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샐러드 먹는 노인
단골집을 만드는 일은 눈도장을 찍는 일, 10잔 쿠폰을 채우는 일, 스탐티쉬stammtisch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딘가 나를 위한 자리 하나를 마련하는 일이다. 단골집에선 덤 하나라도 더 나올 것 같고, 몇백 원 정도는 다음에 주세요, 사양의 미덕이 오갈 것 같고, 굳이 말을 걸지 않아도 무방한, 이를테면 침묵으로 안부를 전하는 능력이 생길 것 같다. 집이나 사무실 주변에 단골집 한두 곳 있는 사람은 그래서 행운아다. 서로 안다는, 은근히 반긴다는, 지난주와 이번 주가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눈치챈다는 정서적 교감은 요즘 같은 시절에 쉽지 않은 일이다. 카운터에서 자주 맞닥트리는 습관 하나로 그런 일이 가능해진다.
몬트리올에서 처음 나흘을 묵었던 코니 아주머니의 집 주변에도 괜찮은 카페가 있었다. 나는 몬트리올에 가기 전부터 그곳을 알고 있었고, 안테나가 항상 그곳을 향해 길게 뻗어있었다. 주방을 어슬렁거릴 때도, 커다란 네온 간판이 달린 벽돌 건물 앞을 지날 때도, 발코니에 서서 한국에서 가져온 라임 향 담배를 아껴 피울 때도 그랬다. 매일 한 번씩 그곳에 가서 글을 쓰겠다며 마음만은 진작 단골이었는데, 이런저런 핑계가 생겨 정작 몸은 가보질 못했다. 어쩌면 여행 중에 단골집을 만든다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단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자의 단골집이란 말이 성립하려면 단골이란 단어부터 아주 유연하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셋째 날 아침, 마침내 Café 92°에 갈 기회가 생겼다. 92도라는 카페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명확했다. 92도, 커피를 가장 맛있게 추출할 수 있는 물의 온도. 예전에 서울에서 일하던 곳 주변에도 비슷한 이름의 카페가 있었는데, 그곳은 93도였다. 커피를 내리기 위한 최적의 물 온도가 92도인지 93도인지 (때로는 88도인지) 그 의견은 분분할지라도 어쨌든 그러한 작명에선 커피 맛을 최우선으로 따지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좋다. 서울 신대방동에 사는 카페 주인도, 몬트리올 세흐브후크 가Rue Sherbrooke에 사는 카페 주인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냈다는 점이 재미있기도 하고.
들어서자마자 빵 구운 냄새, 수프 끓인 냄새와 함께 훅 열기가 끼쳐왔다. 세 명의 직원이 한 평 남짓한 공간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손님들은 그제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다는 듯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능숙하게 주문을 넣었다. 우리는 뜨거운 카푸치노와 진저 티를 마시기로 했다. 주문은 부러 내가 하겠다고 했는데, 못하는 영어와 더 못하는 불어를 섞어서 말을 걸고 싶다는 치기 때문이었다. 꽁지머리에 잘 다듬은 수염이 멋졌던 바리스타는 용케도 내 말을 알아들었다. 감격한 나머지 팁 박스를 쳐다봤지만, 잔돈이 한 푼도 없어 부끄러워지기만 했다.
벽엔 해골이 그려진 포스터가 유난히 많이 걸려 있었다. 이삼십 년 전에 탄산음료를 실어 날랐던 나무 상자는 이제 원두 진열대로 쓰이고 있었다. C자 형 구조를 가득 채운 더운 공기는 라디에이터와 주방의 합작품이었다. 종이컵은 골판지 같은 재질이라 홀더를 끼우지 않아도 손이 뜨겁지 않았다. 이곳은 홀더에 카페 로고를 인쇄해 사람들이 들고 다니며 광고해 줄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어차피 이 전형적인 주택가에 카페라곤 이곳 하나뿐이었고, 손님 대부분은 단골일 테니까. 어쨌든 마음만 단골이었던 나는 조금 늦게 이곳을 찾은 죄로 카페 바깥에 마련된 자리에 앉기로 했다. 실내에 빈자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편이 이곳 전체를 눈에 담기 좋을 것 같아서였다.
