는 셈이라고 했다. 꽤 고급스럽고 '힙'한 거리를 지나면 복사집 컴퓨터 앞에 앉아서 리포트를 쓰는 청년이나 입술에는 담배 필터를, 어깨엔 노트북 가방을 걸친 채 빠르게 걷는 여자를, 또는 뒷골목 어귀에 캔맥주를 들고 모여 있는 한 무리의 남녀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앳되고 똑똑해 보였으며, 수중에 돈보다는 시간이 더 많은 청춘이었다. 괜찮은 카페는 이미 다 문을 닫았을 시각이었기 때문에 약간 오른 취기를 북돋울 겸 맥주라도 한잔 더 할까, 아니야, 그러기엔 너무 춥잖아, 결국 생트 카트린느 가Rue Sainte-Catherine를 걷기로 했다. 사실 목적지는 없었다. M은 평소 이런 시각엔 혼자 다닐 수 없었다며 어둠이 장식하여 새롭게만 보이는 거리를 나만큼이나 들떠서 걸었다. 그녀는 이 거리를 수십 번, 수백이라고 하기엔 뭣해도 백몇십 번은 걸었을 것이다. 나는 생트 카트린느에 즐비한 옷가게며 식당이며 멀티플렉스 극장이 들어선 빌딩을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익숙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그녀에게서 넘쳐 흐른 이 거리에 대한 익숙함이 잔잔한 파도처럼 나에게도 밀려와 옷깃을 적셨기 때문인지, 아니면 파리나 홍콩이나 그 어느 도시에선가 보았던 길과 비슷하기 때문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진부하다거나 지루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거의 삼십 시간 정도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고, 그래서 세상 위를 둥둥 떠다니거나 세상이 내 위를 둥둥 떠다니거나 어쨌든 중력이 조금 약해졌다고 믿고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며 보았던 몬트리올의 밤거리가 벌써 환등기에 비친 이미지처럼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이와 비슷한 모든 길 중에서 이곳이 제일 좋아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나는 그 순간에 이미 돌아갈 날을 아쉬워했던 것 같다.



옷과 살갗 사이를 집요하게 비집는 싸늘한 바람과 그 바람이 불어오던 어둑어둑한 골목. 곳곳에 자리 잡은 식당과 카페, 마트 같은 약국과 진짜 마트 같은 마트 들. 극장 전광판에 걸려 있는 보고 싶었던 영화의 포스터. 오 분마다 한 번씩은 나타나는 팀 호턴. 마침내 그곳에서 마신 뜨겁고 진하고 저렴한 커피. Coffee 대신 Café가 붙어 있어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닌 것만 같은 스타벅스 간판. e위에는 악상떼귀가 그려져 있고, 횡단보도에는 평행선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이국적인 도치. “이제 걸어도 돼요.”라고 말하는 하얀색 보행 신호. 다양한 인종들, 그러나 대체로 들려오는 말은 불어라는 생소함. 사람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은 한국 음식점과 그곳을 지나쳐 들어간 지하에 자리 잡은 허름한 베트남 식당. 그곳에서 먹은, 아마 한국 음식점보다 우리 입맛에 더 잘 맞을 것 같은 진한 국물의 쌀국수와 간이 심심했던 분짜. 빳빳해서 자꾸 만지작거리고 싶은 캐나다의 지폐. 거리 이곳저곳에서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담배꽁초. 그래도 다 더럽히지 못할 청결한 거리. 고층 빌딩을 올려다보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뉴욕 맨해튼이나 시카고에는 저런 건물이 훨씬 많을 것 같다고 했던 상상. 이곳이 북미인지 유럽인지 헷갈린다고 참 많이도 했던 말. 가끔은 서울이 연상되기도 한다는 그보단 적게 했던 말. 밤이 깊을수록 깊어지는 피로. 한 잔의 위스키와 한 컵의 커피가 뒤섞여 흐르는 의식과 그 의식 속에서 흘러나오는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 집으로 가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 올라탄 버스. 우리 뒤로 미끄러지듯 멀어지는 미지의 정류장. 그렇게 내가 사랑하게 될 도시에서 발견한 복잡다단한 아름다움, 그 밤거리에서 본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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