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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Sep 28. 2017

우리 다시 시작할까요?

처음보다 더 나은 처음으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약이 있다면, 우리 그 약을 한 움큼씩 쥐어볼까요? 그렇게 우리 다시 시작할까요?

 기억을 바꿀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우리 그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헬멧을 머리에 써 볼까요?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을 처음으로 본 날, 당신의 앞머리는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어둑한 조명 아래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약간의 취기를 느끼며 그 흔들림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당신은 내 카메라를 손에 들었고, 약간 옆으로 기울인 내 몸을 비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만든 첫 번째 기억이었다.

 몬트리올에도 같은 카메라를 들고 갔었다. 수동으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구식 렌즈는 아름다운 순간, 행복한 순간, 갈등이 없는 순간을 기억 장치에 옮겨놓았다. 그 사진들만 놓고 보면 우리에게 지우거나 바꿔야 할 기억이 있다는 현실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 당신이 나에게 지었던 표정, 내가 당신에게 남긴 상처, 당신이 내 이름을 붙여야 하는 흉터가 그럭저럭 견딜 만한 일이 되는 것 같았다. 누구도 나의 실수와 당신의 아픔을 골라내어 지워주지 못하고, 나는 그렇다면 새 기억을 그 모든 것 위에 덮어씌울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매일 찾아오는 새벽처럼 실수를 반복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주문이 있다면, 나는 그 문장을 앞뒤로 순서를 바꿔가면서까지 외울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우리다웠던 시간은 몬트리올에서 보낸 가을이었는지 모른다. 그때만큼은 나도 서툴지 않았다고 나는 믿고 싶다. 당신이 보기에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이번 가을의 초입에 몬트리올을 떠올린 이유가 그때의 나를 사랑한다는 데 있다고 믿고 싶다. 그 시절엔 바람이 불었다. 나쁜 기억을 지우는 차가운 바람이었다. 그 시절엔 낙엽이 잔뜩 밟혔다. 골치 아픈 기억을 안고 함께 부서지는 바삭바삭한 소리였다.

 그 시절에 우리는 미술관에 갔다. 보고 싶은 전시가 내가 떠난 후에 시작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도서관에 갔다. 차라리 성전이나 사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곳에서 당신은 종종 이곳을 찾곤 했다며 숨죽여 말했다. 그 시절에 우리는 좁은 계단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한 단 한 단이 영원히 우리 것으로 남을 것처럼 단단하고 튼튼했다.

 시간을 잘라낼 수 있는 가위가 있다면, 나는 그 시절을 지금으로 옮겨놓을 것이다. 찰싹 달라붙는 풀로 붙여 다시 돌려보내지도 않을 것이다.





 가을이 문을 두드리고 지나간다. 오늘 부는 바람은 유난히 세고 차가운 바람이다. 그 바람이 당신을 멀리 데려갈까 두렵다. 나에겐 기억을 지우는 약도, 과거를 바꾸는 주문도, 시간을 떼었다 붙일 수 있는 가위나 풀도 없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하지만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 아무것도 지우고 바꿀 수 없다 해도 다시 시작할까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당신에게 묻겠다. 제가 많이 아프게 했다고 합니다, 당신에게 사과하겠다. 당신을 사랑해도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습니다,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겠다. 그래서 한 번 더, 처음부터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고백하겠다.

 당신을 처음으로 본 날, 당신의 앞머리는 어둑한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앞머리를 눈으로 쓰다듬었다. 당신이 든 나의 카메라 앞에서 웃어 보였다. 당신에게 카메라를 건네받아 당신을 찍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만들 첫 번째 기억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려고 당신에게 간다. 우리, 다시 시작할까요? 대답을 들을 용기도 없이 그렇게 물으러 지금 당신에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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