Café 92° 앞에 앉아 다른 것도 아니고 나는 가을을 보고 있었다. 햇볕의 온도와 바람의 냉랭함이 이토록 대조적이기에, 이 나라의 단풍이 그토록 새빨간 게 아닐까? 투명함을 아무 색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파란색이 가득 찬 상태로 이해해도 무방할 만큼 맑은 하늘, 우리 옆에 서서 떠날 줄 모르는 빨간 우체국 차, 초록색과 노란색 사이에서 배회하는 나뭇잎의 오늘 자 드레스코드는 카메라에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몇 발자국 떨어진 테이블에서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한 노인이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거리 사진을 찍는 나와 그런 내 사진을 찍는 M이 재밌어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는데, 구도를 잡는 법부터 남달랐다. 제법 추운 날씨에 반바지를 입고 있는 것부터가 남달랐지만.
대화는 자연스럽게 붙었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너무 몰입해 진짜 인간관계를, 세상과 자연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창밖으로 날이 맑은 것만 보고 반바지를 입었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치고는 자기 세계가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채소가 좋아. 사람은 자연을 가까이해야 해.”
이 추위에 드레싱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손가락으로 싹싹 발라먹는 이유도 그런 데 있는지 몰랐다.
그는 이 도시, 이 동네 토박이였다. 심지어 그의 조상은 몬트리올의 초대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단다. 말 그대로 “땅을 파서” 이 도시를 “일군” 첫 번째 세대였던 것이다. 의외의 장소에서 대단한 족보를 지닌 사람을 만난 셈이었다. 이번엔 그가 우리의 출신을 물었다.
“한국인도 일을 아주 많이 하는 사람들이지. 그러면서 네트워크에 단단히 얽혀있고 말이야.”
그는 우리의 국적을 듣자마자 그렇게 지적했다. 성토라기보다는 탄식이었다. 강줄기에서 둔치로 올라와 이제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관조하기로 한 사람의 무기력도 얼마간 느껴졌다. 어쩌면 너무 일찍 뭍으로 올라와 버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내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는 일은 뭔가?”
“전 플로리스트예요.”
M의 말에 그는 아주 반색했는데, 꽃과 관련된 직업이라는 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낙오한 상태인지 제대로 가고 있는 상태인지 헷갈려 그만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전 작가예요.”
종종 외국에선 남들이 알게 뭐냐는 식으로 그렇게 말할 때가 있다.
그는 뭐랄까, 친절하고 푸근한 인상이라기보다는 무슨 이야기를 듣더라도 골똘히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과 중국에 관한 비난을 쏟아냈고, 나아가 국적을 떠나 모든 사람이 잘못된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결론짓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강대국이나 첨단 기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은 없다.) 그런데 내 말을 듣자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를 만난 지 이십 분도 안 됐지만, 어쨌든 그 이십 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럼 출판한 책이 있나?”
아니, 그러기 위해 쓰고 있다고 하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너의 부모에게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들이 (그는 자기 머리를 과장되게 쥐어뜯었다) “으아아아악!”하고 절규하지 않았느냐고. 자기도 그러했다고. 공교롭게도 20세기 최고의 극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노인의 이름은 버나드였고, 그 역시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관해선 말을 아꼈다. 세상사에 관심도 많고 그것에 대해 할 말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마치 글쓰기만은 아직도 조심스럽다는 듯. 그래도 그가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무어라 몇 마디 덧붙이긴 했는데, 그 말을 정확히 어떻게 옮겨야 할지 모르겠다.
“쉽지 않은 직업이야.”
또는,
“쉽지 않은 작업이야.”
아니면,
“쉽지 않은 삶이야.”
어쨌든 나로서는 세 가지 해석 전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먼저 일어날 시간이었다. 악수를 청하자 그가 이런 곳에서 작가를 만나게 될지는 몰랐다며 반가웠다고 했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의 손은 뼈마디가 만져질 정도로 앙상했지만,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그가 어떤 작품을 썼는지도 모르고 어떤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겨울에 반바지를 입고 샐러드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싶다. 보라, 단골은 행운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어떤 동질감을 덤으로 받았다. 그건 92도 만큼의 열기를 일으킬 수도 있는 양이었다. 진저 티에 뜨거운 물을 받아 길을 되짚어 오면서 이곳을 단골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